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목을 앞뒀지만 상인들은 좀처럼 웃지 못했다. 연말 화재 후 서문시장 4지구 기존 점포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대신 대형 펜스가 쳐졌다. 채 가시지 않은 매연 냄새와 폭삭 주저앉은 상가 건물은 여전했다. 설빔을 장만하고 차례상 물품을 사기 위해 시장을 찾던 이들의 발걸음은 눈에 띄게 줄었다.
설 연휴를 앞둔 23일과 25일 서문시장 4지구 펜스 앞. 상가명, 이전 장소, 전화번호 등을 알리는 형형색색 종이가 빼곡히 붙었다. 펜스 자물쇠 사이로 다 치우지 못한 상흔들이 폐허처럼 널려있다. 다행히 임시방편으로 점포를 연 상인들은 물건을 들이고 대목을 맞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형편이 어려운 또 다른 화재 피해 상인들은 화재 현장 인근에서 그대로 좌판을 펴놓고 노점 신세를 면치 못했다.
4지구 피해상인 곽모(46)씨는 23일 펜스 바로 앞에 좌판을 열고 물건을 팔아야 했다. 의류 소매업을 하던 곽씨는 당시 화재로 들여놓은 물건 대부분을 잃었다. 점포에 불이 꺼지고 남은 것은 불에 그슬거나 냄새가 나 팔 수 없는 옷가지들뿐. 곽씨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이맘때쯤이면 설빔을 사러 온 손님을 맞아야 하지만 점포와 물건이 모두 불에 타버려 4지구가 아닌 다른 창고에 있던 물건을 가져오거나 새로 물건을 들여야 했다. 더구나 거리에서 대목을 맞아 곽씨는 더욱 우울하기만 하다. 간혹 설빔을 사러 온 손님들이 있어 화색을 띠었지만 곽씨의 화재 사연을 들은 손님들은 사려던 물건의 냄새를 맡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곽씨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곽씨는 "손님에게 화재 이야기를 하면 꼭 냄새를 맡아 본다"며 "그럴 때면 너무 우울하고 속상하다"고 말했다. 또 "어쩔 수 없이 노점을 한 뒤로 손님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는 것 같다"면서 "점포에서 장사를 할 때는 1~2천원 깎아주는 게 다였는데 노점에 나온 뒤로는 5천원씩 아니면 더 많이 깎아달라고 한다. 설을 앞두고 있어 물건을 팔지 않을 수도 없고. 그냥 마진도 남기지 않고 팔고 만다"고 했다.
설 연휴를 이틀 앞둔 25일 아침 8시. 일찍 전을 펴는 상인들로 시장은 분주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하나같이 4지구 화재로 손님의 발길이 반 이상 줄었다며 울상을 지었다. '동2문' 입구에서 아침 7시부터 저녁 10시까지 매일 서문시장에서 50년간 과일을 팔아온 최재윤(76) 할아버지는 일찍 장을 나왔다.
그러나 손님들은 과일을 만져보다 그냥 전을 지나쳤다. 할아버지는 눈길 한 번 안주고 각자 바쁜 발걸음을 재촉하는 손님들의 뒷모습만 씁쓸히 쳐다봐야 했다. 애써 눈길을 돌려 불을 피워놓은 연탄통을 만지작거렸다. 대목을 기다린 그에게 마수걸이도 못하고 남은 과일들은 짐과도 같았다.
때문에 할아버지는 그날 다 팔지 못한 과일을 시장의 다른 힘든 이들에게 공짜로 나눠줘버리고 만다. "하루 종일 팔아도 마수걸이도 못하고 너무 어렵다. 참 속상하지. 그래도 어떻게 물건을 그냥 쓰레기통에 버릴 수도 없고. 손님이 절반 줄어버렸는걸…" 할아버지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시장의 젊은 상인들도 줄어든 손님에 속상해했다. 박선옥(38)씨는 지난해 겨울부터 서문시장에서 군고구마를 팔고 있다. 4지구에 몰린 다른 먹거리 코너들과 함께 한 겨울에 대목을 누렸지만 이번에는 설을 앞두고도 파리만 날리고 있다. 박씨는 "4지구의 먹거리 때문에 온 손님들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점포들이 없어져 장사가 잘 돼지 않는다. 다른 음식을 팔아야하나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프레시안=평화뉴스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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