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목하 진행중인 시민민주혁명을 시공간을 확장하여 조감해 보면 어떨까? 역사적인 시간축과 지정학적 공간축으로 시야를 넓혀 살펴보는 것이 오늘의 대 변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민주공화국을 위태롭게 하는 세력과 가치를 청산하고자 하는 것이 현재의 시민항쟁인데, 눈을 넓혀 보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동아시아는 아직도 파시즘세력이 주류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된다.
동아시아 파시즘 역사는 그 뿌리가 깊다. 한반도 안팎을 지배하고 있는 파시즘은 박정희 파시즘과 김일성 파시즘, 그리고 원조로서의 일본 파시즘으로 크게 대별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반파시즘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서 파시즘은 여전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20세기의 악령으로 끝나지 않고 21세기의 오늘에도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3개 파시즘의 역사적 연원과 상호관계를 추적해보자.
동아시아 파시즘의 원조는 천황제를 모태로 한 일본 파시즘이다. 이들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서구적 근대화를 단행한 이후 군사력으로 조선반도 → 만주 → 중국 본토 → 아시아 전역으로 침략전쟁을 무한대로 확장하다가 마침내 2차대전에서 패배함으로써 일단 제동이 걸렸다.
일본 파시즘은 일본 국민들로부터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일본민족의 신화와 국가주의 사상이 절묘하게 결합된 황도와 국체라는 개념들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황도는 천황 신화에 의거하여 아마테라스 제1대 진무(神武)천황으로부터 내려오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통을 계승하고, 황조신(皇朝神) 아마테라스의 "신령"을 이어받은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을 숭배하는 사상이다. 국체는 천황이 다스리는 영원불멸의 신성한 국가, 즉 신국(神國)을 의미하였고, 일본 국가와 민족의 우월성과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는 관념이다. 또한 국민들로부터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유교적 덕목과 조상숭배의 전통을 결합시켜 "가족국가관"을 도입하였다. 가족국가관은 일본사회 전체를 천황을 본가로 하는 하나의 대가족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천황과 국민의 관계는 정치적 위계질서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으로 결합된 것이었다. 1937년 일본 문부성에 의해 발행된 『국체의 본의』(國體의本義)에 따르면, 천황을 아버지로 두는 가족국가인 일본에서는 신민이 천황을 섬기는 것은 의무와 힘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심정의 발로이며, 충은 천황에 절대 순종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나인호·박진우, 2005. "독재와 상징의 정치: 나치즘과 일본 파시즘의 정치종교" 201-202쪽. 임지현·김용우 편, <대중독재2: 정치종교와 헤게모니> 책세상)
그런데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점령군 미군은 일본 파시즘을 해체하기보다는 오히려 점령통치에 활용하였다. 전범처벌과 재벌해체 등 일부 개혁조치는 수행했지만, 군군주의 일본의 핵심 인맥과 기반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미국이 동아시아 패권 유지의 파트너로 일본 군국주의를 선택하는 바람에 이후 일본에서는 군국주의의 후손들이 공공연하게 일본 파시즘을 찬양하고 다시 부활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패전국이 된 독일은 파시즘에 대한 철저한 청산과 피침략국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를 통해 새로운 유럽을 건설하는 데 주역이 되었다. 반면에 일본은 파시즘의 청산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전쟁영웅으로 부각하고, 진정성없는 사죄로 동아시아에 항상 갈등의 불씨를 던지는 국가가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남한과 북한에서 탄생한 파시즘은 일본 파시즘의 직간접적인 영향하에서 태어난다. 한반도의 파시즘 역사에서 1972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해다. 1948년 2개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쪽은 민주공화국, 북쪽은 인민공화국을 내걸었다. 그런데 24년간의 세월이 흐른 뒤 남북 공히 파시즘 체제로 넘어가게 된다.
남한의 박정희는 두번째 쿠데타를 통해 자신의 영구집권을 가능케 한 파시즘 체제를 구축하였다. 자신의 독재체제를 '10월 유신'으로 명명함으로써 일본 파시즘과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공언하였다.
박정희 독재체제는 그 이념이나 가치관, 사람과 제도에 있어서 일본파시즘을 완벽하게 계승하고 모방한 체제였다. 그는 이것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불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한국적 파시즘'이었다.
북한 역시 주체헌법을 선포하여, 북한이 인민공화국에서 수령왕조로 전환했음을 공식화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신하여 주체사상이, 노농계급의 전위당을 대신하여 수령이 온 사회를 지배하는 시스템이 되었다. 백두혈통(황도)과 수령국가론(국체)에 입각한 북한 파시즘은 천황제보다도 더 천황제스러운 파시즘 체제라 볼 수 있다. 일본의 천황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지만 북한의 수령은 군림하면서 통치하는 신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
이와 같이 1972년을 기점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위로부터의 파시즘이 공고하게 구축되었다. 3개 중에서 그나마 약한 고리는 박정희 파시즘이었다. 독재체제하에서도 대안세력이 존재했었기 때문에 유신체제가 선포될 즈음해서 박정희 파시즘에 도전하는 민주화운동이 본격 태동하였다. 김대중-김영삼이 이끄는 민주화운동 세력은 잔혹한 파시즘 폭력하에서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하여 마침내 1987년 6월항쟁의 승리를 이끌어 냄으로서 남한 사회를 파시즘 세력과 민주주의 세력의 경쟁국면으로 전환시켰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를 얻어내지 못했다. 민주화 세력의 분열로 군부독재세력의 재집권을 허용하는 실책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정 질서는 회복하였으나 군사독재 세력의 후신이 내용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불완전한 민주주의 사회가 되어 버렸다.
남한의 민주화운동 세력은 이후 파시즘 세력과의 제휴(3당합당)와 연합(DJP연합)을 통해 집권하였으나 파시즘 체제의 근본적 청산을 이룰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남한에서 민주주의 세력과 파시즘 세력이 치열하게 투쟁하는 와중에 주변의 파시즘 세력들은 부단히 자신들의 세력과 영향력을 남한 땅에 심으려고 집요하게 노력하였다.
김일성 정권은 남한 땅에 김일성 파시즘을 이식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지하당 구축에서부터 무장군대의 남파까지 시도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다 한때 그의 꿈이 거의 실현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까지 간 적도 있었다. 남한에서 민주화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80년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김일성주의를 추종하는 이른바 주사파가 다수파를 형성했던 것이다. 80년대 급진적인 반체제운동의 사상적 기초는 김일성주의 아니면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역사에서 판명났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전체주의 사상이었으며, 시대착오적인 조류였다. 민주화운동에 깊숙이 스며든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는 이후 남한의 민주화운동에 큰 질곡으로 등장했다.
남한 민주화운동에서 주사파가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체사상을 본격적으로 남한에 도입한 당사자(이른바 자생적 김일성주의자)들에 의해 폭로되었다. 김일성을 직접 만나고 '주체천국'의 현실을 목도한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착오를 깨닫고 전향을 결심하고 모든 내막을 고백하였다. 문제는 이들이 철학적 사유와 운동의 성찰적 방식으로 주사파라는 파시즘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한 쪽의 파시즘에서 다른 쪽의 파시즘으로 건너뛰는 방식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남한 민주화운동에 주사파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이후 남한사회의 보수-진보 갈등을 격화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북한 파시즘에 대한 본질을 규정하는 것과 그들을 평화적 통일의 대상으로 통일외교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서로 다르면서도 통합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북한 파시즘은 인류의 보편적 정의 차원에서 용납되어서는 안될 권력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6.25전쟁 같은 참혹한 전쟁이 재발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평화적 통일의 대상이기도 한다. 이 모순적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에 관한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남한에서 김대중·노무현 10년 민주정권이 탄생하자 남한의 파시즘 세력은 본격적으로 이념적인 대응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는 종북몰이나 지역주의 정치전략이 그들의 전가의 보도였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 극우 파시즘 이론을 한국에 적용한' 이른바 뉴라이트 운동이 조직적으로 출현하였다. 박정희시절에는 일본이 일본파시즘을 한국으로 이식시키는 인큐베이터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뉴라이트 운동은 박정희파시즘에 이론적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자임하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뉴라이트의 핵심인물들 다수가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할 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종했던 무리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90년대 소련 등 사회주의 몰락 이후부터 전향을 준비하면서 일본 극우파의 논리에 매료되었다.
천황제 파시즘과 대동아공영권의 비전, 그리고 식민지배의 정당성에 사로잡힌 이들의 주장은 박정희 세력의 다수를 점하는 친일파와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수용되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을 거치면서 일본과 남한의 파시즘 세력이 결합한 뉴라이트는 정치·외교와 역사해석의 전 영역에 걸쳐 끊임없이 도발을 되풀이 했다. 최근의 국정교과서 파문이나 한일 군사정보공유 움직임은 그 절정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몰락은 박정희 때부터 쌓아온 남한 파시즘 체제가 드디어 무너지는 전주곡에 해당한다.
2016년 11월부터 대한민국을 달구고 있는 촛불시민혁명은 내외의 파시즘에 대한 극복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항쟁이 진전되면서 우리는 자유와 평등, 평화라는 민주공화국의 근본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아직도 파시즘이 주류행세를 하는 동아시아에서 한국만이 파시즘의 극복을 지향하는 시민민주혁명의 길을 걷고 있다. 이 시민혁명이 결실을 맺어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의 보루가 된다면 동아시아에 평화와 번영의 기운을 높이는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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