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부지런한 사람은 감을 따기 위해 장대를 만든다. 그동안 한국 정부의 '비핵개방 3000' 구상이 국내외적으로 비판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들은 감을 따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한국은 이제나저제나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려 왔다. 그러나 감이 입속으로 떨어질 확률은 낮다.
▲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1일 미국 뉴욕에서 미국외교협회·코리아소사이어티·아시아소사이어티가 공동 주최한 오찬에서 연설을 맡아 북핵 문제에 대해 '그랜드 바겐'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청와대 |
그랜드 바겐의 핵심은 '원샷 딜'
그랜드 바겐을 둘러싼 소동이 있었다. 진정국면이다. 어설픈 외교적 봉합의 수순도 뒤따른다. 그러나 여전히 폭탄은 남아 있다. 한국 정부 안에서도 생각의 벽들이 확인되고 있다. 국제사회도 한국의 '돌출행동'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을 것이다. 재발 방지 대책이 진정으로 필요하다.
수습이 어설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외교부 당국자의 말처럼, "포괄적 패키지의 포장지만 바꾼 것"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면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여럿이 공동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느닷없이 그중 한 명이 상의도 하지 않고, 자신이 정한 제목을 광고한다면 당연히 욕먹는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제목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어보기 위한 '오버액션'이야, 과거에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던 일이다. 그랜드 바겐이 사실은 포괄적 패키지와 비슷한 내용이라고 처음부터 강조했다면, '경망스러운 행동'에 눈총 한번으로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고위당국자들의 불쾌감, 미국언론의 경멸적 비판, 그리고 중국에서 들려오는 경계심은 '그랜드 바겐'이라는 제목 때문이 아니다. 은근슬쩍 수습국면에서 사라져 버린 단어, 바로 '원샷 딜'이 모든 사태의 핵심이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이 '한국 대통령의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표현한 실체도 바로 이것이다.
한국의 '한방 선언' 무엇이 문제인가? 김대식 민주평통 사무처장이 9월 21일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주최 토론회의 기조 강연에서 했던 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미국은 성과주의에 급급해 원칙을 포기한 사례가 있다"고 비판했다. '2·13합의' 조차도 '비핵화 조치의 퇴보'라고 비판했다. 정부 측 인사들은 "우리는 한 방에 해결하겠습니다"라는 뭐 그런 생각이다. 말은 그럴 듯하다. 북핵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미국 측 인사들은 왜 이런 생각에 '뜨악한 반응'을 보였을까?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쉽게 설명해 보자. 비핵화 협상을 축구로 비유해 보자. 북한을 상대로 5개국이 작전회의를 하고 있다. 전체적인 경기의 흐름을 조율하고, 각자 맡아야 할 임무를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 선수가 "나는 이 경기 이기면 100만 원 낼게"라고 말하고는 관중석으로 가 버렸다.
그것이 '비핵개방 3000' 구상이다. 남들은 어떻게 경기에서 이길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한국은 경기에서 이기면 돈 내겠다는 입장이다. 다른 국가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유는 또 있다. 이기면 내겠다고 한 돈이 사실 한국 자체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아니고, 선수로 뛴 국가들에게 거둬서 내겠다는 것이다. 누가 좋아하겠는가?
한국의 한방선언은 또 무엇인가? 이제 경기가 막 시작되려고 하는데, 경기장에 있으나마나했던 일본 선수도 교체되었는데, 갑자기 관중석에 있던 한국 선수가 내려와 하는 말, "그냥 가위바위보 한판으로 끝내지." 경악하지 않겠는가?
한방선언을 국제사회가 비판하는 세 가지 이유
한방선언의 문제점을 전문적으로 살펴보자. 첫째는 기존합의와의 관계다. 정부 측 사람들처럼 기존합의를 북한과의 당당하지 못한 거래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우리 정부의 고위당국자가 말했듯이 "2~3년을 협상하더라도 제대론 된 합의를 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면, 국제사회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그토록 강조하는 6자회담이란 것도 기존합의다. 9·19 공동성명이라는 6자회담의 헌법이 있고, 2·13 합의라는 초기이행조치, 2007년 10·3 합의 등의 단계별 합의가 있다. 이런 거 다 무시하고, 새로운 합의를 해야 한다면 북핵 협상은 끝 모를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기존합의를 부정하면서, 6자회담을 강조하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과거와의 이별, 그것은 근본주의다. 6·15와 10·4 선언을 부정하듯이 9·19 공동성명을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국내정치적인 발상이고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다.
수습국면에서 우리 정부 당국자들이 "기존합의를 존중한다"라는 말을 다시 시작한 것은 당연하고 다행스럽다. 그러나 정부 안에는 그 누구의 동의를 얻기 어려운, 근본적 합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분명 있다. 우리 정부 내부의 토론이 필요하다. 정부안에서 최소한의 공감을 형성하는 것이 첫 순서다.
둘째는 제재의 시한과 효과다. 한방선언에는 제재에 대한 집착이 전제되어 있다. 강력한 제재를 해서 북한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는가? 미국은 제재를 협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제재와 협상은 양립하기 어렵다. 지금은 제재를 계속하면서 대화를 하겠다는 생각이지만, 협상이 시작되면 제재는 완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생각은 다르다. 한방이 될 때까지 밀어붙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결정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다. 바로 현재의 상황이 북핵 동결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박길연 북한 외무성 부상이 말했듯이 미국이 제재에 기반을 둔 대화를 하겠다면 북한도 "핵 억제력 강화에 기반을 둔 대화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한방선언은 작은 협상에 연연해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면 날로 강화될 북한의 핵능력은 어떻게 되는가? 협상이 늦어질수록 북한의 핵능력은 강화된다. 지금 생각하는 한방의 효과는 근본적인 한방 협상이 이루어질 2년 후, 3년 후에도 유지될까?
앞으로 북핵 협상에서 확인되겠지만, 아니 협상을 해보면 알게 되겠지만 우선적으로 북한의 핵 능력이 확대되는 것을 당장 멈추는 것이 중요하다. 오바마 행정부가 이미 시사했지만 그것을 하는 데에도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한방 선언은 그런 것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긴다. 한국의 그런 입장을 미국이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비핵화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동안 한국의 비핵개방 3000은 지속적으로 달라져 왔다. 선핵 폐기론이라는 국내외적인 비판에 대한 대응이다. 물론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이라는 조건부가 조금씩 축소되거나 완화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논리적 핵심은 여전하다. 많은 전문가가 한국의 북핵 해법을 '선핵 폐기론'이라고 비판하는 근거는 조건절이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이라는 내용이기 때문이 아니다. 비판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제의 핵심은 북한의 핵 폐기와 상응 조치의 관계다. 두 가지를 선후의 문제로 보느냐, 아니면 병행 해결이냐, 그것이 근본적 차이다. 이번에 그랜드 바겐을 설명할 때, "북한이 핵심 부분을 폐기하면, 동시에 안전보장과 국제지원을 제공한다"라고 했다. 동시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만, 기본논리는 여전히 선후로 보고 있다.
병행해결이라는 뜻은 북한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먼저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음을 내포한다. 북한의 행동을 확인해야 무엇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은 수동적이다. 기다리는 것이다. 이에 달리 병행해결은 능동적이다. 협상수단을 적극적으로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수동적인 선핵 폐기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법이다.
한방선언은 왜 불가능한가?
단계적 접근법에 대한 오해 역시 극복해야 한다. 미국을 포함해서 누구나 비핵화라는 최종목표에 이르는 과정이 늘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북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에너지 경제지원 같은 것들이 한국말대로 한방에 이루어질 수 있다면, 북한도 한방에 핵을 폐기할 것이다.
"자 지금 당장 평화협정을 맺고, 군대를 줄이고, 공격형 무기를 일정수준으로 감축하고 등등"을 한 방에 할 수 있으면 북한도 한 방에 플루토늄과 핵무기를 제3국으로 이전할 수 있다. 미국이나 일본의 여론이 한 방에 변해서 하루아침에 관계 정상화를 이룰 수 있다면 북한의 핵도 한 방에 해결된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뇌 구조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잘 몰라서 그런 어이없는 주장을 한다면 다행이다. 배우면 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진지함의 결여다. 북핵 문제를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북핵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면, 그런 소리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한방 선언을 둘러싼 외교적 참사가 봉합된다고 하더라도 진지함의 결여 현상이 계속된다면 국제적 망신은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 7월 미·중 전략대화가 있었고, 중국측 대표였던 다이빙궈 외교담당 국무위원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고, 이제 10월 초에는 원자바오 총리도 방북할 계획이다. 일본 민주당의 새로운 동북아 외교가 어떻게 어울릴지도 봐야 한다. 동북아 정세는 급변하고 있는데 한국은 언제쯤 선수로 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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