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일본제국에 부역한 자들을 청산하려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는 무참히 와해되었고, 친일 세력은 세계경찰인 미국으로 그 지지기반을 옮겨 반세기 넘게 나라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당연한 이런 언급을 국정 역사교과서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현 정권이 굳이 국정 역사교과서를 비공개로 추진할 이유가 없다.
21세기인 지금도 역사의 한 부분을 지우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사회가 친일부역과 군사독재의 역사를 미화한 국정 역사교과서의 등장을 우려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윗 문장의 정당성을 보여준다. 여전히 논란 중인 건국일 논의도 그 점에서 다르지 않다.
1945년 2차세계대전의 종식으로 얻게 된 해방은 미군정을 이 땅에 들여왔고, 이들의 지지를 얻은 친미 세력은 그동안 헌신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온 임시정부 측 인사에 대한 궤멸 작업은 물론, 친일 세력과의 잡종 집단을 형성해 우리사회의 기득권층을 만들었다. 그 폐해가 반세기 지나도록 진행 중인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2016년 12월, 200만이 넘는 촛불 시민들의 함성으로 대통령은 탄핵되었고 이제 국무총리 대행체제다. 즉각 퇴진을 요구하던 많은 시민들은 탄핵으로 대통령의 비정상 행보와 국정 농단 상황을 멈추게 했다면서 조금은 안심하며 하루 속히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이뤄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특히 제왕적 대통령으로서의 박정희 망령을 우리사회에서 불식시킬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방 후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미국과의 일본 패전으로 얻은 해방의 결과는 반세기 넘도록 한반도 고통의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탄저균 등의 생물무기 관련 주피터 프로그램의 일방적 이식이나 사드 배치 논란을 보자. 자국의 전시작전권도 없으며, 수도 내에 외국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 통치처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일상에 스며든 은밀한 형태로 그것은 여전히 우리를 구속하고 있다.
사이비 교주 일가와 허수아비 추종자의 국정 문란 상황이 이번 촛불 사태를 불러 일으켜 대통령 탄핵까지 이룬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권력 사유화에 대한 이번 촛불이 시민이나 야권의 힘만으로 촉발되어 이뤄진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번 상황은 차기 정권에 대한 주류 기득권층 사이에서의 갈등이 시초였다. 네이처 리퍼블릭이라는 한 회사의 비리로 비롯된 일련의 상황은 재벌 기업인 롯데그룹 수사로 이어졌고, 여당 내부와 재벌 간의 불협화음으로 표출되어 결국은 청와대와 조선일보 간의 힘겨루기로 발전했다. 심지어 한겨레의 최순실 보도마저 묻히는 상황이었다. 과거에도 그랬듯 최순실 관련된 모든 것들이 다시 묻혀 종료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늘 함께 하던 청와대로부터 부패언론이라는 비난과 더불어 일방적으로 무릎을 꿇었던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종편 JTBC는 최순실과 박근혜 사이의 유착과 이로 인한 국정 문란을 대중 앞에 적나라하게 던짐으로서 결정적으로 200만 촛불을 광장에 나오게 했다.
돌이켜보면 해방을 우리 손으로 이뤄내지 못한 결과로 우리는 친일 부역자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동족상잔과 국토 분열은 물론이고, 냉전시대가 끝난 지도 오래건만 지구상 유일한 구시대 냉전 산물로 한반도 분란은 지속되고 있다. 친일 부역자를 청산하지 못한 인과응보로서 다양한 방면의 막대한 피해를 스스로 몇 세대에 걸쳐 안고 간다.
대통령 탄핵이 처음부터 국민의 자각과 야권의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보수 기득권층의 갈등으로 인한 결과라는 점에서 역사의 가르침을 충분히 새겨볼 이유이다.
어찌 보면 탄핵이 진행되는 지금, 가장 바쁜 집단은 기득 보수 집단이다. 최순실-박근혜 사건이 그들의 차기 국정 권력 갈등 중에 노출될 상황이었다면, 대통령 탄핵과 그 일당들의 몰락은 비록 기득권 집단 내에서 예상했던 구체적 모습은 아닐지라도, 정국의 흐름으로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예상을 넘은 국민 촛불 규모에 당황하기는 했겠지만 어차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던져버리기로 한 그들의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롯데그룹 수사가 진행될 때, 이명박이 차기 정권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다고 호언했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 이명박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보도된 바도 있다. 그리고 이제 국내에서는 반기문 씨를 중심으로 새로운 민주국가를 재건하자는 창당 움직임까지 등장했다.
살펴본다면 촛불 상황의 발단과 마찬가지로 탄핵이 끝난 지금, 역시 시국의 흐름은 여전히 보수 기득권이 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안검사 출신이자 극보수 특유의 각종 행보를 보였던 황교안이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임무 대행을 하면서 보수 일색의 학계·언론계 인사들과 오찬간담회를 비공개로 하는 등,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부역자가 부역자 청산 과정에 실질적 주역을 와해시킨 과거 반민특위의 비극이 상기되는 지점이다.
반민특위가 어떻게 무너졌고, 그 척결 대상 부역자들의 움직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역사는 말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낸 결과가 아닌 상태에서 그런 상황을 연출할 수 있었던 기득권자들의 농간이란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그들의 권력 싸움 중에 던져진 그들 나름의 희생양에 민중의 시선이 한정된다면, 초등학생까지 광장으로 나왔던 200만의 순수한 민심이 또 다시 이들의 연출 속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될 지도 모른다.
사이비 교주에 물들은 박근혜라는 낡은 독재자의 딸을 청와대 뒷방으로 보냈다고 한 숨 돌릴 때가 위험하다. 국가권력의 사유화로 요약되는 박근혜는 부정부패 기득권 세력의 상징이었을 뿐, 그들의 실체는 전혀 바뀐 것이 없다. 눈에 명확히 보이던 목표가 탄핵으로 전면에서 물러나면서 구체적 비판 대상이 사라지는 효과 속에 결과적으로 확실히 청산해야 할 실체를 잃어버리는 악재가 된다.
세월호와 관련된 국회청문회에서도, 시급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보다는 국가 기밀을 일반인에게 넘기고 재벌과의 거래나 신경 쓰던 무능한 대통령의 진료나 미용시술에 집중하는 황당한 상황마저 연출되고 있다. 이미 탄핵된 대통령의 사적 무능이나 편법 여부를 밝히기보다는 세월호 참사 시의 국가 재난 구조 체제의 문제점과 국정원 연루 의혹 등의 규명이 더욱 필요하다.
기회주의자들인 부역 집단도 이틈에 국정 문란의 책임은 남의 일인 양 미사여구와 함께 개혁을 외칠 것이다. 더욱이 부역의 최전선 황교안이 국정 운용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 점에서 정작 권력 사유화와 남용 및 검찰과 재벌 등의 기득 세력이 보여준 국민 우롱에 대한 촛불이 단지 박근혜나 관련 인물 몇몇에 대한 분노에 그친다면 기득보수집단에 의한 제 2, 3의 국정 농락 박근혜 분신은 또 다시 등장한다.
급변하는 국제 상황과 더불어 나라 안의 근심과 밖의 재난이라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는 고사성어가 새삼 절실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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