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제안한 북핵 '그랜드 바겐'에 대해 미국이 냉랭한 반응을 보인 것은 그간 어렴풋이 드러났던 한미간의 견해차가 이제는 수면 위로 부상할 정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KBS> '뉴스 9'를 제외한 거의 모든 언론이 이 문제를 다루는 등 논란이 확산되자 김성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이 해명에 나섰지만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이 대통령의 '그랜드 바겐'에 대해 22일 "그건 그의 정책이고 그의 연설"이라고 논평해 파장을 불러 일으켰던 이언 켈리 미 국무부 대변인은 하루가 지난 뒤에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23일 정례브리핑에서 "미국의 포괄적 상응조치가 이명박 대통령의 그랜드 바겐과 같은 것이냐"는 한국 기자의 질문에 "5자 사이에는 진전을 위한 매우 폭넓고 깊은 의견일치가 형성돼 있다"고만 답했다. '두 접근법은 같다'란 말을 끝내 하지 않은 채 원론적인 답변으로 피해 간 것이다.
"외교부 해명, 국민 우롱이거나 외교 결례"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배경에 대한 외교통상부의 해명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외교부 당국자는 23일 기자들과 만나 "위성락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지난 17일 주한 미 대사관 대사 대리에게 '그랜드 바겐'의 개념과 취지를 설명했다"며 "당시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일본 출장중이어서 보고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단순히 보고 체계의 문제로 빚어진 해프닝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믿을 사람을 별로 없어 보인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그 정도로 중요한 사안은 실시간으로 보고하게 되어 있고 통신 환경도 충분히 가능하다"라며 "국민들을 우롱하는 것이거나, 주한 대리 대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외교 결례"라고 말했다.
캠벨 차관보가 21일(현지시간) 한미 외교장관회담에 대해 브리핑하면서 "회담에서는 그랜드 바겐 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았고, 솔직히 내용을 잘 모른다"고 말한데 대한 외교부의 해명도 이해하기 힘들다.
외교부 당국자는 "외교장관회담은 당일 오전 11시에 있었고 대통령 연설은 그 이후였다"고 말했다. 시차가 있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이해하기 어렵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이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1시간 뒤 공개될 대통령의 중요한 구상을 설명하지 않은 셈이기 때문이다. 주한 대리 대사에게 17일 이미 전달했던 내용이 뒤늦게 '보안 사항'이라도 된 것인가?
더욱이 캠벨 차관보의 브리핑은 이 대통령의 발언이 나오고 1시간 뒤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랜드 바겐의 내용을 잘 모른다고 잡아뗐다. 이것도 보고 체계나 시차 때문인가?
청와대 관계자 '주석'이 화 키워
이렇게 볼 때 이번 파문의 이유는 다른 곳에 있고, 캠벨 차관보와 켈리 대변인의 반응은 한국 정부가 내놓은 북핵 해법에 대한 거부의 의미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우선 <뉴욕타임스>가 지적했듯 '그랜드 바겐' 혹은 '원 샷 딜'의 비현실성에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21일 그랜드 바겐을 처음 언급하면서 "이제 6자회담을 통해 북핵 프로그램의 핵심 부분을 폐기하면서 동시에 북한에게 확실한 안전보장을 제공하고 국제지원을 본격화하는 일괄 타결, 즉 그랜드 바겐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만 보면 제안의 현실성을 따지기가 약간 모호하다. 어떻게 보면 북한 문제의 모든 요소를 한꺼번에 놓고 얘기하자는 '포괄적 접근'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북핵 해결의 최종 목표(이른바 '출구론')를 선언적으로 말한 것으로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제안이 공개된 직후 브리핑에서 청와대 관계자가 설명한 내용을 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확연해진다.
이 관계자는 "그동안 북핵 협상을 보면 단계별로 협상을 하면서 이행 직전에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타협과 파행, 진전과 지연을 반복해 온 허점이 있었다"며 "이제는 관련국 간 협의를 통해 북한의 불가역적 핵폐기를 확실히 하는 협상을 진행하고, 그 직후 바로 이행에 들어가 북핵 폐기와 대북지원을 동시에 가져가는 이른바 '원 샷 딜'을 추진해 가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2005년 9.19 공동성명과 그 실행계획서인 2007년 2.13 합의, 10.3 합의에서처럼 '폐쇄-불능화-폐기'로 단계를 나누지 말고 한 방에 끝내자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과 미국 사이에 지독한 불신이 있다는 사실로 미뤄 볼 때 이건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9.19 공동성명에 명시된 출구를 향해 가되 이행에 있어서는 단계적으로, 그리고 '행동 대 행동'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이유를 무시하는 것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북미간의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한 번에 해버리자고 하는 것은 핵 폐기를 해야 상응조치를 주겠다는 소위 선(先)핵폐기론으로 귀결된다"며 "오바마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재검토하면서 선핵폐기론의 문제점을 인식했기 때문에 이 대통령의 출구론적 접근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캠벨 차관보는 그랜드 바겐에 대해 "북한이 강조했던 2005년과 2007년의 모든 합의들에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헌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9.19 공동성명과 2.13 및 10.3 합의를 강조한 것으로 '한 방에 끝낸다'는 이 대통령의 구상과는 매우 다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신의 뿌리는?
이처럼 오바마 행정부가 한국의 제안을 '표 나게' 거부하게 된 밑바닥에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과 북한에 대한 정보 판단에 대한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8월 평양 방문을 통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과 북한 체제의 현황 등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런데 이는 이명박 정부가 그간 미국에 말해온 것과 상당히 달랐고, 그에 따라 미국에서는 '한국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싹트게 됐다는 것이다.
그에 더해 이명박 대통령과 유명환 외교부 장관 등이 지난 주 대북 강경 발언을 쏟아내며 북미 양자대화 움직임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것도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미국의 마음이 멀어지게 된 원인이라고 전문가들은 꼽고 있다.
이에 오바마 행정부는 한국 정부에 대한 설득과 협의를 사실상 접고 이제 대북 접근에만 속도를 낼 것이라는 게 최근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시민사회 인사들의 전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들은 여전히 현실과는 동떨어진 진단과 처방을 내놓고 있다.
일례로 <조선일보>는 24일자 사설에서 "미국측이 이 대통령의 제안에 다소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미국이 대북 제재와 대화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대통령이 '그랜드 바겐' 주장을 펴면서 대북 제재가 무대 위에서 사라진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못마땅해서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부 보수 언론은 미국의 냉랭한 반응에 대해, '한국이 남북관계에 속도를 낼 것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 때문'이라고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에 대해 한 전문가는 "이 대통령은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를 만나서도 '북한이 근본적으로 핵을 포기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라며 "보수적인 여론이 대통령의 눈을 가린다면 이런 식의 발언은 계속 나오고 미국과는 더욱 멀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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