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총선과 대선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의견들이 하나로 모아져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정치대통합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성희 최고위원이 관련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대표주자들을 만나 릴레이 인터뷰 '진보의 재구성, 길을 묻다'를 <프레시안>과 함께 진행한다. 이 릴레이 인터뷰는 진보대통합을 둘러싼 다양한 주장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관련 논의를 보다 구체화하기 위한 시도다.
정 최고위원은 조국 서울대 교수를 시작으로 심상정 진보신당 전 대표, 권영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 이수호 민주노총 지도위원, 김세균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진보교련) 상임대표 겸 서울대 교수, 이학영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등을 만날 예정이다. <편집자>
"작은 권력 탐하는 패권주의, 맑은 정신 흐리고 있다"
정성희 : 얼마 전 전태일 열사 40주기 기념사업이 다양하게 진행됐습니다. 전태일 열사 40주기 기념사업 추진위원장으로 활동하셨는데요. 그 사업의 의의와 경과, 성과에 대해 한 말씀해주시죠.
▲ 이수호 민주노총 지도위원. ⓒ민주노동당 |
특히 민주노총이 전태일 열사 40주기사업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전태일 정신을 가슴에 담고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자는 뜻이죠.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앞장서 <전태일 평전> 읽기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생일인 8월 26일부터 분신한 11월 13일까지 매일 8명이 1시간씩 스스로 전태일이 되어 '전태일 다리'에 서 보는 '808 행동'이 전개됐습니다. 그 결과 서울시가 버들다리를 '전태일 다리'로 개칭했어요. 분신한 자리에는 동판을 세워 누구나 그 곳에서 전태일 열사의 희생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매월 1회 비정규직 투쟁사업장을 방문해 같이 행사를 진행했고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 등 비정규직과 함께하는 전태일 열사 40주기 기념사업을 통해 비정규직, 청년실업 문제를 사회적으로 부각시켰습니다.
이렇게 전태일 열사 40주기 행사는 단순히 추모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인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실업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이 처한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정성희 : 전태일 정신이 '노동운동 바로 세우기'의 사상적 기초라 할 수 있겠군요. 현재 민주노조운동 현황은 어떻습니까? 민주노조운동의 혁신,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수호 :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의 노동운동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이명박 정권의 극심한 탄압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자꾸 자신감을 상실하고 스스로 위기라는 자책을 하게 되어 안타까워요. 우리 노동운동사가 말해주듯이, 최소한의 생존권과 노동기본권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은 끝없이 계속되어왔고 쉽고 편안한 시절이 없지 않았습니까? 수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또는 탄압으로 목숨을 잃고 구속 수배당하는 등 늘 고통이 뒤따랐습니다.
지금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단위사업장이나 산별노조가 현안 해결에 매우 치열하고 기륭전자, 동희오토, 현대차 사내하청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강고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이 어렵다, 탄압이 심하다 등 소극적이고 자책하기 보다는 좀 적극적으로 낙관적으로 평가해야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을 위해 한 마디 보탠다면, 우리 안에, 내 안에 그 무엇이 생겨서 순수함과 희생정신이 방기되는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노동조합의 생명은 단결력인데, 조금만 문제가 있으면 이를 집중 부각시켜 공격하고 스스로 힘을 위축시키는 무책임한 행태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합니다. 또 작은 노조권력을 가지고 다툼을 하거나 조직운영에서 패권주의와 분파주의를 버리지 못해 우리 전체의 맑은 정신과 당당한 발걸음을 흐터리고 있어요.
이제 과감하게 극복해야 합니다. 다행히 같이 해보자는 기운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용산사태나 쌍용차 등의 투쟁사업장에서 정파를 초월해 같이 싸우고 몸을 부비면서 서로를 동지로 확인하는 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또 최근 백기완 선생의 노나메기재단 건립운동에도 모든 정파가 함께 모여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앞을 내다보며 하나로 나아가려는 모습입니다.
민주노조운동, 진보운동 혁신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은 여러 가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인간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의미의 노동자성을 회복하려는 자기 성찰과 집단적 반성을 전제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노동운동의 혁신안을 만들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과정에서 당도, 노조도 서로에게 부족한 점 많았다"
정성희 : 현재 우리나라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약 60%, 850만 명에 이릅니다.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 수준이고 노동조건도 매우 열악합니다. 노조 조직률은 2~3% 정도로 교섭력과 투쟁력도 취약합니다. 그래서 고용안정과 생존권, 기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현대차 불법파견 근절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투쟁에서 '아름다운 연대'가 회자되고 있습니다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를 강화하기 무엇을 해야 합니까? 특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수호 : 비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정규직화를 위한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떨쳐나설 때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같은 사업장에서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가 따로 있는데, 하나로 합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대립시키면서 비정규직의 고통이 정규직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호도하는 자본의 논리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비정규직의 몫을 정규직이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이윤확대에 귀속되기 때문이죠.
정규직 역시 자기가 일한 만큼의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차 20년 근무 정규직의 기본급이 200만 원이 안돼요. 높은 노동 강도 속에서 잔업 철야 특근을 밥 먹듯이 해야 연봉총액을 늘일 수 있어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단결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고용구조 자체를 혁파하는 운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노동자에게 기본소득을 인정하는 사회제도를 마련하고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도의 보편적 복지를 실현해야 합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이런 사회제도를 만드는 싸움에서 함께해야 합니다.
▲ ⓒ민주노동당 |
정성희 : 민주노조운동은 1997년 대선부터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을 통해 독자적 진보정치세력화에 참여해왔습니다. 지난 13년의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적잖은 성과를 가져왔음에도 대체로 비주체적이고 형식적이며 분열적이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요?
이수호 : 노동자가 정치세력화하기 위해 민주노동당을 만들었습니다. 외국과 비교해 초기에는 괄목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보수정치 구조, 지역정치 구조입니다. 그런데도 그 정도의 뿌리를 내린 것은 민주노조 조합원과 그 가족들이 사람도 돈도 표도 뒷받침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주인으로 모셔야 하는데 당도 노조도 부족한 점이 많았어요. 그러다보니 노동자들이 갈수록 대상화되고 형식적으로 참여하다가 분당으로 정파갈등의 희생양이 된 것이죠.
그러나 희망이 보입니다. 지난 지방선거나 재보궐 선거에서 지역에 따라 노동자들이 결집하고 단결해 큰 역할을 했고 적잖은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를 잘 계승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민주노조 운동진영이 중앙의 5+4협상이나 지역의 선거연합 과정에서 일 주체로 참여하지 못한 점입니다. 노동운동이 하나의 단위로 들어가 처음부터 활동했다면 더 구체적 역할을 할 수 있었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도 빠르게 촉진할 수 있었습니다. 또 중앙 차원의 선거연합도 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명박에 맞서려는 진보개혁민주세력이 노동자정치세력을 인정하고 힘을 줄 때, 더 크게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국민은 광장으로 나오는데 책임 있는 정치세력이 안 보인다"
정성희 :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나서야 진보정치세력화도 가속화하고 올바른 범야권연대도 가능했다는 말씀이시군요. 2012년에는 노동자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한나라당 재집권을 저지하고 진보적 정권교체를 이루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수호 : 이명박 집권 6개월 만에 촛불이 타올랐습니다. 그 힘이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이명박 정권을 견제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민주당도 확실히 대안으로 안 된다고 판단하고 있죠. 진보정치세력은 분열해 있어 국민들의 선택의 폭이 좁아졌습니다. 국민들이 사안에 따라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오지만, 정치적 힘으로 결집하고 있지는 못해요. 책임 있는 정치세력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대안정치세력을 가시화하고 대안사회의 모습을 분명히 제시하며 국민 앞에 나간다면 기꺼이 선택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문제는 그런 정치집단, 믿을만한 진보정당을 어떻게 만드냐는 것입니다. 진보진영이 고민하고 있는 진보정치대통합운동이 그런 맥락에서 큰 의미를 갖습니다. 반드시 국민 여망에 부응하는 정치세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2012년까지 진보진영의 핵심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성희 : 지도위원께서 생각하는 대안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또 이를 현실화하는 진보정치대통합세력의 주체는 어디까지 입니까?
이수호 : 지난 6.2 지방선거의 교훈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친환경무상급식으로 표출된 보편적 복지 정책에 대한 지지입니다. 친환경무상급식은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하며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정책의 일부입니다. 국민들이 자본주의에 깊이 경도되어 지지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 진보진영이 스스로 포기해버린 정책들을 국민들은 해 볼 만하겠다고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서 실제적으로 포기해 버리는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의 비전과 정책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다듬어 제시하면 국민들이 기꺼이 동의한다는 것을 친환경무상급식 실현을 통해 배울 수 있었죠.
최근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이나 보편적 복지라는 용어가 공공연하게 사용되는 것도 담론 수준이 아닌 비전과 정책으로 제시해도 받아들이는 국민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소한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정책이라도 확실하게 실현하자고 이야기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설혹 여러 한계가 있더라도 자본주의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구체적 정책 대안으로 국민에게 다가가면 지지해주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물론 노동 없는 복지, 평화 없는 복지, 사회공공성 없는 복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진보진영이 만들어갈 국가 비전과 지향점을 제시하고 이에 합의하는 세력의 폭을 넓혀 나가야 합니다. 우선 2012년의 비전에 합의하는 과정을 통해 진보정치대통합도 범야권연대도 가능할 것입니다. 지난 6.2지방선거에서도 정책연대는 성사됐는데 민주당이 후보를 양보하지 않았죠. 민주당 좌클릭의 배경입니다. 2012년에는 진보대통합 정치세력이 먼저 힘을 가지고 국가 비전이나 정책노선을 제시하며 사소한 차이를 극복하고 중도세력과도 크게 연대하면 한나라당과의 싸움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정당 따로, 선거 같이'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다"
정성희 : 진보정치대통합의 참여범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민주노동당 |
정성희 : 진보진영이 진보적 가치와 비전에 동의하는 진보정치대통합을 이루고 원칙과 기준에 맞는 범야권 연대를 실현해 한나라당 재집권을 막고 진보적 정권교체의 숙원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야! 합쳐'라는 범야권단일정당이나 빅텐트론, 각자 진보정당 따로 하면서 선거연합하자는 양편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수호 : 한국의 정치형태나 분위기를 봤을 때 빅텐트론은 그 실현이 불가능합니다. 민주당 내부선거를 치룰 때 보면 권력관계가 대단히 복잡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를 일거에 해소하고 기득권을 포기한 채 아무 조건 없이 큰 텐트로 모이자, 제3지대에서 다시 만나자는 것은 정당의 속성, 정치인의 특정상 불가한 일입니다. 지금 같은 민주당은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긍정성이 있지만, 진보정치대통합에 대중적 혼란을 초래하는 부정적 측면도 있습니다.
민주당 내부의 진보인사들이 치고 나와 진보대통합에 합류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진보정당 일각의 "정당 따로, 선거 같이"라는 주장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습니다. 진보정당들이 너무 이념 지향적이고 분파적이기까지 해요. 차이를 인정하고 공동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자기 이념지향 강조해 전체 어렵게하는 것 이제 그만해야"
정성희 : 진보정치대통합 이후 다시 분열, 갈등해서는 국민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새로운 진보정치대통합정당을 잘 운영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 없을까요?
이수호 : 과정이 결과를 규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보대통합 과정에서 새롭게 하나가 되는 경험을 축적해야지요. 서민의 삶을 최우선에 두고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진보대통합당의 가장 큰 원칙은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욕심이 집단화되면 패권주의가 되니까요. 자기의 이념지향을 너무 강조해 전체를 어렵게 하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공생해가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맞는 내부 민주주의 관철,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가장 많은 사람의 의견을 집약시키고 그에 따라 운영할 수 있을 지 많이 고민되어야 합니다. 말로만의 진성당원제가 아니라 당원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야 하겠지요.
정성희 :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에게 당부의 말씀 한마디 해주시죠.
이수호 : 전태일 열사 40주기 기념사업 준비단장을 맡아 일하면서 새삼 느낀 것은, 미우니 고우니 해도, 힘이 빠졌네 어쨌네 해도 우리 사회에서 아름답고 힘 있게 살아가는 사람과 조직은 노동자이고 노동조합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민주노조운동의 역사 속에서 단련해온 기간과 성과는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민주노총은 함부로 폄훼될 조직이 아니라고 늘 이야기합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가지길 바랍니다. 노동자의 힘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정치권, 시민사회에서도 밀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진보진영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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