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럽고 멀미가 날 지경이다. GM을 상대로 한국 정부가 보이는 태도가 말이다. 좌로 갔다, 우로 갔다, 중앙선 침범은 기본이고, 신호위반 유턴을 밥 먹듯이 하니 말이다. 어제 했던 말을 오늘 뒤집고, 오늘 한 말은 밤중에 또 달라질 전망이다.
산업은행 이동걸 회장의 '말 바꾸기'?
시간을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댄 암만 글로벌GM 사장이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4월 20일까지 이해당사자들의 합의가 없으면 파산보호(법정관리) 신청할 것”이라고 밝혔던 4월 13일, 그러니까 열흘 전으로 돌아가 보자.
당연히 모든 언론의 관심은 ‘이해당사자’ 즉 노동조합과 한국 정부의 반응이었다. 의외로 한국 정부 관계자의 입장이 가장 먼저 나왔다. 댄 암만 인터뷰가 웹에 게시된 지 5시간 만인 오전 11시, 산업은행 이동걸 회장이 기자 간담회를 가진 것이다.
그 다음 주인 4월 17일에는 이동걸 회장이 로이터통신과 단독 인터뷰를 진행한다. 마지막으로 GM이 데드라인으로 설정한 4월 20일 노사 교섭 타결이 이뤄지지 않자 밤중에 긴급하게 김동연 부총리 주재로 관계장관회의가 열리게 된다. 그 다음날 이동걸 회장은 열일을 제쳐놓고 한국GM 부평공장으로 달려오게 된다.
4월 13일부터 20일까지 1주일 사이, 이동걸 회장의 언론 노출은 크게 3번 있었다. 그때마다 입장의 변화가 얼마나 있었는지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특히 4월 20일 관계장관회의 전과 후에 엄청난 태도 변화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단협 개입 불가! 1주일 만에 교섭장까지 진출?
우선 노사 임단협 관련해서 1주일 전인 4월 13일만 해도 이동걸 회장은 노사 문제에 절대로 개입해선 안된다는 단호한 입장이었다. “대승적으로 노조가 만나자는 요청을 하면?”이라는 질문에 “대승이고 소승이고를 떠나서 내가 노조를 만날 자격이 없다”고까지 얘기한 바 있다.
그런데 4월 20일 관계장관회의 다음날 이동걸 회장은 아예 임단협 교섭자리에 노사와 함께 참석하겠다고 나섰다. 노조 측은 이동걸 회장의 교섭 참여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사측은 이미 이동걸 회장과 얘기를 마친 상태였다. 심지어 GM 사측은 교섭장에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의원, 산업은행 이동걸 회장의 명패까지 준비해 올려놓았다.
노조는 사전에 어떤 협의도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의 교섭 참여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조가 요청해도 만날 생각이 없다던 이동걸 회장은 노조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21일 찾아오겠다고 얘기했다. 노조가 만날 생각이 없다고 하자 그래도 찾아오겠다고 하더니 결국 홍영표 의원과 함께 GM 회사측만 면담했다.
GM 측을 만나 이동걸 회장이 쏟아낸 얘기가 아주 걸작이다. “임단협 타결이 정부·산업은행 지원의 기본 전제”라는 것이다. 이 말을 한 4월 21일 전까지 이동걸 회장은 물론이고 정부 관계자 그 누구도 20일 데드라인까지 노사 협상을 타결해 달라는 요청을 노조 측에 전달한 적이 없다. 그래놓고 협상 타결이 지원의 전제조건이라니?
법정관리 가면 소송도 불사한다던 그가…
게다가 그 시한 역시 GM이 정한 시한(4월 23일 오후 5시)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그 시간은 GM 이사회가 열리는 시간일 뿐인데 한국 정부가 왜 23일을 얘기한단 말인가? 게다가 불과 1주일 전에 이동걸 회장이 언론에 했던 얘기와 비교하면 다시 한 번 멀미가 날 지경이다.
"오늘 오전에 암만 사장이 20일을 얘기한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예단을 안 하겠습니다. 저도 One of Player이니까 섣불리 얘기할 건 아니고 지켜보겠습니다. 상황에 따라 대처할 수밖에 없는 거죠." (4월 13일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그러다가 4월 17일 <로이터통신>과 가진 단독 인터뷰 자리에서는 “GM이 (산업은행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법정관리를 신청할 경우 적절한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등 소송전도 불사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러나 정작 4월 20일이 다가오고 관계장관회의가 진행된 직후 이동걸 회장 입장이 180도 변했다. 4월 23일까지 노사 협상을 타결하라는 것. 뒤집어서 얘기하면 법정관리 신청할 경우 GM에게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노조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부실한 실사, 보고서도 비공개
4월 13일에 이동걸 회장은 “Transfer Price(이전가격)이 핵심 문제”라며 그에 대한 자료와 정보 제공이 충분치 않다고 얘기했다. 이 때문에 최종 보고서는 5월 초까지 늦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언론들은 4월 20일 데드라인을 일방적으로 선포한 댄 암만의 얘기에 항의하는 뜻이 담긴 것으로 풀이했다.
하지만 항의는 무슨, 4일 뒤인 17일 로이터 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는 “4월 20일 중간보고서가 만족스럽게 나온다면 27일까지 의미 있는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밝혔다. 산업은행이 GM에 자금 지원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처음 던진 것이다. 그것도 댄 암만이 데드라인을 선포한 <로이터통신>과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조차 부족했던 것일까? 4월 20일 관계장관회의가 끝난 다음날(21일), 삼일회계법인은 곧바로 중간보고서를 산업은행에 제출했다고 한다. 산업은행은 다음날인 22일 정부 고위관계자들에게 제출하게 된다. 정말 전광석화 같은 속도가 아닐 수 없다.
어제부터 <연합뉴스>가 보도하기 시작한 이 보고서는, 놀랍게도 비공개라고 한다. 그렇다면 <연합뉴스>는 어떻게 이 내용을 보도했을까? 연합만이 아니라 <중앙>, <조선>은 앞 다투어 단독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이들에겐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었던 것일까?
간단하다. 금융위, 산업은행 등 금융당국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사를 써줄 언론사들만 콕 집어서 일부 내용을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짓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행태와 하나도 다르지 않을까? 심지어 정부에게 간택받은 언론사들 역시 이명박·박근혜 때와 동일하다.
게다가 ‘중간보고서’라고 했음에도 사실상 ‘최종보고서’처럼 다뤄지고 있다. 도대체 이 보고서에 나온 내용을 검증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국민의 혈세가 사용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혈세 지출의 근거가 될 보고서가 비공개라니?
그동안 이동걸 회장도 인정하듯 ‘이전가격’ ‘과도한 연구개발비 지출’ ‘쉐보레 유럽·러시아 철수비용 떠넘기기’ ‘업무지원비용’ 등 GM의 회계장부는 숱한 의혹의 대상이었다. 그 쟁점들을 밝히겠다며 실사를 시작해놓고 결과는 공개할 수 없다? 게다가 ‘이해당사자’라 할 수 있는 노동조합은 접근조차 할 수 없다면? 무조건 정부와 GM을 믿으라는 말인가!
정부가 노조에게 “GM에 무릎 꿇어라”
요약해 보자면 한국 정부는 노조에게 무릎을 꿇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가 아니라 GM에 말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정부는 아마도 GM 노·사 협상이 끝나면 이를 바탕으로 GM과 정부 사이 교섭이 쉬워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완전한 오판이다.
GM은 올해 임단협에서 임금·성과급·단협 삭감 내지 후퇴를 요구하고 있다. 이거야 모든 국민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GM은 6차 교섭이 벌어지던 3월 21일, 돌연 ‘조건부 잠정합의’를 요구하고 나선다. 일단 상황이 너무 급박하니 자기들이 요구한 개악안 100%가 아니라 그 중 일부만이라도 빠르게 합의를 하되 ‘조건부’로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조건부’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래 GM이 3월 21일 이후로 일관되게 제시안에 포함시키고 있는 첫 번째 단락을 공개한다. 그중 붉은색 밑줄로 그은 부분, 그리고 그 아래 1)과 2) 항목을 눈여겨 보시기 바란다. (붉은 밑줄은 인용자의 것임)
△ 산업은행이 투자를 공식 확정하고 △ GM 본사가 신차 배정을 확정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이 합의는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GM은 노·사 합의서를 바탕으로 “산업은행이 투자하지 않으면 이 합의서는 무효가 된다”며 정부를 압박할 생각인 것이다. 정말 무효가 된다면? 또다시 법정관리를 가겠다고 할 것이다.
“산업은행이 일정액 투자한다고 하니 그 조건이야 충족되지 않겠어?” 만일 이렇게 생각한다면 GM을 정말 띄엄띄엄 본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이 그냥 달렸을까? 만일 산업은행의 투자 규모와 속도,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GM은 신차 배정을 미루거나 취소하는 되치기를 감행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합의서는 무효가 되며 법정관리로 간다.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합의서는 무효가 되겠지만, 일자리와 노동조건이 악화되는 건 기정사실이 된다. 최악의 경우 한국 정부는 GM에 퍼주고도 뒤통수를 맞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노조를 상대로 지금 합의를 종용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정부는 과연 제대로 알고나 있을까?
4월 19일,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앞서 이동걸 회장의 태도 변화를 잘 살펴보면, 결정적인 변수가 4월 20일 관계장관회의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원칙적인 대응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동걸 회장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시점은 관계장관회의였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선 GM과의 협상 창구를 담당하는 산자부 백운규 장관, 그리고 협상 컨트롤타워인 김동연 부총리(기재부장관)가 모두 미국으로 출장길에 나섰다. 각자 고유한 출장 목적이 있었지만 업계 내부에선 두 장관이 직접, 혹은 실무진들이 미국 출장 기간에 GM 본사를 접촉할 것이라 추측해 왔다.
4월 20일 오후 5~6시, 한국GM 노사가 숨가쁘게 교섭을 벌이던 시점은 워싱턴 시각으로 보자면 새벽 4~5시가 된다. 저녁 8시 30분, 관계장관회의가 열리던 시간에 김동연 부총리는 워싱턴 시각으로 오전 7시 30분부터 화상으로 회의를 주재했다. 부총리는 새벽 4시부터 7시 사이에 보고를 받은 후에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당일 회의 결론은 “협상시한이 23일 오후 5시로 미뤄졌고, 그때까지 노사 협상 타결이 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23일 오후 5시는 연기된 이사회가 아니라 이사회 의결에 따라 주주총회가 열릴 것으로 예정된 시간이었다. 그러나 김동연 부총리는 이미 이사회가 연기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23일로 이사회가 연기된다면 이사회 의결에 따라 주주총회가 열리는 시점은 그 뒤가 된다. 따라서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굳이 GM이 정한 23일 데드라인을 얘기할 필요가 없다. 2대 주주인 산업은행도 One of Player로 뛸 수 있는 주주총회 시점까지를 데드라인으로 설정해도 충분하다.
그런데 관계장관회의는 전광석화처럼 의사결정을 내렸다. 그 직후에 정부 입장과 태도가 그 전과 180도 달라지게 된다. 그 배경에 무엇이 있을까? 김동연 부총리 또는 보좌진들이 미국에 도착한 19일부터 GM과 모종의 미팅이 있었으리라는 추정은 그저 음모론에 불과할까?
차등감자와 유상증자 여부 등 협상은 오리무중
하지만 이제 머지않아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선 GM은 한국 정부의 이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크지 않아 보인다. 4월 13일 이동걸 회장은 만일 GM이 차등감자를 하지 않고 출자전환을 하게 되면 산업은행 지분율이 낮아져 비토권을 상실하게 되지 않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이렇게 답한 바 있다.
"협상해야 하는데 난항이 되겠죠. 저희는 차등감자를 요구하고, 저쪽(GM)은 차등감자에 난색을 표시하니까 넘어야 할 산 중에 하나입니다."
사실 차등감자는 한국 정부와 산업은행 입장에서 GM이 당연히 해줄 것이라 순진하게 믿었던 부분이다. 이를테면 구조조정 3대 원칙 중 첫 번째로 “대주주의 책임”을 얘기하자 배리 엥글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reasonable(합리적)”이라 답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엥글 사장의 얘기를 “차등감자에 동의하겠다”는 의사표시로 해석했던 것 같다.
하지만 GM은 어떤 자리에서도 구체적으로 ‘차등감자’ 얘기를 해본 적이 없다. 사실 GM은 어떤 자리에서도 ‘유상증자’ 얘기를 거론한 적도 없다. 그저 “주주 지분율 비례 자금 지원”이라는 말만 해왔을 뿐이다. 지분율에 비례해서 자금을 지원하자고 얘기하니 “아, 그럼 유상증자 하자는 말이군”이라고 한국 언론과 정부가 혼자서 짐작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GM은 이 대목에서 여지없이 뒤통수를 때리고 있다. 우리는 차등감자 얘기한 적이 없으니 그냥 출자전환 강행하겠다, 우리가 언제 유상증자를 한다고 했냐 그냥 대출로 자금 지원하겠다 … 이렇게 되면 산업은행은 비토권을 잃게 되고, 한국GM은 막대한 대출금에 대한 이자 부담을 또다시 떠안게 된다.
만일 GM이 차등감자 없이 27억 달러 차입금 출자전환을 강행하고 28억 달러 중 83%에 해당하는 23억 달러를 한국GM에 대출 형식으로 지원한다면? 이 경우 산업은행이 비토권 확보를 위한 지분율 15%를 유지하려면 현금 1조 원 이상을 투입해야 한다. 아울러 한국GM은 또다시 매년 1000억이 넘는 이자를 본사에 상납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쟁점으로 남게 되었다. 노조가 임단협에서 버텨준다면 오히려 정부는 이를 지렛대 삼아 GM과의 교섭에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다지만, 정부의 강요처럼 임단협이 타결되고 만다면 GM은 이제 합의서를 바탕으로 오히려 산업은행과 정부에 공격적 투자를 하라며 공세를 퍼부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정부가 자초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3일 오후 5시라는 데드라인을 설정한 GM과 한국 정부는, 넘지 말아야 할 선(레드라인)을 넘고 말았다. 누가 봐도 너무 무리한 일을 밀어붙였으니, 그 과정에서 순탄치 않은 일 처리가 한두 가지일까? 그리고 미래를 위해 무리한 의사결정의 증거들을 몰래 파묻어둔 사람들이 한두 명에 불과할까?
결국 국민 혈세를 투입해야 한다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주범이 누구인지 ‘국정조사’ 한 번 제대로 해보자. 국세청은 제대로 세무조사를 하고 말이다. 그리고 정부에 보고했다는 그놈의 실사보고서도 즉각 공개하라. 설마 그걸 무덤에 갈 때까지 숨길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그거야말로 이전 정권이 했던 ‘국정농단’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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