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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파의 반격과 서방 헛발질이 아마디네자드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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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파의 반격과 서방 헛발질이 아마디네자드 낳았다"

[테헤란에서 온 편지]<中> '서방 언론, 타이밍 못 맞출 바엔 입 다물라'

이란 테헤란대학에 다니는 한 학생이 지난 6월 대선 후 벌어진 시위 사태를 조망하는 글을 보내와 세 차례에 나눠 게재한다. (☞첫 번째 글 "서방은 이란인들에게 한 번도 정직하지 않았다" 바로가기) <편집자>

지난 편지에서 나는 가급적 내 해석을 배제하고 이란의 역사를 되짚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마도 나만의 관점이 조금씩 드러날 것이다.

이슬람 혁명 후 국민들은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사랑했다. 어디든 다수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소수는 있지만, 대체로 국민들은 그를 지지했다. 이란인들이 혁명을 완수하고 이라크와의 8년 전쟁을 견뎌냈으며 헌법상 최고 지도자의 존재를 용납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몇몇 고위 성직자들은 전권을 쥔 최고 지도자의 존재를 반대하는 경우가 있었다.

1979년 2월 11일 혁명이 완수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새 정부의 형태를 정하는 것이었다. 압도적 다수의 국민들은 투표에서 호메이니가 제안했던 '이슬람 공화국' 형태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 후 사회 지도층과 혁명의 주역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새 헌법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첨예한 이슈는 모든 부분에서 전권을 가지는 최고 지도자의 위상 문제였다. 많은 혁명가와 성직자들은 이 조항에 반대했다. 하지만 여론은 달랐다. 호메이니는 압도적인 위치에 있었고 최고 지도자 조항을 제안한 것도 그였다.

인간이라면 후광효과에 현혹되는 실수를 누구나 저지를 수 있고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 완벽하게 긍정적인 이미지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당시 이란 사회의 분위기에서 호메이니는 실수할 리 없고 언제나 옳은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호메이니는 매력적이었고 압도적이었으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의 어록은 계속해서 인용되는 동시에 결점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바시지 민병대원들 ⓒ로이터=뉴시스

혁명수비대와 바시즈의 창설과 변질

내가 아직 꼬마였던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했고 아야툴라 알리 하메네이 당시 대통령이 차기 최고 지도자로 지목되었다. 몇 년마다 국민들에 의해 뽑히는 성직자회의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난 호메이니의 죽음 이후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족이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호메이니 시절에도 그의 방식에 반기를 드는 흐름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혁명 초기 국민과 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또 다른 이들은 기회를 엿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 이들은 두 가지 부류였다. 이전 왕조의 지지자들이거나 국민들의 투표도 필요 없이 완전한 성직자의 정부를 그리는 이들이었다. 호메이니의 죽음은 그들에게 호재였고, 특히 후자의 경우에 더 그랬다.

혁명 초기 호메이니는 과거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별도의 군대를 만들었다. 혁명수비대가 창설되고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혁명수비대는 최고 지도자 및 정부의 핵심 기반이었고 점차 힘이 커졌다.

또 하나의 군사조직으로 바시즈 민병대가 있다. 이 조직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호메이니의 제언에 따라 창설되었다. 바시즈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진 입대한 평범한 국민들이 동원됐다. 그들은 전쟁에서 엄청난 용기와 희생정신을 보여줬다. 그들은 호메이니에 대한 존경 때문에 이슬람과 이란에 헌신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지도자는 유명을 달리했다.

바시즈는 8년의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해체되지 않았다. 오늘날 강경파로서 바시즈가 막강한 힘을 갖게 된 걸 보면, 해체를 결정하지 않은 당시 정부의 결정은 실수로 보인다. 호메이니 사후 일부 강경파들은 혁명수비대와 바시즈 민병대의 호위 아래 강력한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바시즈와 혁명수비대는 능력 있는 이들로 구성되었다. 전쟁 이후 그들은 정부 및 경제 활동 등 거의 모든 영역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그들에게 무역 허가를 내주거나 대학입학을 용이하게 하는 등 특혜를 줌으로써 그들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다방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이란의 많은 대기업들은 지금도 이 두 세력의 통제 속에 움직인다.

전쟁 때까지도 바시즈의 멤버가 아니었던 많은 사람들은 바시즈 대원들에게 주어지는 이점을 노리면서 바시즈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시즈는 강경노선으로 기울어갔다. 새로 합류한 이들은 그러한 행동 방식에 따르거나 따르는 척 해야 했다.

그에 따라 바시즈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점차 바뀌었고, 대중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특히 대도시에서 그런 분위기가 심했다. 그러나 바시즈와 유사한 성향을 보이는 곳도 여전히 있었다. 소도시 사람들은 국영방송에 대한 의존이 매우 심했기 때문이었다.

개혁파들의 투쟁과 아마디네자드의 등장

▲ 아크바르 하세미 라프산자니 ⓒ로이터=뉴시스
하메네이가 최고지도자로 임명된 후 아크바르 하세미 라프산자니가 이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바시즈와 혁명수비대가 추종하는 강경 노선의 위협을 눈치챘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최대의 권한을 차지하려는 강경파들의 시도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강경파들은 국민들 사이에서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여론을 조종해 라프산자니 대통령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당시 중요한 여론 전달 장소였던 이슬람 사원 모스크에서 상당한 힘을 발휘했다. 그들은 라프산자니를 비난하고 그와 그의 측근들이 돈세탁과 각종 부패에 연관되어 있다고 모함했다.

그에 따라 대척점에 선 두 세력이 확연히 생겨났다. 강경파들은 사법부를 장악하고 두 개의 군사조직을 거느렸다. 그들에겐 최고지도자와 일부 저돌적이고 영향력있는 성직자들, 유일한 국영방송 및 일부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다른 한편 라프산자니 측에는 항구적인 기반이 없었다. 대통령·의원직을 가졌지만 충분히 탄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국민 다수의 지지가 있었다.

라프산자니 대통령 시절 바시즈는 주로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국민들을 압박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저지하거나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을 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강경파의 독주에 지친 이들은 다음 선거에서 개혁파로 알려진 모하마드 하타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하타미는 8년 간 집권하면서 강경파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라프산자니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개혁성향의 언론사가 폐간되거나 국민들에게 불법적인 압력이 가해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강경파들이 벌이는 일들을 내버려둔 이전 정부와 달리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책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역효과만 낳았다. 강경파들이 개혁파들에 대한 복수를 목표로 힘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2005년 대선에서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의 대통령 당선으로 나타났다.

이란은 선거법상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1, 2위 득표자끼리 결선투표를 하게 되어 있다. 2005년 대선 1차 투표에서 7명의 후보가 나왔다. 누구도 아마디네자드의 이름을 몰랐다. 그는 출마 전에 테헤란 시장을 잠시 역임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너무나 충격적이게도 그는 1차 투표를 통과해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과 결선 투표를 치르게 됐다.

그의 경쟁자들은 1차 투표 과정에서 부정이 있었다고 믿었다. 이란에서 투표는 일반인들의 자원봉사로 이루어진다. 또한 투표 장소는 전통적으로 모스크나 학교인데 양쪽 모두 바시즈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따라서 바시즈는 전국의 많은 투표소에서 투표 과정을 쉽게 조종하고 결과를 조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무부 감독관들 중에도 강경파가 섞여 있기 때문에 이런 부정을 적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1차 투표에서 라프산자니는 아마디네자드보다 많은 득표를 했다. 하지만 결선투표에서는 아마디네자드가 깔끔하게 승리했다. 라프산자니에 대한 증오를 퍼트렸고 그 과실을 따먹은 것이다. 그는 라프산자니와 자신을 대조시키는 것만으로 간단히 선거를 이겼다. 라프산자니는 돈이 많고 기만적인 반면, 자신은 청렴하고 정직하다고 선전했다.

시린 에바디 노벨상 수여는 '헛발질'

아마디네자드는 테헤란 시의회가 선출한 시장이었다. 매우 저조한 투표 참여 끝에 꾸려진 시의회였다. 여기서 오늘날 이란의 반대파 세력의 특성을 알 수 있는데, 반대파들은 자신들이 던지는 표가 무의미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의 결정이 내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면 아예 투표장에 가지 않는다.

그들은 하타미가 대선 당시의 공약을 이행하지 못했다고 느꼈고, 그 뒤로 이어진 몇몇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형편없이 낮은 투표율로 구성된 시의회 덕에 테헤란 시장이 됐던 아마디네자드는 이란의 대통령이라는 터무니없는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테헤란 시장이 되기 전 아마디네자드는 아르데빌의 시장이었다. 그 당시 그는 라프잔자니에 대한 아부와 아첨을 일삼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금방 그것을 잊어버렸다. 이란에서 가장 강력한 매체인 국영방송은 완벽하게 아마디네자드의 편에 섰다.

또한 국민들은 지식인들을 환영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누구도 '아마디네자드는 최악'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란 국민들이 지식인들을 믿지 않게 된 건 서방의 언론과 정부들이 그들을 지원했던 타이밍이 부적절했기 때문이었다. 불행하게도 서방의 언론들은 이란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걸 절대 내버려두지 않았다.

▲ 200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 시린 에바디 ⓒ로이터=뉴시스
그들은 이란에서 여성 운동을 하던 여성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2003년 시린 에바디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일을 일컬음 - 옮긴이) 하지만 대중들은 그 소식에 기뻐하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이름을 들어본 이들이 없었을 뿐더러, 서방의 어떤 음모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입장에서 사태를 분석하기 마련이다. 이란 사람들에게는 그 여성이 명성을 얻었다는 건 이란이 인권 측면에서 발전이 더딘 나라라는 걸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단순히 말하자면, 이란의 여론이 지식인을 신뢰하지 않는 건 서방의 간섭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란 사회는 서방을 악마로 여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우리 일에 너무 쉽게 간섭한다. 서방이 뭐라고 말하건 이란 사회와 정부는 그들과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최악인 점은 서방의 간섭이 종종 성공했었고, 그 성공을 통해 우리가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테헤란 시의회 선거 당시의 낮은 투표율이 대표적인 사례다. 서방 언론들은 우리에게 정부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투표에 참여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란 사람들은 정부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걸 원치 않는다. 서방 언론들은 이런 식으로 아마디네자드의 집권을 사실상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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