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경제 제재가 본격화됐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중국의 보복을 비난하기에는 지난 2년간 한국 정부의 행태가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든 격이다. 2014년 미국 측의 한국 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검토 발표 이후, 중국은 일관되게 '단호한 반대'를 표명해왔다. 입장 표명을 유보하던 한국 정부가 작년 7월 미국과 사드 배치를 합의하고 부지 선정을 발표하자 중국의 반대와 철회 압력은 더욱 거세졌다. 중국 외교부 고위 관리가 삼성, 롯데 등 대기업 부회장을 만나 사드 배치의 후과를 경고했다. 탄핵 정국이 시작된 뒤, 중국은 사드 배치 가속화가 아닌 일단 동결을 요구했지만 한국 정부는 사드 배치를 고집스럽게 추진했다. 롯데로부터 부지를 사들였고, 주한미군은 사드의 일부분인 발사대를 들여왔다.
한반도 안보 위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한미 연합군은 4월 말까지 대규모 전략자산이 투여되는 독수리훈련을 1일 시작했고, 이에 맞서 북한은 6일 탄도미사일 발사훈련을 했다. 미국은 전술핵 한반도 배치를 검토한다고 한다. 수년 전부터 중국과 미국은 남중국해를 둘러싼 갈등을 겪고 있고, 중국과 일본은 2012년 센카쿠 열도를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을 겪었다. 동북아는 세계에서 가장 고도의 군사력이 집중된 동시에 가파른 군비 증가가 이루어지는 지역이다. 이런 심각한 위기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익숙한 일상이었다면 중국의 이번 경제 제재는 한국 전쟁 이후 처음 겪는 구체적인 위협이자 피해로 가시화되고 있다.
강대국들의 군사 전략, 한반도를 규정짓는 구조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은 채, 동일한 구조 속에 갇혀 있다. 근대 이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은 모두 강대국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남하 전략, 일본의 대륙 진출, 청의 기득권이 한반도에서 부딪힌 결과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기 때문에 발발 가능했다. 분단과 전쟁은 강대국들의 전략이 충돌해 만들어낸 결과이며, 종결된 사건이 아닌 역사적 현재다. 강대국들의 군사 전략이 충돌하고 타협하는 곳이 될 수밖에 없는 한반도에서 한국전쟁 이후 남북은 각기 다른 길을 선택한다. 냉전 질서를 기본 축으로 하면서도 북한은 자주국방(소련-중국군 철수와 핵 개발)을, 한국은 한미동맹을 생존전략으로 선택했다.
그 결과 탈냉전 이후에도 강대국들의 군사적 대결이 해소되지 못하고 '북핵'을 매개로 더욱 첨예해졌다. 북한은 핵무기를 지렛대로 강대국들에 휘둘리지 않고 대등한 협상을 하겠다는 전략을 구사했지만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매개-촉발하는 역할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미국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한 한국은 탈냉전 이후, 중국과의 경제-문화적 교류가 급증하면서 대(對)중국 수출 비중이 30%에 육박하는 최대 교역국이자 해외 직접 투자액도 미국 다음으로 큰 나라가 되었다. 이제 한국 경제는 중국 없이 굴러가는 게 불가능하다.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이루어진 중국의 경제 제재가 이제 막 시작되었음에도 곳곳에서 그 효과를 드러내는 이유다. 대립의 당사자는 미국과 중국이지만 이들은 결국 어느 정도 수준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일본이 2012년 센카쿠 열도를 둘러싸고 상호 경제 보복을 하다가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고 합의를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중국이 공언했듯이 한국에 충분히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다. 사회주의 자립 경제를 지향하는 북한조차도 미국의 경제 제재에 수십 년째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다. 고약하기 그지없는 구조다. 강대국들의 본토에서는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다.
반공 분단 세력의 득세와 사드 배치
분단과 전쟁을 통해 건설된 한국은 반공을 국시로, 한미 동맹을 물리력의 토대로 삼았다. 보수 지배 세력에게 분단은 주변 강대국 중 가장 힘센 미국과 함께하겠다는 결의이며, 전쟁은 북쪽을 점령한 괴뢰와 이들을 지원하는 다른 강대국과 싸우겠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최상위 법은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은 헌법을 비롯한 모든 법률의 전제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 앞에는 '빨갱이(종북) 제외'라는 괄호가 처져 있다. 한국 보수 세력의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이다. 이걸 기본으로 조금씩 변형되거나 농도를 달리할 뿐이다. 탄핵반대 집회 세력부터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킨 헌법재판소까지 이들의 기반은 넓고도 탄탄하다. 지난 몇 달 동안 수십만 명이 모인 탄핵 반대 태극성조기 집회 참여자들은 대한민국 보수의 본질이다. 이들이 쏟아내는 온갖 혐오와 폭력은 비유가 아니다. 수백만 명이 학살당한 한국 전쟁을 휘감은 논리 그대로다. 스님이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피켓을 들고 집회에 참석하고 박근혜 변호인단은 '시가전', '내전' 운운한다. 태극성조기를 들고 모이는 이들이 볼 때, 종북 척결, 좌파 척결, 한미 동맹 강화라는 사명에 충실했던 박근혜에게 최순실이라는 허물은 극히 사소한 것일 뿐이다.
한편 미군을 위세 삼아 권력을 쥐어온 반공분단세력에 맞선 운동은 한국사회의 개혁,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함께 주장해왔다. 4.19 혁명 이후 혁신계를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평화 통일, 한반도 중립화,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대중적으로 전개된 평화 통일-남북 화해협력 운동이 그것이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 야당 세력의 적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 관계의 획기적 변화를 도모하고 상당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도 면면히 이어져 온 평화 통일 운동과 이를 사명으로 삼는 정치 세력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들은 '빨갱이'라는 낙인에 맞서면서 한반도를 규정짓는 분단 체제라는 저 구조를 뒤틀고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사드 배치를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유력 야권 후보조차 찾기 어렵다. 국민의당 사드 배치 반대 당론을 지키는 정치인이 박지원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야당이 통합진보당 해산에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고 '종북'으로 몰릴까 두려워하며 동조했을 때, 야당의 자리는 정해졌다. '종북'인지 아닌지는 여당이 판단하고 야당은 자기검열에 시달린다. 주변의 따가운 눈총에도 탄핵 반대 집회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자유한국당이 흔들림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미 동맹-국가보안법-반공 분단이라는 자신들의 핵심 주장이 제대로 반박당하거나 패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비판하거나 의문을 제기한 세력을 국정원-경찰-검찰-사법부는 언제라도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드 배치는 단지 외교안보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점점 더 피부에 와 닿을 중국의 경제 제재는 우리에게 한국이 처한 상황을 새삼 인식하게 한다. 한미 연합 훈련, 북핵 개발, 미사일 발사 등 때 되면 나오는 뉴스이겠거니 했던 한반도 정세가 중국의 경제 제재로 뉴스에서 튀어나와 우리 눈앞에 섰다. 주말마다 서울역과 시청광장을 점령한 태극성조기 집회에 참여한 이들은 미국, 일본과 한 배를 타 중국, 북한과 싸우잔다. 그래서 박근혜가 사드 배치, 한일 위안부 합의, 개성공단 폐쇄를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단다. 최순실, 이재용, 김기춘을 구속시키고 국정농단, 재벌들의 뇌물청탁, 문화계 블랙리스트 문제를 파헤치고 박근혜를 탄핵시키기 직전인데도, 태극성조기는 여전히 힘차게 펄럭이고 사드 배치는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소녀상 철거와 합의이행을 요구하고, 중국의 경제보복은 앞으로 어떻게 더 진행될지 모른다. 우리의 삶이 왜 이토록 불안해야 하는가.
사드 배치는 단지 국가 간 고도의 외교안보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박근혜 체제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여전히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핵심 열쇳말이다. 보수 세력은 늘상 이야기했다. 이 나라는 북한, 중국에 맞서 미국과 함께 피를 흘리며 지킨 나라고, 현재 진행 중인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둬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보수 세력은 틈만 나면 북한의 전쟁 위협을 들이대며 민주주의를 말살해왔다. 그러나 보수 세력이야말로 전쟁을 통해서만 국가 정체성을 찾는 세력이다. 안전을 말하지만 국민의 생명을 바닷속에 팽개쳤던 것처럼, 안보를 부르짖지만 한반도 주민의 생명을 전쟁의 불구덩이로 밀어넣는 데 주저함이 없다. 미국을 위해, 한미 동맹을 위해. 우리가 전쟁의 불안을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다. 경제 제재의 불안을 감당해야 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 사드 배치를 철회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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