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현대사는 외부인에게는 불가사의하게 보이는 일들이 많다. 모택동· 주은래·등소평 이 세 사람의 관계도 그러하다. 이 세 사람은 농민혁명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이며, 오늘의 중국을 만든 최고 지도자들이다.
모택동 시대는 대약진운동과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으로 상징된다. 반면 등소평 시대는 개혁과 개방, 그리고 경제적 번영으로 특징지워진다. 모택동의 중국과 등소평의 중국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런데 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중국을 이끈 세력이 중국공산당이라는 단일한 정치집단이었다. 이 점이 놀랍다.
모택동은 모택동 사상에 의거하여 온 중국을 공산주의식으로 완전히 개조하고자 하였다. 50년대 대약진운동으로 수천만 명이 굶어죽었다. 60년대 문화대혁명으로 국가의 상층부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모택동의 시대는 이른바 홍(紅)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모택동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에도 그에게 직언을 하던 동지들이 있었다. 그러나 국가주석 유소기, 국방부장 팽덕회, 당 총서기 등소평 등 수많은 건국의 원로들이 모택동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홍위병에 끌려다니면서 폭행, 고문, 자아비판 등을 강요당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그들 중 등소평은 목숨을 부지했을 뿐만 아니라 모택동 사망 수년전 극적으로 중앙 정계에 복귀하는데 성공하였다.
등소평의 복귀는 두 가지 이유로 가능했다. 첫째로 모택동이 등소평을 인민 내부의 모순으로 파악하여 재교육을 통하여 그를 다시 기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모택동은 유소기는 적대적 모순으로 파악하여 제거할 생각을 가진 반면 등소평에 대해서는 애정을 거두지 않았다. 둘째로 주은래가 수 차례 결정적인 시기에 등소평을 보호하였다. 등소평은 약 7~8차례에 걸친 암살위협에서 운좋게 살아났다고 전해진다. 당시 문혁을 주도하던 4인방이 눈에 가시같던 등소평을 제거하려고 하던 시점, 주은래의 보호망이 없었다면 설혹 모택동이 그를 살해할 마음이 없었더라도 등소평의 안전은 보장하기 어려웠다.
모택동의 중국과 등소평의 중국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이 주은래였다. 만약 등소평이 완전히 제거되었으면 중국이 어떻게 되었을까? 4인방이 전권을 장악한 중국이 소련·동구권의 사회주의가 해체되던 80년대를 살아남을 수가 있었을까? 아마 중국은 80년대 말 또 다시 천하대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렸을 것이다.
모택동과 등소평이라는 두 거인의 시대가 연결되도록 한 주은래의 역할이 중국의 운명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점을 진시황의 중국과 비교해보자.
700여년에 걸친 열국할거의 전쟁 시대를 끝낸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자 문자와 도량형을 비롯한 제도를 정비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였다. 그는 영원히 계속될 제국의 기틀을 확고히 세우고자 하였다. 분서갱유와 만리장성도 그러한 산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혹독한 정치로 민심은 완전히 진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사후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는 공모하여 진시황의 유서를 변조하고, 황위를 계승할 장자를 자살케하고 무능한 3남에게 황권이 가도록 만들었다. 불과 3년 만에 중국최초의 통일제국 진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모택동 시대가 등소평 시대로 연결되지 않았더라면 모택동이 제2의 진시황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등소평이 모택동 이후의 지도자가 되도록 배려한 주은래의 심모원려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중국이 진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고 오히려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은인자중을 거쳐 세계의 빅2로 등장한 배경에는 중국공산당을 이해해야 한다.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들을 한 팀으로 담은 정치적 그릇이 중국공산당이다.
중국공산당이 인구 15억의 중국을 이끄는 영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는 2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 첫째는 대중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30년대의 대장정 이래 공산당과 대중은 물과 고기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둘째는 당 내부의 운영과 인사 원칙이 엄격하면서도 공정하다는 점이다. 당의 최고 지도부는 철저한 집단 지도 체제로 운영된다.
중국과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공산당 일당독재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주의 사회와 다양한 정당이 선거를 통해 정권을 겨루는 민주 사회는 조직과 운영원리가 다르다. 그러나 정당이 정치의 요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즉 정치 리더십이 안정적으로 발휘될수록 정당 정치가 대중 속에 뿌리내리고 있고 활성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현재 한반도에는 크게 3개의 정치 세력이 결사체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또 몇 개의 파벌로 나뉘어져 있다. 가장 역사가 오랜 정당은 1949년 김일성과 박헌영이 주도하여 창당한 조선노동당이다. 둘째는 박정희와 김종필이 주도하여 만든 민주공화당 계열의 세력이다. 셋째는 김대중과 노무현을 비조(鼻祖)로 하는 민주당 계열이다.
조선노동당은 1972년 수령 제도를 채택하면서 김일성 유일수령정당으로 탈바꿈하였고, 지금은 백두혈통의 3대세습을 떠받치는 북한의 핵심기구로 기능하고 있다.
1963년 박정희의 특명으로 김종필이 만든 민주공화당은 이후 60년 가까이 남한 사회를 지배하는 패권주의 세력으로 군림했다. 비록 이름은 여러번 바뀌었으나 새누리당에서 최근에 갈라진 바른정당과 자유한국당의 기원이 민주공화당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한국사회 상층부를 형성하는 이권과 기득권, 그리고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패권적 지역주의 세력을 연합하여 강력한 정치 결사체를 유지해왔다.
반면에 민주화운동이라는 공통의 뿌리를 가진 김대중 세력과 노무현 세력은 쪼개졌다가 합쳐지는 이합집산의 역사를 거듭하면서 분열과 통합의 끝이 보이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걸어왔다. 호남을 기반으로 하면서 민주화 운동권의 주류 출신인 김대중은 지난한 투쟁을 거쳐 최초의 민주 정권을 수립하였고, 그 우산 하에서 부산을 기반으로 하는 운동권 비주류 출신의 노무현 정권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생전에 결국 하나의 팀으로 통합되지 못하였다.
출중하고 비범한 정치적 재능으로 두 번에 걸쳐 민주 정권을 세웠던 이 두 지도자들이 가장 가슴 아파할 숙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두 지도자의 뜻과 가치를 계승할 통합 정당을 만들지 못한 것이었다. 이들의 후예들은 전국적 선거를 앞두고 일시 통합하여 승리를 만들어내기도 하였으나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을 마다하지 않았다.
민주 세력이 만들어온 정당은 몇가지 약점을 안고 있었는데, 첫째는 지도자 중심의 인물 정당이었다는 점이다. 당의 비전과 강령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집권 전략에 따라 정치적 이합집산이 이루어졌다. 둘째는 대중과 정당의 괴리가 갈수록 심해졌다. 대중과 정당은 일체감을 상실하고, 대중은 특정한 계기에 동원되는 부대로 전락하고 정당의 상층부가 견제없이 독단적으로 정당을 운영하는 시스템이 제도화하였다. 그 결과 양당제가 주는 제도적 반사이익에 안주하는 모습이 지배적이 되었다.
셋째로 당의 공천이나 인력 충원 방식이 주먹구구식이다. 이때까지 국회의원 공천은 거의 예외없이 밀실에서 원칙없이 결정되곤 했다. 당의 정체성과 가치를 구현할 능력있는 사람을 찾거나 육성해야 하는데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당권 세력의 입맛에 맞는 영입 인사를 조달하곤 했다. 그 결과 당의 비전과 강령, 정책을 중심으로 구심력이 강화되기 보다는 국회의원 각자가 자기 잘난 맛으로 정치하는 원심력의 정치가 지배적이 되었다.
총체적으로 언급한다면, 민주 세력은 정당 정치의 발전이란 측면에서는 낙제점이었다. 백년이 넘는 미국의 정당, 서구의 정당을 부러워만 할 수는 없다. 이제라도 정당을 정치의 중심으로 굳건히 세우고, 지도자들을 한 팀으로 담아내는 정당을 바로 세워야 할 때다.
6월항쟁에 이어 또 한번의 시민 혁명을 지향하는 촛불항쟁이 5개월째 지속되는 지금 민주세력의 정당은 또 한번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5월 광주항쟁과 6월 민주항쟁을 모태로 하는 민주당 계열은 그동안 끊임없는 내분으로 대중적 기반이 와해되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이 지난 총선과 촛불 항쟁을 통해 야권에 새로운 활로를 제시하고 있다.
광주항쟁은 광주시민의 항쟁이었다. 6월항쟁은 학생과 지식층의 항쟁이었다. 그러나 이번 촛불항쟁은 문자 그대로 전 국민의 항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만약 총선 승리와 촛불항쟁이 없었더라면 2017년 대선을 거치면서 일본 자민당처럼 국우 세력의 영구 집권이 이루어졌을지 모른다. 특히나 이원집정부 형태의 개헌을 통해 민주 세력의 정치적 헤게모니는 영원히 상실되었을 지도 모른다.
같은 뿌리를 가진 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은 이번 대선과정을 통해 연합정치로 수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첫 시금석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뽑는 경선이다.
이번 민주당 경선은 대선승리와 정권교체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뿌리깊은 국민정당‘을 이제라도 건설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각별한 중요성이 있다. 한 번의 정권교체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정당이 팀이 되어 두 번, 세 번의 정권을 창출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지도자보다는 정당이 중심이 되는 정치, 비전과 강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정치, 대중과 물과 고기의 관계를 갖는 정치로 발전해야 한다. 지금 민주당 경선에 참여한 후보들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둘러싸고 격렬한 토론을 진행중이다. 마치 모택동과 등소평이 중국의 미래를 놓고 대결한 홍(紅)과 전(專)의 토론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 대논쟁의 심판관은 촛불시민이 당연히 맡아야 한다.
촛불항쟁이 절정에 도달한 지금이 결정적 시기다. 민주당의 차기 지도자가 되려는 정치인은 촛불민심과 어떻게 결합할 지 방안을 내놓아야 하고, 촛불민심 또한 민주당을 방관적 자세로 비판만 해서는 안된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촛불민심이 주인으로 결정권을 행사해야 한다. 촛불민심이 300만, 아니 400만 명이 참가해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결정권을 행사할 때, 기존 민주당의 조직과 운영행태에 일대 충격을 주면서 정당 발전의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광주항쟁과 6월항쟁에 이어 30년만의 민주항쟁을 우리는 겪고 있다. 이 항쟁의 에너지를 민주당은 자신의 존재에너지로 삼아야 한다. 모택동·주은래·등소평이 한 팀으로 중국을 바꾸었듯이, 문재인·안희정·이재명이 한 팀이 되어 한국을 바꾸어주기 바란다. 그리고 그들을 담는 제대로 된 대중정당이 이번에 탄생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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