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을 찾아오는데 최소 몇 년이 필요하다는 공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권을 지키는 것보다 찾아오는 게 더 어렵다는 것은 상식이다. 지키는 쪽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거의 무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책수단을 독점하고 있고, 인적자원의 가용 풀도 넓다. 무엇보다도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이에 비해 정권을 찾아와야 하는 쪽은 정책수단도 거의 없고 인력풀도 좁고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기회도 원천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모든 면에서 지키는 쪽은 성 위에 있고 찾으려는 쪽은 성 아래 있는 형국이다.
병법에도 성을 공격하려면 지키는 쪽보다 10배의 자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공격하는 쪽의 자원이 절대적으로 빈곤한 정치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싸움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정권교체나 정권 탈환이 정권재창출 못지않게 빈번히 일어나는 걸 보면 과연 정치에는 산술적 계산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손학규, 유시민, 정동영 등 야권의 주자들은 이 산술적 계산을 넘어서는 '무언가'에 정치생명을 걸고 무모해 보이는 도전에 나서고 있다. 이들에게 박근혜는 넘을 수 없는 벽일 수도 있지만 화려한 비상을 위한 도약대일 수도 있다.
손학규, 진정성 보였지만 '표의 충성도' 낮아
손학규는 수도권 중간층에 강점이 있는 주자다. 경기도지사 이력도 그렇고 중도 개혁적인 정치 칼라도 그렇다. 민심대장정을 돌파해낸 손학규 특유의 돌파력과 그 과정에서 보여준 나름의 진정성도 젊은 층에게는 매력 있는 포인트다. 한마디로 손학규는 확산성이 큰 주자다. 중간층, 부동층을 흡수해 낼 수 있는 잠재력이 큰 주자다. 반면 표의 충성도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손학규는 재야 시절에도 김근태 같은 리더라기보다는 아웃사이더나 비판적 지식인에 가까웠고 정치권에 입문한 후에도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길을 걸었다.
▲ 2007년 대선 경선에서 유시민 전 장관, 손학규 대표, 정동영 최고위원 ⓒ뉴시스 |
당대표임에도 손학규에게서는 여전히 비주류의 냄새가 난다. 맏며느리 보다는 데릴사위 같은 느낌이다. 이런 한계적 성격은 중간층과의 접점이 제대로 만들어지면 폭발력을 갖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언제든 주저앉을 수 있는 치명적 약점이 된다. 지지도가 한 번 빠지기 시작하면 회복이 어렵다는 뜻이다. 표의 충성도가 낮은 것이다.
그가 2007년에 끝내 한나라당의 벽을 넘지 못하고 민주당으로 옮겨온 것도 따지고 보면 표의 충성도가 높지 않아서였다. 당장의 패배도 패배지만 그 패배를 딛고 일어서 2012년을 향해 도전할 단단한 기반을 한나라당 안에서 구축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대효과가 꺼지면서 별다른 추가 상승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손학규 측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뚜렷한 해법을 찾아내지 못한 탓일 것이다.
유시민의 경쟁력, 그리고 유시민의 '짐'
유시민은 손학규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는 매우 충성도 높은 지지층을 갖고 있다. '노빠' 못지않은 '유빠'의 존재가 지금의 유시민을 만들었다. 유시민은 '유빠', 즉 열광적 지지자를 만들어내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유빠'를 끌어들이는 직설적이면서도 화려한 어법을 받쳐주는 것은 폭넓은 독서와 필력이다. 그래서 유시민은 간단하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국회 의석 하나 없는 국민참여당의 후보로 민주당 후보를 제치고 민주진영 단일후보가 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에는 유시민 개인의 경쟁력 못지않게 국민참여당의 경쟁력도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국민참여당은 노무현 세력의 일부가 모인 당이다. 노무현 세력을 구성하는 또 다른 축인 안희정, 이광재는 민주당에 있고 김두관은 무소속이다. 그런가 하면 노무현의 영원한 비서실장 문재인은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유시민이 노무현 계승을 말할 수는 있으나 노무현의 적통을 주장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정통 야당의 적장자를 자임하고 있는 민주당과의 세 대결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손학규, 정동영은 민주당이 끌어주는대로 올라타면 되는데, 유시민은 국민참여당에 올라탄다기 보다는 국민참여당을 끌고 가야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이것이 6.2 선거 내내 유시민의 행보가 무거웠던 이유였다. 더 나아가 그가 경기도지사 야권후보 단일화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표를 모두 흡수하지 못해 김문수에게 석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만큼 표의 확산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정동영, '균형잡힌 1등' 될까, '만년 2등' 머물까,
정동영은 손학규와 유시민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다. 표의 충성도는 유시민만 못하고 표의 확산성은 손학규에 미치지 못한다. 이 점은 정동영에게 위험요소임이 분명하지만, 하기에 따라서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은 안정적 2등으로 전락할 수도 있지만, 어느 한 군데 빠지지 않는 균형 잡힌 1등감으로 부각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정동영이 만약 만년 2등이 아니라 균형 잡힌 1등감 후보로 부상한다면 그가 지닌 화려한 미디어감각과 발군의 이슈감각 또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점들은 어디까지나 공중전이 주로 이루어지는 본선에서 1:1 진검승부를 펼칠 때 발휘되는 것이지 백병전 양상으로 치러지는 예선에서 힘을 발휘할 요소들은 아니다.
'野 단일후보 vs 박근혜' 구도 생기면 초박빙 상황 올 것
박근혜에게도 상대적으로 쉬운 상대와 어려운 상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예선을 통과하든 선거구도 자체를 바꾸어야 할 상황은 아닐 것이다. 야권 후보가 누가 되건 같은 색깔, 같은 구도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수도권 중간층에 강점이 있으나 표 충성도가 약해 전선이 복잡하게 만들어질 손학규, 표 충성도는 높으나 확산성이 떨어져 대결 구도가 간명하게 구축될 유시민, 전통적인 야권 후보로서의 안정감과 화려한 감각의 정동영. 결코 간단한 후보들이 아니지만, 확실하게 박근혜를 이길 필승카드라고 주장하기도 어려운 후보들이다. 여성후보 한명숙이 야권 후보로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여성 대 여성'식의 맞불전략으로 박근혜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박근혜에게 여성 후보는 '박근혜 브랜드'의 여러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야권의 도전자들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핵심적 변수는 사실 이들 간의 경쟁이 아니라 이들이 '더불어 하나가 되었을 때'의 시너지다. 손학규의 수도권 중간층에 대한 강점과 유시민의 충성도 높은 표, 거기에 정동영의 화려한 감각과 안정감이 더해진다면 각각의 전투력의 단순 합산을 넘어서는 위력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연합할 수만 있다면 지역적으로는 호남과 수도권, 영남의 일부, 계층적으로는 좌파, 중도좌파와 일부 중도우파까지 아우르게 될 것이다.
문제는 과연 이들이 합체 로봇처럼 후보단일화의 효과를 최대화할 수 있는 유기적 유연성과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박근혜와 야권 단일후보 간의 1:1 맞대결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초유의 혼전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박근혜가 지금부터 대비해가야 하는 상황은 바로 이같은 초박빙의 혼전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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