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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너무나 보수적인 우리의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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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너무나 보수적인 우리의 '진보'

[참여사회연구소 시민정치시평]<15> 진보통합에 대하여

1.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민주노동당, 진보통합연대, 국민참여당 3자의 진보(소)통합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이른바 '노동+자유'라는 정치 실험이 우리나라에서도 시작되는 모양이다. 물론 기대도 크지만 비판도 많다. 뜻밖에도 국민참여당 내부의 반발도 적지 않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진보신당 독자파를 포함한 많은 진보 진영 인사들의 실망감이 큰 것 같다. 이 진보통합이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손호철의 평가는 차라리 점잖은 편이다(☞ 관련 기사 보기 ). 박노자에게 이 일은 "대성통곡할 노릇"이기까지 하다(☞ 관련 기사 보기). 진보 정치를 추구한다는 인사들이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참된 진보정치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연대하려 한다는 것이다. 얼마간 예견된 상황과 반응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참으로 어리둥절하다.

물론 나 역시 그 통합이 그저 정치공학적 고려에만 치우쳤지 특별한 원칙적인 고민을 거쳐 나온 것은 아니라고 우려하고 비판을 가하는 것에는 얼마간 공감한다. 이번 통합에서 바로 이 부분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바로 원칙적 고민의 필요를 지적하는 데서 강조되는 그 원칙 자체는 문제가 없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민주노동당, 진보통합연대, 국민참여당 3자의 진보(소)통합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연합뉴스

일차적인 수준에서 보면 갈등의 전선은 유시민 대표 중심의 이른바 '친노' 국민참여당이 진정한 진보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데 있는 것 같다. 하기야 진보진영 입장에서는 참여정부 시절 그토록 '신자유주의적'이라고 공격하며 날을 세웠던 대상인 친노 진영을, 얼마간 반성 의지를 표명했다고, 자기 진영의 일원이라고 수용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일단 쑥스럽기부터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더 깊게 보면, 그 세 세력의 통합이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공통의 지반을 매개고리로 삼은 것을 볼 때, 그것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것은 결국 복지국가 지향의 진보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최소한 그 가치를 의심한다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새삼 '진보'나 '진보 정치'의 참된 본성이 무엇일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서로 조금 결이 다르긴 하지만, 손호철과 특히 박노자의 그런 평가가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결국 특정한 진보 개념일 텐데, 내게는 그것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너무도 낡고 '보수적으로' 보이기만 해서다. 아주 긴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문제제기 수준에서라도 몇 마디 해 두고 싶다.

2. 우리 사회에서 스스로를 진보 진영에 속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진보 개념은 사실 그 기원도 불투명하고 그 함의도 언제나 분명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내가 알기에 본디 진보 개념 자체는 '역사가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발전한다'고 보았던 서구 근대가 발전시킨 특정한 역사철학의 산물이다. 인류의 역사가 어떤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언제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기에 진보는 바로 그런 미래의 역사적 방향성을 따르고 앞장 서 실천하는 것이라는 거다. 아마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몇 몇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극복에 대한 지향이야말로 진보의 참된 정체성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과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식의 진보 개념을 타당하다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탈-형이상학의 시대에 그런 식의 역사철학은 이미 설 자리를 잃었고 따라서 또한 그것에 기초한 진보 개념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구소련과 동구권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 오늘날의 이른바 '포스트-사회주의 시대'에는 자본주의를 극복한 사회가 어떤 종류의 사회일지에 대해서 우리는 별다른 전망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만약 그들이 여전히 그와 같은 진보 개념을 고집하려 한다면, 그들은 오늘날의 조건에서 그 파산한 역사철학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지에 대해, 아니면 그런 역사철학의 전제가 없더라도 진보 개념을 자본주의의 극복에 대한 지향과 노동계급에게만 묶어두는 것이 어떻게 타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엄청난 정당화의 부담을 져야만 한다는 점은 분명할 것 같다. 안타깝게도, 과문해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아직 그에 대해 어떤 설득력 있는 논의도 보지 못했다.

물론 그런 진보 개념이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역설과 병리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그 자체로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보 개념을 그런 방식으로 독점하려 하거나, 심지어는 복지국가 지향조차도 결국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화에 기여할 것이기에 제대로 진보적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나로서는 그런 인식이 단지 어떤 나쁜, 그러니까 완고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식에만 고착되려 하는,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철저하게 보수적인 '사유 습성habit of thought'의 산물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사실 베블런(Th. Veblen) 같은 사람은 모든 인간이 쉽게 빠질 수 있는 바로 그런 사유 습성의 고착에서 보수주의의 한 기원을 찾았다.

그런데 다른 배경을 가진 진보 개념도 있다. 내가 알기에 그것은 바로 미국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특히 뉴딜 시기에 만개했던 이른바 '혁신주의 또는 진보주의 운동(progressive movement)'과 관련된 진보 개념이다. 비록 내가 이 주제에 대해 별다른 전문가는 아니지만, 우리의 논의 맥락에서 필요한 만큼만 살펴보자. 나는 특히 존 듀이의 진보적 자유주의에 주목한다.

이 진보 개념에는 특별한 역사철학적 전제는 없다. 그리고 이 진보주의는 사회주의적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의 재해석 또는 재정의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핵심적 지향은 특권층의 권력 제어와 민주주의 원칙의 확대를 위한 정치개혁 그리고 대기업 규제 및 복지 확대를 위한 경제개혁이었다. 그러니까 그 운동은 유럽에서라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과제들을 실현하려 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진보주의 운동이 그 핵심에서 바로 <자유주의의 혁신>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혁신은 변화된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과제를 이해하는 사유 습성의 진화적 적응에 기초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진보주의는 전통적 자유주의에서 강조되던 자연법적 소유권과 시장적-기업적 자유에 대한 옹호라는 초점을 버리고, 대기업에 의한 권력 독점과 심각한 빈부격차가 만연하던 새로운 시대적 조건에서, 사회적으로 그리고 물질적 전제와 함께 보장되고 실현되는 어떤 '실질적 자유'에 대한 지향으로 자유주의의 정체성을 재규정하려 했다. 이런 진보주의와 이것이 만들어낸 미국 사회의 변화를 참된 진보라고 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을까?

나는 이런 미국식 진보 개념이 우리 사회에 어떤 경로로 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쩌면 자유주의자라고 진보 진영에서 홀대를 당하는 국참당이나 민주당 계열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내세울 때 이런 미국적 맥락에 기대어 자기정당화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우리나라의 자유주의자들이 얼마나 제대로 자신들의 자유주의를 혁신하려 하고 있는지는 전혀 불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은 영원히 그 본질적인, 다시 말해 무슨 부르주아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해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하나도 없을 것이라 믿는다.

3. 물론 내가 여기서 이 미국적-자유주의적 진보 개념만이 올바르다거나 그것이 더 나은 진보 개념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오늘날 우리는 '모든 시민의 존엄의 평등'에 대한 도덕적 원칙의 역사적 실현에 대한 지향만을 진보 개념의 참된 합리적 토대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여기서 길게 논의하고 싶지는 않다. 나의 초점은 우리가 무슨 '리얼 진보'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자체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론적 기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삶의 현실이며,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바꾸어낼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회적 실천이다. 우리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하여 진보 정치를 새롭게 '구성'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무엇보다도 어떤 '민주적 실험주의'가 필요하다. 제대로 진보적일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낡은 사유 습성부터 버려야 한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은 현재의 실천을 안내할 수 있는 좋은 출발점은 될 수 있지만, 복잡하고 유동적인 현실은 언제나 그것들의 수단적 완전성을 거부하기 마련이다. 하나의 고정된 인식틀과 특정한 정책들의 폐쇄된 집합으로 진보정치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드는 일은, 사회의 진보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너무도 무용하고 무모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보수적이고 반실천적이며 반정치적이다. 사회의 의미 있는 진보를 만들어내는 것은 구체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사회적 지성의 안내에 따른 새로운 모색과 창조적 실험이지 낡은 이념적 잣대에 따른 편가르기가 아니다.

그래서 지금의 정치적 실험은 오히려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우리 앞에는 새로운 이해와 모색이 필요한 많은 문제들이 놓여 있다. 예컨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새롭게 자기정립하고 있는 '시민 정치'를 고답적인 노동/시민 이분법의 틀 안에서만 이해하려 한다거나 민주당은 절대로 변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하나의 반실천적 도그마일 뿐이다. 유럽의 복지국가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과 지금 우리 사회가 절실하게 사회보장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 데서 진전을 보아야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유럽 복지국가의 한계가 복지국가 그 자체의 한계는 아닌 것이다. 이른바 '안철수 현상'에 표현된 국민들, 특히 청년층의 기성 정치에 대한 혐오는 그것이 기존의 인식틀에 맞지 않는다고 간단히 무시할 사안이 아니다. 노동의 진보든 자유의 진보든 이런 문제들의 의미와 도전을 제대로 이해하고 포용해내지 못할 때, 그리하여 새로운 사유와 행위의 습관을 만들어내고 담대한 실천적 비전을 찾아내지 못할 때, 우리에게 돌아올 것은 결국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사회적 불의와 고통의 연장과 심화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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