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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 '아동 수출'로 한해 200억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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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 '아동 수출'로 한해 200억 벌었다"

[심층취재 -한국 해외입양 65년] 2.입양의 정치경제학 ②

※이 기사는 이경은 국제인권법 전문가, 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대표의 도움으로 취재, 작성되었습니다.


1970년대, '미아'를 '고아'로 둔갑시켜 해외로 보내다

1978년 2월 경북 경산에 사는 정시학 씨 부부는 장녀 미화(당시 9세) 양을 잃어버렸다. 평소 잘 따르던 이웃집 서모(25세) 씨가 데리고 나간 뒤 미화 양은 이튿날 아침까지도 귀가를 안 했다. 정 씨 부부는 관할 죽도 파출소에 실종 신고를 했다. 정 씨는 미화 양이 8세 때 찍은 사진 100장을 복사해 사진 수배를 경찰에 의뢰했으나 경찰은 관내에 사진을 뿌렸을 뿐 수사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어 정 씨가 유괴범으로 추정되는 서 씨의 몽타주를 그려 전국에 수배하자고 요구하자, 포항 경찰서의 한 형사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떠드냐"며 오히려 정 씨의 멱살을 잡고 뺨을 때렸다.

아버지 정 씨는 사비를 털어가며 미화 양의 행방을 좇던 중 서 씨가 대구교도소에서 아동 유괴 혐의로 복역 중이라는 말을 듣고 형사들과 함께 그를 두 번 면회했다. 이들은 서 씨에게서 미화 양을 부산 남포동에서 떼놓았다는 자백을 받고 부산을 찾아 남포동 파출소에서 미화 양을 부산시 여성회관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부산시 여성회관은 부산시 사회과로 보냈고, 부산시는 미화 양을 임시보호소에 수용했다. 결국 정 씨는 미화 양이 유괴된 지 1년 10일 만인 1979년 2월18일 입양기관인 동방아동복지회(현 동방사회복지회)를 통해 미국인 양부모에게 입양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 기막힌 사실은 동방아동복지회엔 미화 양이 진술한 부모, 형제 등 가족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집 주소와 가축을 기른다는 것 등이 정확하게 기재돼 있었다는 것이다. 동방사회복지회는 미화 양의 진술로 충분히 부모를 찾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입양을 보냈다. 이 모든 사실이 정 씨의 끈질긴 추적으로 드러났고, 정 씨가 항의하자 동방아동복지회 직원은 "내 돈 들여 부모 찾아줄 의무가 없으니 고발할테면 하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기까지 했다고 한다.

위 사연은 1979년 5월 16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유괴된 딸 추적 1년 3개월...어른 무성의로 이미 미국 입양")를 요악한 것이다.

유사한 사연이 1975년 10월 5일 <조선일보>에도 보도됐다. "외아들을 돌려주오"라는 제목의 기사에 따르면, 1974년 6월 1일 아버지의 일터에 갔다가 숙소를 나가 실종된 만 4세 김탁운 어린이는 당일 해당 지역 파출소를 거쳐, 경찰서로 바로 옮겨졌으며, 해외입양기관인 대한사회복지회 대구분실에 보호됐다가 같은 해 11월 5일 '백정희'라는 이름으로 스웨덴으로 입양됐다.

위의 기사들은 1970-80년대 길을 잃은 '미아'가 어떤 과정을 거쳐 해외입양을 가게 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경찰은 길을 잃은 아이의 집을 찾아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고아원이나 입양기관의 보호시설로 아이를 보냈고, 여기서 아이는 멀쩡히 부모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아'로 둔갑해 해외로 입양 보내졌다. 입양되기까지 걸린 시간도 불과 5-6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앞서 기사에서도 입양특례법이 시행되는 2012년까지 기아 발견에 의한 단독 호적(고아호적) 발급 숫자와 해외입양 아동의 숫자는 놀랍게도 일치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바로 보기: [단독]외교부의 거짓말, 美 "일부 한국입양아 자동시민권 못받아")

▲연도별 '기아 발견'과 '국외입양' 아동 숫자 비교 (출처: <국제입양에 있어서 아동권리의 국제법적 보호>, 이경은, 서울대학교 법학과 박사 학위 논문, 2017)

북한의 비난 "가난한 남한의 유일한 수출품은 아기"

박정희 정권에서 1961년 만든 고아입양특례법으로 법적 근거를 마련한 해외입양은 1970-80년대 폭증했다. 1950년대 전쟁고아를 구제하기 위해 임시적 조치라는 명분으로 시작된 해외입양은 '제도화'되면서 한국이 사회경제적 발전이 진행된 후에도 지속됐다. 한국은 국가적 지원과 보호가 필요한 아동을 해외로 보내면서 이들 아동을 자체적으로 보살피고 보호하는데 필요한 복지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소홀히 했다. (Sarri, Baik & Bombyk, "한국과 미국의 국제입양에 있어서의 목적 변이와 의존성", 1998)

특히 한국 출신 입양인의 2/3이상이 미국으로 입양됐다는 점에서 해외입양은 또 미국의 또 하나의 '원조'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후반 사이에 미국으로 입양되는 아동의 20-30%가 한국 아동이었다. (Kane S., "인식론적 관점에서 본 국제입양에서의 아동의 이동", 1993) 오늘날 한국계 미국인들 중 한인 입양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0%에 달한다.(하지만 입양인들은 미국 내 한인 커뮤니티에 쉽게 편입되지 못한다. 한국 출신 아동은 한국 입양기관과 협력하는 미국 내 입양기관을 통해 미네소타, 뉴욕, 미시건 등 7개 주에 주로 입양된다. 이들 지역은 재미 교포 비중이 높지 않다. 또 입양인들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기 때문에 한국 언어, 문화, 정서 등을 습득하지 못한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초반 북한의 해외입양에 대한 비난으로 한때 해외입양 중단을 정책 목표로 삼기도 했다. 당시 북한은 '남한이 경제적 이윤을 얻기 위해서 아기를 서양인에게 팔아넘기고 있고, 가난한 남한이 수출할 수 있는 상품은 아이들 뿐'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이삼돌, <해외입양과 한국의 민족주의>, 2008) 북한도 한국전쟁 이후 고아를 소련과 동유럽국가 위탁양육이나 기관보호를 위해서 보냈는데, 이때 교사들이 아동과 동반하였고 나중에 이들은 북한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북한의 비난에 박정희 정권은 1976년 입양특례법을 만들어 국내입양을 활성화하려 했다. 박정희 정권은 국내입양 활성화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입양기관들에 국내입양 숫자에 비례해 해외입양 숫자를 배당하는 할당제를 도입했다. 또 매년 국내입양을 10%씩 늘려 1985년에는 해외입양을 중단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해외입양 할당제가 도입 2년 만에 흐지부지 되는 등 박정희 정권의 '해외입양 중단' 계획은 선언에 그쳤다. 북한의 비난에 맞서려는 정치적 요구보다 당장의 경제개발을 위해 복지비용을 최소화하려는 경제적 요구가 더 컸다. 고아원 등 아동 보호시설에 보내오던 해외 원조도 1970년대 이후 줄어들었다. 박정희 정부는 재정을 투입해 아동 보호시설을 늘리거나 한부모 가정 등 취약 가정을 지원하는 방안 대신 해외입양을 선택한 셈이다.

특히 해외입양은 입양부모로부터 적지 않은 수수료까지 챙기는 '이중의 경제적 혜택'을 가져오는 사업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67년 고아입양특례법 개정을 통해 해외입양 업무는 정부에서 허가받은 기관에서만 하도록 명시하였고, 관련 비용은 양부모에게 청구하도록 했다. 이에 발맞춰 1964년 대한사회복지회, 1971년 동방아동복지회(1972년부터 입양사업 시작)가 설립됐고 입양기관을 통한 해외입양은 일종의 아동복지 시스템으로 자리매김을 시작했다. 1960년대 한 아동당 입양기관에서 양부모에게 130달러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1965년 한국의 1인당 GDP가 106달러에 불과했다.


전두환 정권 "입양은 이민 활성화이자 민간 외교"

박정희 정권에서 제도화된 해외입양은 전두환 정권 하에서 급증했다. 북한 등 외부의 시선을 의식했던 박정희 정권과 달리 전두환 정권은 해외입양을 '이민확대 및 민간외교'라는 명분을 내세워 크게 늘렸다.(Sarri, Baik & Bombyk, 1998) 그 결과 1980년대 한국아동의 해외입양은 최고조에 달하여 10년 기간 동안 무려 6만5511명의 아동이 해외로 입양되었다.(보건복지부 통계) 특히 한해에 8000명이 넘는 아동이 해외로 입양된 1985년(8837명)과 1986년(8680명)을 포함해, 1984년부터 1988년까지 5년 동안은 한해 태어난 총 출생아 중 1%가 넘는 아동이 해외로 입양됐다.

표2. 연도별 출생아 수와 해외입양아 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한국의 미혼모 복지에 과한 연구 : 해외입양, 관련통계, 선진국의 복지정책을 중심으로", 2009 에서 재인용

▲ 연도별 해외입양아 비율(%) ⓒ프레시안

이 시기에도 미국으로 입양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경향은 이어졌다. 1976-1981년에는 한국 입양인이 미국 전체 해외입양의 50%를 차지했고, 1986년 미국에 입양된 한국 출신 입양인은 6188명으로 미국 전체 해외입양의 59%에 달했다. 1980년대 후반 주한 미 대사관에서 한국 아동의 미국 입양을 위한 비자발급을 담당했던 미 INS 이민비자 담당 영사인 로버트 애크만 씨는 한국에서 입양이 '비즈니스'가 되어버렸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1988년 미국의 <프로그레시브>와 인터뷰에서 "한달에 500명의 아기는 단지 인도적인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지나치게 많은 숫자이다. 인도주의가 멈추고 사업이 시작되는 지점이 어디인지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 언론 "1980년대 한국 아동 1명당 5000달러, 한해 아동수출로 2000만 달러 벌어"

▲ 미 월간지 <프로그레시브> 1988년 1월호 표지. ⓒ중앙입양원 자료에서 재인용
미국의 진보적인 월간지 <프로그레시브>는 1988년 1월 커버스토리로 한국의 해외입양에 대해 다뤘다. "아기 매매-한국이 아기를 만들고 미국이 이들을 산다"는 제목의 기사는 한 달에 수백명이 해외로 입양되는 한국의 실태에 대해 상세히 다뤘다.

이 기사는 입양기관들은 입양부모로부터 아동 1명 당 5000달러를 받고 있으며, 한국이 해외입양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1년에 1500만-2000만 달러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아동 1명의 총 입양 비용이 5000달러를 기준으로 하면, 8837명의 아동이 해외입양된 1985년 총 4418만 달러 가량의 돈이 입양을 매개로 한국에 유입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 <프로그레시브> 기사는 한국 정부가 사실상 '준 정부기관'인 입양기관에 입양업무를 떠맡기면서 정책적 이득을 누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해외입양은 정부에 많은 목적을 제공한다. 우선, 그들은 연간 약 1500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 정도의 돈을 가져다 준다. 둘째, 정부는 (그들에겐 예산 낭비라고 볼 수 있는) 아이들을 돌보는 비용을 덜어준다. 셋째로, 한국 정부의 강박 관념인 인구 통제에 도움을 준다. 마지막으로 해외입양은 고아들과 버려진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냐는 어려운 사회적 문제도 해결한다."

같은 해 <뉴욕타임스>에도 한국의 해외입양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다.

"아시아의 신흥공업국으로 88올림픽 주최국임을 자랑하는 한국이 정부의 은밀한 지원 아래 매년 6000명 가량의 어린이를 미국 가정에 입양시키고 있으며, 미국 가정에 입양되는 외국 어린이의 59%가 한국 출신이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올림픽까지 유치할 정도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한 나라가 가난해서 아동을 키울 수 없다며 해외입양을 보낸다'는 모순에 대해 지적하는 외국 언론의 보도가 쏟아졌다. 이런 보도의 영향으로 국내 언론에서도 "매년 8천명...'고아 수출' 세계 1위" (<경향신문>, 1989년 1월 30일), "아기 수출 1위 오명, 씻을 수 없나"(<한겨레>, 1989년 2월 10일) 등 비판 보도가 이어졌다.


국내외 언론의 비판 보도가 88올림픽 전후로 이어지자 정부는 입양사업 개선 지침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1986년 정점을 찍었던 해외입양 아동수는 불과 3년 만인 1989년 4191명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1년 뒤인 1990년엔 2962명으로 다시 절반 가까이 줄었다. 그 사이 출산률이 급격히 떨어진 것도 아닌데 불과 4년 만에 해외입양 아동 숫자가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는 또 한 번의 '한강의 기적'이 일어난 셈이다. 이는 곧 필요 이상으로 많은 아동을 해외입양 보냈다는 얘기다.

전두환 정권 들어 '이민 활성화'의 일환으로 장려됐던 해외입양은 '아동 수출국'이란 오명으로 국가 이미지를 실추시킴에 따라 노태우 정부 들어 다시 정책 방향이 바뀌었다. 1989년 해외입양을 줄이기 위해 국내입양을 늘려야 한다며 국내 입양을 위한 '성가정 입양원'이 설립됐다. 또 노태우 정부는 혼혈 아동이나 장애 아동을 제외한 아동의 해외입양을 1996년까지 중단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외무부가 1990년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해마다 4000여 명에 이르는 해외 입양자수를 1995년까지 1년에 10-20%씩 감축, 1996년 이후엔 완전 중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계획은 김영삼 정부인 1995년 국내입양 숫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폐기됐다. 대신 김영삼 정부는 국내 입양 가정에 주택분양 500-1000만 원 할증 지원, 장애아동 입양 가정에 양육보조수당 및 의료비 지원 등 국내 입양 활성화 정책을 폈다. 하지만 1997년 IMF 위기로 해외입양은 다시 소폭 증가했다.

(이 기사는 ▲이경은(법학 박사)의 “국제입양에 있어서 아동 권리의 국제법적 보호”(서울대 2017년 박사학위 논문),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한국의 미혼모 복지에 과한 연구 : 해외입양, 관련통계, 선진국의 복지정책을 중심으로"(2009), 두 글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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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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