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라기에는 참으로 묘하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유시민 대표의 '구애'야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이정희 대표도 날이 갈수록 적극적으로 화답하고 있다. 참여당에 대한 진보세력의 공통된 입장은 "과거를 반성한다면"이다. 그런데 이정희 대표는 이조차 치워버렸다.
민주노동당 당권파가 '진보통합 합의문'을 반대한 까닭
이정희 대표와 유시민 대표의 '끈끈한 관계'는 최근 들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정희 대표가 유시민 대표와 네 차례 이상 단독으로 만나 통합 협상을 벌였다는 얘기는 알려진 사실이다. 진보정당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한미 FTA 등 민감한 문제를 포함해 두 대표가 합의에 이르렀다더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이정희 대표를 포함해 현재 민주노동당의 당권파라 할 수 있는 '경기동부' 측이 진보신당 보다는 참여당과의 통합에 더 관심이 많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정황 증거는 엉뚱한 곳에도 있다.
지난 1일 나온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연석회의' 합의문을 최종 조율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권력 승계 문제를 놓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대립했다. 표면적으로 더 많은 양보를 한 것은 진보신당이었다. '3대 세습'이라는 문구도 들어가지 않았고, "비판하는 의견도 존중한다"는 모호한 문장으로 정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이 안을 받아들인 것은 진보신당이었다. 이유는 "우리 생각에 못 미친다고 통합 논의를 깰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반면 민주노동당은 치열한 내부 논쟁을 벌였다. 반대 의견이 거셌다. 반대의 핵심 주체는 이른바 당권파였다. 민주노동당은 결국 사실상의 '표결' 절차를 밟아 결론을 정했다. 이 의사 표시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내 또 다른 그룹인 '인천연합'과 '울산연합'이 찬성 의견을 냈다. 3분의 2의 찬성으로 민주노동당은 합의안에 도장을 찍었다.
당권파가 내부 투쟁에서 진 것이다. 그리고 불과 일주일이 채 못 돼 이정희 대표는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우리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위한 열망과 가치를 공유한다면 폭넓고 과감하게 손잡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프레시안(최형락) |
조승수 "참여당이 진보정당에 참여? 쉽지 않다"…민주노총도 '시큰둥'
참여당보다 물리적으로 더 가까이 있는 통합의 주체들이 강하게 반대하고 있음에도 굴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반대 주체는 민주노총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참여당이 참여하기 위해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그들이 했던 일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진심어린 반성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무원칙한 통합은 안 된다"고 말했다.
진보신당도 난색을 표하고 있다.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8일 불교방송 <전경윤의 아침저널>에 출연해 "이번 합의문의 대외적 의미는 진보정치가 자유주의 개혁 세력과 달리 독자적으로 성장, 발전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말했다. 조 대표는 "그런 면에서 민주당은 물론이고 참여당이 이 진보정당에 참여하겠다는 건 사실 쉽지 않은 문제"라고 덧붙였다.
유시민 대표는 자신들의 꿈이 '대중적 진보정당'이라고 했지만, 참여당을 '진보정당'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진보진영의 분위기다. 유 대표와 참여당을 유일하게 "새로운 진보정치 실현의 길을 함께 열어나갈 수 있는" 세력으로 보는 이정희 대표를 놓고 '원칙의 실종'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단체의 한 관계자는 "이 대표가 진보정당의 방향, 원칙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권영길·강기갑·노회찬·심상정 노래 부르는 자리에 이정희는 없었다
이 대표의 참여당에 대한 러브콜은 당내에서조차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반대 인사는 권영길, 강기갑 의원이다.
권영길 의원은 지난 3월 전직 민주노총 위원장들과 함께 낸 성명서에서 "과거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행하거나 이를 추종했던 개인이나 세력이 공개적인 반성도 없이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참여하겠다고 해 선뜻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분명히 했다.
권영길, 강기갑, 노회찬, 심상정 등은 지난 3일 공식 출범한 '진보의 합창' 회원이기도 하다. 진보의 합창은 각계 각층의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해 진보정치 세력의 통합을 추진하는 운동이다. '100만 민란'의 진보버전인 셈이다. 이들 4명의 진보 정치인들은 출범식 무대 위에 손을 잡고 올라 함께 노사연의 <만남>을 불렀다.
그러나 이 자리에 이정희 대표는 참석하지 않았다. 조승수 대표가 얼굴을 내민 것과도 대비된다. 한 참석자는 "이정희 대표 뿐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현재 당권파 인사들도 대부분 참석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정희 대표의 행보가 민주노동당 전체의 동의 아래 이뤄지는 것이 아님은 지난 4일 있었던 민주노동당의 중앙위원회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연석회의 합의문을 대의원대회에 올리지 말자는 당권파의 제안은 참석자 146명 가운데 94명의 찬성으로 반려됐다. 연석회의 틀을 깨고 참여당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틀을 만들고 싶어하는 세력이 소수임을 보여준다.
이정희가 유시민에 미련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당 내부에서도, 당 밖에서도 힘을 얻지 못함에도 이정희 대표는 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정치적 목적이 다르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얻고자 하는 것이 다르다 보니 계산도 다르다는 얘기다.
진보신당과의 '선통합'을 우선시하는 이들은 총선에 방점을 두고 있다. 통합만 이뤄낸다면 새 진보정당이 민주당과의 선거연대를 통해 "2004년의 10석"을 뛰어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진보의 합창'을 비롯해 민주노동당 내의 '울산연합', '인천연합' 등 '선통합'을 추진하고 있는 세력은 총선에서의 대약진을 통해 진보정당의 새 활로를 찾겠다는 로드맵을 그리고 있다.
이와 반대로, 민주노동당의 당권파는 대선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이 2012년 연립정부를 꿈 꾸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민주당에게 대선 후보를 양보하고, 대신 내각의 일부 등 일정한 지분을 받아내겠다는 구상이다. 비단 장관 몇 자리만이 아니라 곳곳의 숨겨진 '자리'를 위해 인재를 키우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연립정부를 위해서는 총선 승리보다 대선 전략이 더 중요하다. 총선에서 크게 성공하면 할수록 '대선 완주' 목소리도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연립정부'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몸집이 커질수록 연대 협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많아진다. 그러려면 다 아우르는 '대통합'이 유리하다. 그래야 민주당과 1:1 협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시민 대표와 같은 대표적인 야권의 '대선 주자'가 그 정당에 있다면 금상첨화다.
이정희 대표와 유시민 대표의 이해관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런 구상은 현재의 연석회의 틀이 깨져야만 현실화의 희망이 보인다.
얄궂게도 이정희 대표가 자꾸 '참여당'을 거론할수록 가뜩이나 합의안에 불만이 많은 진보신당의 내부는 더 시끄러워진다. 진보신당 관계자들이 "왜 하필 지금 계속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다. 진보정당 통합에 또 하나의 고비가 될 진보신당의 전국위원회는 오는 11일 열린다.
"겉으로는 정치적 명분을 내세우고 뒤에서는 지분 협상하지 않겠다"면…
비록 계산은 다르지만, 양 측 모두 정치공학의 셈법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씁쓸한 현실이다. 지난 3월 21일 나온 민주노총의 전직 위원장 5명의 성명서 한 구절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기도 하다.
본격적인 통합 논의를 막 시작하던 당시, 권영길, 단병호, 이수호, 조준호, 임성규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이 성명에서 "정치에서 선거일정은 매우 중요하지만 일정과 양적 통합에만 치우치고 내용을 도외시하거나 등한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내용이란 다름 아닌 진보의 '가치'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가치 중심의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강조하는 것은 지난날 분당으로 인해 국민과 노동자 대중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주었던 뼈아픈 오류가 다시 반복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정희 대표는 전날 국회 연설에서 "겉으로는 화려한 정치적 명분을 내세우면서 뒤에서는 지분 협상으로 공직과 당직을 나눠 가졌던 기성 정당 이합집산의 조그마한 잔재도 통합진보정당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이 대표 스스로 자신의 말을 곰곰히 되새겨봐야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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