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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죽지도 않은 자식을 가슴에 묻었다"

[심층 취재- 한국 해외입양 65년] 2.입양의 정치경제학 ⑨ 입양과 미혼모

※이 기사는 이경은 고려대학교 인권센터 연구교수, 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대표의 도움으로 취재, 작성되었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그런데 죽지도 않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엄마가 입양 보낸 엄마다."

미혼모 당사자 단체 '인트리(人-tree)' 최형숙 대표는 입양의 문제는 곧 미혼모의 문제임을 지적한다. 2016년 국외 입양아의 98%가 미혼모의 자녀였다. 국내 입양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혼모의 자녀가 88%, 한부모·조손가정 자녀가 8%, 빈곤 가정 자녀가 3%였다.(보건복지부 통계)

"제가 35살에 아이를 낳았다. 직장 생활도 오래 해서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여유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를 낳기 전에 입양 보낼 생각을 했다. 가족들도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 우리 사회가 미혼모는 아이를 키울 수 없게, 입양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최 대표는 지난 2005년 출산을 앞두고 미혼모쉼터에 들어가 다른 여성들과 함께 지냈다. 미혼모쉼터에서 출산을 앞둔 여성들이 끊임없이 접하는 메시지는 '입양을 보내라'는 것이다. 그 쉼터에서 최 대표가 상담사에게 입양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하자마자 세 입양기관에서 방문해 상담을 했다. 상담은 곧 태어날 아이의 입양을 승인하는 예비 동의서에 서명하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최 대표는 아이를 낳은 다음 날 입양기관에 전화해 아이를 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입양기관 직원은 너무 늦었다며 이제 와서 서류를 고칠 수 없다고 그녀의 요구를 거절했다. 최 대표가 강경하게 대응하자 입양기관은 담당 직원이 휴가를 간 상태이며 나흘 뒤 다시 연락을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1주일 만에 다시 아들을 품에 안았다. 최 대표는 지금도 그때 기억에 아이 생일이 일 년 중 가장 가슴이 아픈 날이라고 한다.

"그 쉼터에서 저랑 같이 지내다가 아이를 해외입양 보낸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한 여름 비 오는 날 아이를 낳았는데, 여름에 비가 오면 연락이 온다. 그 친구는 지금도 아이 생일 때마다 옷을 사다 놓는다고 한다. 전화로는 자주 연락하고 지내지만 딱 한번 직접 만났다. 내 아들을 보면 자기 아들이 생각날 것 같아서 못 보겠다는 것이다. 지금도 '언젠가 오겠지, 어른이 되면 찾아오겠지, 그 아이를 위해서 잘 살아야지' 그런 얘기를 한다. 내가 딱히 그 친구한테 미안할 이유가 없는데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미안하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미혼모들이 아이를 입양 보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까. 그렇지 못한 엄마들이 더 많다. 몸이 기억하고 가슴에 남아 있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면죄부가 주어지는데 정말 그 엄마들은 아무 말도 못하겠구나 싶다."

한국에서 미혼모로 살아가는 것은 일생이 고난이다. 임신을 하는 순간 그는 '가족의 수치'로 취급되며, 상당수가 의절을 당한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직장이 있더라도 미혼모가 되면 그만두는 비율'이 96%나 되는 등 경제적 어려움도 불가피하다. (2010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조사) 자신뿐 아니라 자녀도 차별과 편견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고 견뎌야 한다. 미혼모는 동성애자 다음으로 큰 차별을 경험한 집단으로 조사됐다.(2009년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공동 조사)

"나 혼자 편하게 잘 살고 싶어서 입양을 선택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가 미혼모들은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만든다. 내가 입양을 생각한 것도 나보다 더 잘 키워줄 사람을 찾아주려는 마음이었다. 입양을 선택한 엄마들은 그렇게 아이를 보내고 나면 한동안 미칠 것 같다. 태어남과 동시에 어떤 이들은 이별과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 이런 아픔은 안 겪었으면 좋겠다. 어찌 보면 입양을 선택한 엄마들이 더 대단한 엄마들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들의 겪는 일들은 철저하게 은폐된다."

전쟁 고아? 1961년까지 혼혈아동만 해외입양...이들 4명 중 3명이 엄마와 살았다

▲ 혼혈아동들을 돌보고 있는 해리 홀트 ⓒ홀트아동복지회

"한 불쌍한 생모는 사무실에서 발작을 일으켰다오. 아이 엄마는 아이가 미국으로 간 뒤에도 만날 수 있을 것을 기대했으나 인연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는 말에 절망했다오. 참으로 불쌍한 여인이지요. 아기는 아직 젖도 못 뗀 상태인데 그 어린 것을 단념해야 한다는 생각에 울고 또 울었소."

홀트아동복지회를 만든 해리 홀트가 부인인 버다 홀트에게 쓴 편지 중의 한 대목이다. (<홀트아동복지회 50년사>,홀트아동복지회 펴냄, 2005)

한국의 해외입양은 한국전쟁 직후 전쟁 '고아'를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실상은 미국 등 외국군인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동을 국외로 내보내는 방법으로 활용됐다.

1955년 가정을 잃은 아동을 돌보기 위한 영육아원 등 보호시설은 434개로 4만6000여 명의 아동을 수용했다. 1961년에는 보호시설에 수용된 아동이 5만5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정작 이들 중 해외입양된 아동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1955년부터 1961년까지 국제 입양된 아동 4185명이다. (당시 교회, 고아원 등을 통한 개별적인 국제입양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다. 또 시간이 오래 지났고 당시 기록이 문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아래 기술되는 내용은 보건복지부 통계에 기반한 내용임을 밝힌다. 필자 주). 보건사회부 조사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61년까지 전국의 혼혈아동은 5485명인데, 이들 중 4185명이 해외 입양됐다. 따라서 공식 통계로만 보자면, 1961년까지 입양된 아동 전원이 혼혈아동이며, 혼혈아동 4명 중 3명이 6년 만에 국외로 내보내졌다. 그런데 이들 중 절대 다수는 전통적 의미의 '고아'가 아니다. 5485명 중 4089명이 일반 가정, 즉 어머니가 양육 중이었다. 나머지 1396명 중 영육아원에 1067명, 모자원에 165명, 기타기관에 164명의 아동이 수용 중이었다. 따라서 사회복지시설에 수용 중이던 아동 전원이 해외 입양됐다고 가정하더라도 2789명이나 되는 어머니와 자녀가 생이별을 했다는 얘기다.


위의 표를 보면 1961년까지 국제입양된 아동 4185명으로 전원이 혼혈아동이었고, 따라서 당시 영.육아원에 있던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 '전쟁고아'는 한 명도 (입양기관을 통해서는) 해외입양 되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혼혈아동을 태어난 가정에서 떼어내 해외로 내보내는 사업은 '일국일민(一國一民)주의'를 내세운 이승만 정부의 정책으로 추진됐다. 1955년 종교적인 차원에서 한국 아동 8명을 직접 입양한 해리 홀트는 1956년 홀트씨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국제입양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 써준 추천장을 들고 전국을 다니며 가정 내에 있던 혼혈아동을 모아서 미국으로 입양 보냈다. 이승만 정부는 1954년 보건사회부 산하에 입양을 전담하는 기관인 대한양호회를 설립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해리 홀트를 직접 만나 입양 사업에 대해 논의할 정도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또 언론을 통해 혼혈아동을 '아버지의 나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입양 홍보 광고와 기사를 내기도 했다.

"(1956년 어머니와 떨어져 홀트에 맡겨진) 그 아이의 울음소리는 이십대 중반이었던 내 가슴에 너무 큰 충격으로 와 닿았습니다. 오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생생합니다. 입양 가는 비행기 안에서 들을 수 있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그렇습니다. 부모와 영원히 헤어질 때 우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평소 배가 고프거나 아파서 우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확연히 다릅니다. 그 아이가 인도 아이든, 한국 아이든 태국 아이든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 그렇습니다."(<홀트아동복지회 50년사> 중에서)

'고아'가 아니라 '어떤 어머니의 아이'가 입양됐다

당시 혼혈아동은 한국 여성과 외국 남성 사이의 부적절한 성행위의 부산물로 여겨졌고, 이 아동과 어머니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여성들이 갖고 있는 '혹시나 아이 아버지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모성애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혼혈아동 4명 중 3명이 아동보호시설이 아닌 일반 가정에 있었다. 이는 혼혈아동의 일반 가정 양육이 자연스럽게 여겨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혼혈아동을 낳은 여성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당시 아이를 키우기 힘들 정도의 빈곤은 대다수 국민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전쟁 이후 제도화된 국제입양은 그 시작부터 부모가 없는 '고아'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해외입양을 가장 많이 보낸 시기가 전쟁 후 '고아'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1950-60년대가 아니라 경제성장을 이룩한 국가만이 개최할 수 있는 아시안게임, 올림픽을 치룬 1980년대 중후반이라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산업화된 국제입양에서 입양 규모를 결정짓는 것은 입양을 원하는 부모들의 수요다. 이에 따라 송출국 아동의 공급이 결정된다. 국제입양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어떤 어머니'의 자녀들이 대상이 됐다. 1950-60년대엔 외국군 부대 주변 유흥업소에서 일하던 기지촌 여성들, 1970-80년대엔 산업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상경한 젊은 여공들, 1990년대 이후엔 가난, 가정폭력, 의붓가족의 성적 학대 등으로 인한 가정파탄에서 도망쳐 나온 10대 소녀들을 포함한 미혼모들이 입양 보낸 어머니의 다수를 이룬다. (김호수, "아이를 키우지 못한 엄마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생모들", 2015)

미혼모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차별은 이들이 입양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한국 사회의 강고한 유교적 가부장제 질서를 어지럽히는 미혼모들은 자신의 아이와 이별하는 '처벌'을 받아들여야만 사회적 낙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모성 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제를 유지시키는 동력 중 하나다. 가부장제 질서에서 벗어난 '어떤 어머니'의 모성은 철저히 짓밟힌다.

한국은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이득을 꾀하기 위해 산업화된 국제입양을 제도화했다. 자국 아동을 지원하고 보호하기 위한 비용을 절감하는 동시에 서구의 양부모에게 입양 수수료를 받음으로써 이중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또 미혼모와 그 자녀들을 제거함에 따라 '단일민족과 '정상가족'이라는 유교적 가부장제에 기반한 이데올로기적 판타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 매년 5월11일은 정부가 해외입양을 줄이기 위해 국내입양 활성화가 필요하다며 지정한 '입양의 날'이다. 하지만 이에 반기를 든 이들이 있다. 해외입양을 줄이려면, 미혼모에게 양육 기회를 주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미혼모 단체들은 이날을 '싱글맘의 날'로 자축하고 있다.ⓒ연합뉴스


미국도 '아기 퍼가기' 시대가 존재했다

미국은 현재 미혼모의 2%가 2세 미만의 영아를 포기한다. 그러나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미혼모는 사회적 금기였다.


혼외 임신을 한 여성은 가족에 의해 시설로 보내지고, 여기서 여성들은 엄격한 고립과 모욕의 상황에서 출산을 기다려야 했다. 이들은 쉼터에서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했다. 임신의 비밀을 유지하고, 자신이 아이를 낳아 입양 보낸 후라야 원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들은 출산 직후 친권 포기 서류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고, 많은 이들이 아이의 아버지를 안다는 사실을 부인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자신의 아이를 지킬 권리나 도움을 받을 제도 등에 대해 의도적으로 잘못된 설명을 제공받았다. 산후에 아이를 보거나 안아볼 기회조차 거부당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이 시기 수백만의 어머니가 출산 후 아이를 빼앗기는 고통을 당했다. 1972년 '로 대 웨이드 사건'으로 낙태가 합법화 되기 이전에 낙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1950년대 미국 사회의 혼외 임신과 낙태 문제를 다룬 영화 '더 월'에서 주인공(데미 무어)은 자기 집 식탁에서 불법 낙태 시술을 받다가 사망한다.


<사라진 소녀들 : 로 대 웨이드 사건 이전 시대에 아이를 입양 보낸 여성들의 숨겨진 역사>를 쓴 앤 페슬러는 100명의 미혼모들의 구술을 통해 그녀들이 아이를 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평생에 걸친 죄책감과 우울증에 시달렸음을 보여줬다. 1999년 미국 <산부인과 신생아 간호 저널>에 실린 한 논문은 "아이를 포기한 어머니들은 아이의 죽음을 겪은 여성보다 더 큰 자기부정, 절망, 비정형적 반응, 수면 장애, 식욕 부진, 의욕 부진 등의 슬픔 증후군을 앓는다"고 지적했다.

당시 공식 기록을 기준으로 하면 150만 명이 친권을 포기한 것으로 나오지만, 600-1000만 명이 자신이 낳은 아이의 친권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시기(1945-1972년)를 '아기 퍼가기 시대'(Baby Scoop Era)라고 부른다. (<구원과 밀매>, 캐서린 조이스, 2014)

미국 뿐 아니라 호주, 캐나다, 영국 등에서도 '아기 퍼가기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 국가는 1970-80년대 미혼모들의 당사자 운동을 포함한 여성운동으로 여성의 재생산 권리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또 '아동 최선의 이익'에 기반한 아동 인권에 대한 인식 변화도 미혼모의 양육권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가능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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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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