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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 진보' 되지 않으려면…과거 앙금은 떨쳐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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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 진보' 되지 않으려면…과거 앙금은 떨쳐 버리자"

[재반론] 손호철 교수의 반론에 답함

일전에 내가 썼던 <참여사회연구소 시민정치시평>의 한 칼럼(☞관련기사 보기, 참고로 여기서 표명된 의견은 내 개인의 것이지 참여사회연구소 전체의 공식적 입장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밝혀둔다)에 대해 손호철 교수가 반박문(☞관련기사 보기)을 발표했다. 마치 내가 그를 무슨 '꼴통좌파' 쯤으로 매도한 것으로 느꼈는지 조금은 격앙된 투다. 나로서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논의가 활성화되길 기대하긴 했지만, 어쨌든 내가 그 칼럼에서 결국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쳐다보았다는 그의 반박에 대해 나름대로 성실하게 응답을 하는 것이 도리이리라 믿는다.

우선, 내가 손 교수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다는 뜻부터 전해야겠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사회 진보(진영)의 보수성을 지적하고자 했던 내 칼럼이 손 교수 입장에서 보면 부당하게 느낄 요소를 가지고 있을 것 같기는 하기 때문이다. 비록 조심스럽게 표현하기는 했지만(나는 손 교수의 진보통합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점잖은 편"이라 했고 또 그 평가가 바탕에 깔고 있는 진보 개념이 박노자의 것과는 "서로 결이 조금 다르기는 하(다)"고도 했었다. 그리고 진보통합에 대한 비판과 거부가 "결국 복지국가 지향의 진보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최소한 그 가치를 의심한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조심스럽게 표현했을 때, 그것은 바로 그런 서로 다른 결을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내 칼럼은 손 교수가 반드시 사회주의만을 진보라고 여기지 않으며 복지국가 지향의 진보성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분명하게 표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론 악의는 없었다. 나로서는 지면의 제약을 의식해야만 했고 또 내가 중심적으로 제기하고 싶었던 문제가 따로 있었기에, 그러니까 손 교수 개인의 입장에 대한 자세한 비평이 그 자체로 중심 주제는 아니었기에 그리 되었다고 변명은 하고 싶다. 그렇지만 내 칼럼이 손 교수의 입장에 대해 부분적이나마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를 가지고 있었음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송구함의 뜻을 표명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그러나 나는, 손 교수가 추측하듯이, 내가 문제가 된 그의 인터뷰 내용을 단지 제목만 보고 오해해서 그 칼럼에서 손교수를 끌어들인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해두고 싶다. 나는 오히려 손 교수의 다른 칼럼들이나 평소의 지론을 최소한 어느 정도는 잘 알고 있었고 바로 그 배경 위에서 인터뷰 내용을 독해했기에 그랬다. 가령 그도 반박글에서 언급한 "진보가 그렇게 부러운가?"와 같은 칼럼이 정확히 바로 그런 배경의 일부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표명된 바와 같은 그의 진보 개념이 진보통합에 대한 그의 부정적 평가의 바탕에 깔려있다고(무슨 인과적 연관은 아니지만) 여겼기에 바로 그 점과 관련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그 글에서, 비록 그가 '해체주의적'이라고 부른 다른 진보 용법(가령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박근혜를 가장 진보적인 대통령 후보라고 보는 용법)의 의미도 인정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념의 내용을 기준으로 한 절대주의적인 용법"에 따라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이에 우호적이면 보수, 이에 비판적이면 진보"라고 보자면서 "최소한 사회민주주의 이상의 입장(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만을 진보라고 분명히 규정했더랬다. 여기서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당이나 노무현 정부는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에 속하지 결코 진보가 아니다.

▲ 통합 직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을 찾은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들. 왼쪽부터 심상정, 유시민, 이정희 대표. ⓒ연합뉴스

내가 볼 때 이는 참으로 문제가 많은, 그리고 매우 <보수적>인 진보 개념이다. 그는 오해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단순히 오래되어서가 아니다. 오래된 진리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오래되었다고 무조건 보수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 <시민정치시평> 칼럼에서 지적한 대로, 그가 말하는 그런 절대주의적인 진보 개념은 오늘날의 조건에서 더 이상 그 합리성을 주장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그 바탕에 깔린 역사철학적 전제를 단순히 타당하다고 전제할 수가 없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자본주의의 극복이나 비판이라는 진보의 정체성도 오늘날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 그 자체로는 전혀 불투명하다. 이런 진보 개념은, 단순히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처한 새롭고 변화된 상황과 조건에서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해결하는 데서 별다른 <실천적 합리성>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보수적이다(내가 그 칼럼에서 프래그마티즘 철학에서 유래했고 베블런이 보수주의를 설명하면서 동원한 '사유습성'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그에 따르면, "시장과 자본주의에 (…) 비판적이면 진보"다. 그러나 그렇게 보아야 할 무슨 합리적 근거가 있다는 말인가? 단지 지금껏 통상적으로(그것도 주로 서구에서) 또는 상식적으로 그렇게 쓰여 왔으므로?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그처럼 시장과 자본주의를 도매금으로 같이 취급해야 하는지도 의심스럽고(가령 시장과 자본주의가 서로 마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브로델 유의 논의를 생각해 보라), 그렇게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전혀 분명하지 않다. 사회민주주의가 시장을, 자본주의를 부정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진보라는 주장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예컨대 뉴딜 시기의 복지 정책은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비판적이었던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그가 '최소한의 진보' 범주에 기꺼이 집어넣은 사회민주주의의 산물은 아니지 않았던가?

사실 그는 그 문제의 인터뷰에서 민주당의 진보성에 대한 평가를 바꾼 것처럼 보인다. 왜 그랬을까? 물론 나로서는 그가 왜 민주당에 대한 평가를 바꾸었는지 그 근거는 자세히 읽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지금의 진보통합은 최악의 시나리오인 반면에 오히려 진보정당들과 민주당의 대통합이 더 낫다고 한 것에 대해 그 진정성을 보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일종의 반어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어쨌든 만약 그가 정말 그렇게 평가를 바꾸었다면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입장이 내 주장의 지향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마도 그는, 복지국가 지향의 진보성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을 보아서, 민주당이 최근 강령에 '보편적 복지'를 분명히 한 것이 그런 변화된 평가의 근거라고 답을 하기는 할 것 같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이 주장한 애초의 진보 개념과는 맞지 않는다. 민주당은 어떤 경우에도 그가 말하는 최소한이나마 진보적인 사회민주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이제 '체계적인(그러니까 박근혜 식의 선별적이거나 시혜주의적인 것이 아닌) 복지 국가에 대한 지향' 정도가 진보/보수를 가르는 최소한의 기준이라고 자신의 진보 개념을 수정해야만 일관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도 이제는 자신의 절대주의적 진보 개념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정확히 바로 이런 종류의 인식 변화를 촉구하고 싶었다.

이제 이런 문제가 제기된다. 미국에서 뉴딜을 이끌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나 영국에서 최초의 복지국가 체계를 설계했던 베버리지는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제 손교수도 그들의 자유주의를 그 자체로 진보적이 아니라고 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는 지금 '지역주의'라는 치명적인 보수성을 가진 우리나라의 민주당도 부족한 대로 진보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왜 유시민의 경우는 결코 진정으로 복지국가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 하면서 그 진보성을 의심하는 것일까? 유시민은 믿을 수 없어서? 그러나 그럼 민주당은? 보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민주당은 이번 한미FTA 건에서 보듯이 더 심하게 못 믿을 정치를 하지 않았는가? 그가 만약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절대주의적 진보 개념을 고집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자기모순일 것이다), 그는 적어도 합리적으로는 유시민과 그 지지자들의 자유주의 또한 진보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물론 나 역시 이번 진보통합에 대해 그 정략성을 의심하고 있고 유시민의 어리둥절한 행보에 대해서도 많이 비판적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특정한 진보 개념을 절대화해야 할 합리적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려했지 내가 소개한 바와 같은 자유주의적 진보 개념이 더 올바르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했던 것도 아니다. 더구나 한국의 자유주의는 그 진보성을 주장하려면 분명 더 깊은 반성과 더 근본적인 혁신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의 진보 진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진보 진영이 무슨 우월성의 근거가 있어 자유주의 진영에 대해서만 반성을 강요하면서 배제하려 하는지 알지 못한다. 결국 오십보백보 아닐까?

편한 결론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과거의 갈등과 앙금을 떨쳐 버리자. 그러나 단순히 감정만이 아니라 그 갈등과 앙금의 바탕에 깔려 있는 진보(또는 평등) 및 자유 개념이라는 토대의 실천적 합리성부터 새롭게 그리고 깊이 반성해 보자. 여기서 길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지금껏 우리 사회의 진보는 단지 덜 자유주의적이어서만이 아니라 제대로 진보적이지 못해서(그러려면 훨씬 더 자유의 가치에 대해 민감해 져야 할 것이다) 문제고, 자유주의는 단지 덜 진보적이어서만이 아니라 충분히 자유주의적이지 못해서(그러려면 훨씬 더 평등주의적이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자유냐 노동이냐' 하는 낡은 이념과 잣대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의 우리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들과 문제들을 정말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천적 합리성에 초점을 맞춘 건강한 논쟁을 해 보자. 나 역시 통합진보당의 정치 실험이 최선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니며 무슨 대성통곡할 노릇은 더 더욱 아니라고 본다. 노동의 진보와 자유의 진보 모두가 제대로 된 '민주적 실험주의'를 통해 더 새롭고 더 근본적인 혁신을 이루어 내서 우리 사회의 제대로 된 진보를 가능하게 해 주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결국 하나로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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