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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은 이란인들에게 한 번도 정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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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은 이란인들에게 한 번도 정직하지 않았다"

[테헤란에서 온 편지]<上> 이슬람 혁명과 호메이니에 대한 존경

지난 6월 12일 이란 대선 이후 시작된 대규모 시위는 이란 군경과 민병대의 강력한 탄압에 의해 약 2주 만에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사망자는 최소 20명에서 최대 100명까지로 알려지고 있다.

시위대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투표용지를 바꿔치기 하는 등 각종 부정행위를 저질러 재선에 성공했다면서, 실질적인 승자는 개혁파 야당 후보 미르 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라고 외쳤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최대 규모였던 이번 시위는 표면적으로 아마디네자드 집권 후 더 심각해진 경제난에 대한 이란 국민들의 불만, 그리고 개혁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분출한 것이다.

그러나 이란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번 시위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던 까닭을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이란의 역사, 특히 이슬람 혁명 이후의 변화 과정, 그러면서 형성된 서방에 대한 극한 불신 등 다양한 요소를 살펴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의 언론들은 '민의를 저버린 신정체제와 민주·인권 세력의 대결'이란 단순 구도로 이를 보도했고, 한국 언론들 역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이란 대선 전 있었던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대(對) 이슬람 메시지 때문에 '오바마 효과'가 나타났다고 해석하는 매체도 있었다.

그러나 이란의 명문 테헤란대학에 다니는 한 학생이 <프레시안>에 보내 온 편지를 보면 그러한 설명은 이란의 정치 지형과 여론을 간과한 지극히 단순한 분석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시위에 참여했다고 밝히면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에 대해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이 학생은 이른바 '개혁파'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들이 말하는 개혁과 변화라는 게 서방이 희망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특히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란 정부에 비판적인 서방이 이번 사태에 사실상 '개입'하는 형국이 되면서 오히려 아마디네자드에게 힘을 실어줬다고 주장했다. 서방이 개혁세력을 응원했지만 정부의 탄압에 의해 무산된 게 아니라, 서방세력 때문에 개혁세력이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자비한 진압 때문에 시위가 수그러들었지만 이란 국민들의 가슴속에는 점점 더 큰 불만이 쌓여 가고 있다고 전했다. 이란 지도부가 향후 이러한 불만과 변화의 열망을 과연 어떻게 수용할지 주목된다.

영문으로 된 편지의 주요 내용을 세 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필자의 요청에 따라 실명은 밝히지 않는다. <편집자>


▲ 지난달 20일 대선 부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는 테헤란 시민들 ⓒ로이터=뉴시스

이번 이란 사태는 매우 복잡하다. 필자는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어떤 배경지식을 가지고 사태를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심층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1979년 이슬람 혁명의 지도자 아야툴라 호메이니 등장까지의 역사를 되짚어 봐야 할 것 같다. 이란은 역사적으로 알렉산더 대왕과 아랍 세력, 칭기즈 칸, 그리고 서방세력에 의해 4번의 큰 외침을 당했다. 앞선 3번의 공격에서는 재기할 수 있었지만, 영국을 주축으로 한 서방세력의 마지막 침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란과 서방의 접촉은 400여 년 전 한 포르투갈인에 의해 시작됐다. 포르투갈은 이란 남부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고, 당시 이란의 지배세력이었던 사파비 왕조는 그들과 협상을 해야 했다. 사파비 왕조 이후 이란(페르시아 왕국으로 불림)은 몇 개로 쪼개졌고 중앙집권은 무너졌다. 그 사이 영국은 이란에서 영향력을 키워 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200여 년 전 카자르 왕조가 나타나 이란 대부분을 통합했다. 하지만 초대 왕인 아가 모하마드 칸 이후 카자르 왕조는 곧 쇠락했다. 그는 정벌 중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 외에 별다른 업적이 없었다.

그의 죽음 이후 이란의 암흑기가 시작됐다. 카자르 왕조는 이란을 140년 이상 통치했고 왕들은 몇 가지 끔찍한 결정들을 내렸다. 영국, 러시아 등 외세의 힘에 여러 차례 굴복해 많은 땅을 양보했고, 이란의 보물을 수탈당했으며, 수치스러운 조약과 무역 협정을 맺었다.

왕가가 서방과 결탁할수록 국민 혐오감은 커져

80년 전인 1925년 카자르 왕조는 마침내 멸망하고 팔레비 왕조가 들어섰다. 팔레비 왕조의 1대 왕인 레자 샤는 전 왕조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는데,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 이전에도 의회가 있긴 했지만, 레자 샤 역시 의회제도 도입을 고려하면서 근대화를 신속히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민중들은 배제되었다. 국민들은 간혹 정부에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려 시도했지만 대부분 무위에 그쳤다. 레자 샤가 왕좌까지 가게 된 데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그의 능력이 한몫을 했다. 그는 일찍이 러시아가 파견한 군사고문단에 의해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다.

영국은 팔레비 왕조에서도 정치적 위상을 확고히 했고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레자 샤는 영국의 기대처럼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독일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영국은 그를 이란에서 추방했다.

레자 샤는 냉혹한 독재자였기에 국민들은 정부를 두려워했다. 또한 국민들의 교육 수준은 높지 않았고 전통적인 관념에 쌓여 있었다. 교육은 카자르 왕조 시대 수준에 머물러 대부분이 무지한 상태였다.

팔레비 왕조의 2대 왕 모하마드 레자 샤는 아버지 못잖은 독재자였다. 그는 이란의 근대화를 계속 밀어붙였지만 국민들이 원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갔다.

이 시절 영국의 영향력은 감소하고 미국이 그 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교육·정보 등이 확대되며 저항의 기운이 온 나라로 퍼져나갔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게 됐다. 지하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매우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를 기준으로 50여 년 전부터 영국은 이란에서 배타적인 석유 개발권을 획득했다. 이 계약은 영국과 카자르 왕 사이에 맺어진 것인데, 그를 통해 카자르 왕이 얻은 이득은 그가 유럽을 순방할 때 영국이 도움을 주는 것 정도의 사소한 보상이었다. 모하마드 레자 등 후대 왕에게도 영국은 비슷한 특권을 제공하면서 이란에서 사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이런 계약은 명백하게 이란의 국익에 반하는 것이었다.

지하 운동을 전개하던 이들은 석유사업을 국유화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 뜻을 받을 수 있는 총리를 선출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실패했다. 그 와중에 모하마드 레자 왕은 국외로 도망쳤는데,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그에게 권력을 되찾아줬다.

군부는 대중들에게 인기 있었던 총리(1951~53년까지 총리를 역임하며 석유사업 국유화에 압장섰던 무하마드 모사데크 총리를 말함. 쿠데타 이후 3년 형을 선고 받고 평생 가택연금을 당했다 - 옮긴이) 를 끌어내리고 감옥에 가뒀다쿠데타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의혹은 그로부터 50년 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미국의 개입을 시인하면서 입증되었다.(이 사건은 미국 중앙정보국 CIA의 첫 대외 공작으로 알려져 있다 - 옮긴이)

이란인들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 노력이 물거품이 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서방 국가들을 혐오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란 국민들에게 한 번도 정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야툴라 호메이니의 등장과 이슬람 혁명의 성공

2대 왕인 모하마드 레자 샤의 가장 중요한 정책은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란의 근대화였다. 하지만 그 방법은 이슬람교의 흔적을 없애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중대한 실수였다. 이슬람교는 억압된 권리를 되찾기 위해 이란 국민들을 결속시키는 단 하나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일이 터졌다.

▲ 아야툴라 호메이니 ⓒ로이터=뉴시스
아야툴라 호메이니는 반정부적인 종교·정치 강의 때문에 15년간 국외로 추방된 성직자였다. 호메이니의 리더십에 따라 시민들의 운동이 조직되어갔다. 왕과 총리들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러나 호메이니와 같은 종교지도자들과 국민들이 왕에게 요구한 것은 이슬람교를 공격하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이슬람을 계속 공격했고, 시민들의 운동 목표는 왕정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발생한 이슬람 혁명은 국민들조차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일어나버렸다. 미국은 충격을 받았고 많은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국민들은 호메이니의 리더십에 의해 가능한 일이었다고 여겼고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호메이니의 카리스마에 압도된 국민들은 혁명 후 들어선 정부 체제에서 호메이니가 '혁명의 지도자'라고 불리는 자리에 앉는 것을 가능케 했다. 새 헌법이 준비됐는데, 국민들이 총리와 의원을 선출하는 형태였지만, 최고 지도자는 그 모든 것 보다 높은 권한을 가지게 됐다.

호메이니는 지도자를 뜻하는 '이맘' 칭호를 받으며 혁명 후 새 정부 수립을 능수능란하게 이끌어갔다. 물론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1980년대 이라크와의 전쟁이었다. 팔레비 왕조의 폭정에도 살아남았던 혁명의 주역들이 국내적인 폭력 및 테러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죽어 갔다.

호메이니는 국민의 신뢰와 자신의 재능으로 혁명 이후 혼란기를 잘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명은 유한했고, 그의 죽음 이후 새로운 상황이 도래했다.

▲ 이란혁명 당시 이슬람 혁명수비대가 호메이니의 사진을 들고 행진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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