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홈페이지 청원 등을 통해 이슈화되고 있는 '낙태 비범죄화' 논의와 관련, 일반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과반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2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이 기관이 지난 1일 516명을 상대로 한 전화(유·무선 및 자동응답·전화면접 혼용) 여론조사에서 '낙태죄 폐지가 바람직하다'는 응답은 51.9%로 집계됐다. '낙태죄 유지가 바람직하다'는 답은 36.2%에 그쳤다.
리얼미터는 "7년 전인 2010년 2월에 실시한 낙태 허용 여부 조사에서는 '낙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응답이 53.1%, '허용해야 한다'는 응답이 33.6%로 집계된 바 있다"며 "이번 조사와는 반대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응답자 특성별로 보면, 여성들은 '폐지'가 59.9%로 전체 평균보다 높았고 '유지'는 30.1%에 그쳤다. 남성의 경우는 '폐지' 43.7%, '유지' 42.5%로 오차 범위(95% 신뢰수준에서 ±4.3%포인트) 내 접전 양상이었다.
의외인 점은 보수층(폐지 50.7%, 유지 38.6%)에서도 폐지 의견이 더 높게 나왔다는 것으로, 이는 진보층(54.7% 대 35.9%), 중도층(51.3% 대 38.0%)과 별 차이가 없는 결과였다. 이념 성향 분류에서 '진보층'이라고 답한 집단보다, 성별 분류상 '여성' 응답자의 폐지 의견이 더 높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연령별로는 20대(폐지 62.1%, 유지 30.8%)와 30대(60.7% 대 28.3%)에서는 '폐지' 의견이 60%를 넘어 여성 전체 집단보다 더 높았고, 40대(56.8% 대 33.7%), 50대(46.1% 대 41.6%)에서도 폐지 의견이 더 많았다. 60대 이상 연령층에서만 '낙태죄 유지' 의견이 43.5%로 '폐지'(39.0%)보다 높았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해온 진보 진영은 조사 결과에 고무된 모습을 보였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이날 당 지도부 회의에서 "국민 과반수가 낙태죄 폐지에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여성의 낙태에 대해 더 이상 범죄시해서는 안 된다는 시대적 흐름이 확인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대표는 "여성의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과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시급히 법률(형법)을 개정해야 한다"며 "이미 20만 명 넘는 국민들이 청와대에 청원을 접수했다. 정의당도 법률 개정안을 서둘러 발의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했다.
정의당 정책위원회와 여성위원회는 청와대 홈페이지에 낙태죄 폐지 청원이 접수된 지난달 31일 나란히 성명을 내어 "이제는 형법상 낙태죄 폐지와 여성의 자기 결정권 강화,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임신중절의 허용과 낙태를 줄이기 위한 근본 대책에 대해 논의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현재 청와대는 낙태죄 폐지 청원이 20만 명을 넘어섬에 따라 조만간 공식 답변을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와 별개로 헌법재판소에서도 낙태죄(형법 269조 1항 및 270조 1항)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을 심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헌법재판소에서 심리 중인 헌법소원 사건은 지난 2월 8일 접수됐으며, 이는 지난 2012년 8월 헌재가 낙태죄는 합헌이라는 취지의 결정을 한 이후 5년만이다. 헌재는 지난 2012년 당시에는 "태아는 그 자체로 모(母)와 별개의 생명체"라며 "생명권이 인정돼야 한다"고 합한 결정을 내렸다.
다만 당시에도 9명 정원의 헌법재판관 중 이강국·이동흡·목영준·송두환 재판관은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전면적·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처벌하는 것은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의 최소성 원칙에 위배된다"며 위헌 의견을 냈다. 당시 재판관 1명은 공석이었고, 합헌 의견을 낸 재판관은 4명이었다. 찬반 동수였으나 '위헌'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6명의 재판관이 필요해 결국 합헌 결정이 내려졌었다.
이번 심리에서는 재판관 인적 구성 등을 고려할 때 위헌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기존 재판관 8명 중 5명이 '여성의 자기결정권도 존중돼야 한다'는 입장이고, 청문회를 앞둔 유남석 헌법재판관 후보자는 비교적 진보 성향으로 분류된다.
기존 재판관 가운데 김이수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지난 9월 헌재소장 인사청문회에서 "임신 초기 단계이고 원하지 않는 임신의 경우와 같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우선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인사청문회가 예정돼 있는 이진성 헌재소장 후보자도 "피임과 낙태를 선택함으로써 불가피한 임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여성의 자기결정권, 행복추구권이 태아의 생명권에 비해 결코 낮게 평가돼서는 안 된다"(2012년 재판관 인사청문회)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법조계 내 진보적 성향의 법조인들은 낙태를 형법상 범죄로 취급하는 데 대해 대체로 부정적 인식을 보이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번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해 주무 수석비서관으로서 답변을 내놓아야 하는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서울대 법대 교수 시절 낸 논문 '낙태 비범죄화론'(<서울대학교 법학> 2013)이나 저서 <절제의 형법학>(박영사, 2012) 등에서 낙태 비범죄화를 주장했다.
조 수석은 논문에서 "모자보건법 제정 후 40년이 흐른 지금, 여성의 자기결정권 및 재생산권과 태아의 생명 사이의 형량은 새로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며 "모자보건법상 '우생학적 허용사유'와 '범죄적 사유'는 현실에 맞게 재구성되어야 하고, 사회경제적 허용사유는 새롭게 추가되어야 한다. 또는 '기간 방식'을 도입해 임신 12주 내의 낙태는 비범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련 자료 : 조 수석의 논문 '낙태 비범죄화'. 서울대 리포지터리에서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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