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인 최순실 씨에게 돈을 줬다. 따라서 박 대통령과 삼성에게 뇌물죄를 적용해야 한다.
여기엔, 쉬운 길이 있다. 하지만 국회는 굳이 어려운 길로 방향을 잡았다. 정치권이 '삼성 봐주기'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대통령은 돈 받으면 바로 뇌물죄
대통령에 대한 뇌물죄 적용은, 여느 공무원과 다르다. 대통령은 특정인 혹은 집단에게 포괄적인 방식으로 이권을 제공할 힘이 있다. 따라서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불법적인 돈을 받았다는 점만 입증하면, 뇌물죄가 성립한다. 요컨대 '대금 결제' 관련 내용이 중요하다. 보통의 공무원에 대해선 '이권 제공' 내용을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것과 다른 지점이다.
1997년 대법원 판례 역시 "대통령에게 금품을 공여하면 바로 뇌물 공여 죄가 성립하고, 대통령이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지 여부는 범죄의 성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라고 돼 있다.
'대금 결제' 관련 조사가 더 중요
문제는 지금 진행되는 논의가 주로 '이권 제공'에만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대금 결제' 관련 항목은 곳곳에 구멍이 나 있다.
'이권 제공' 관련 논의는,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당시 삼성물산 대주주였던 국민연금공단이 손해를 무릅쓰고 찬성한 점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당시 합병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전자 지배력을 확대하는데 필요한 절차였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정부가 국민연금에 압력을 넣었다는 의심이 있다. 이런 의심을 입증하려면, 기업 가치 평가 및 합병 방식 등을 둘러싼 다양한 논점을 다뤄야 한다.
반면 '대금 결제' 관련 내용은 상대적으로 논점이 간명하다. 삼성 금고에서 꺼낸 돈이 최순실 씨 측에게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당사자들이 입을 열면, 사실 관계가 잘 드러난다.
요컨대 '대금 결제' 쪽이 '이권 제공'에 비해 논점도 간결하고, 입증에 따른 효과도 크다.
"장충기 안 부르는 국정 조사, 왜 하느냐?"
하지만 지금 진행되는 '최순실 국정 농단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 조사 청문회'에선 '대금 결제'와 관련한 증인들이 배제됐다.
'대금 결제', 돈을 준 행위와 관련해서 누구를 불러야 하나. 우선 장충기 삼성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삼성의 '대외 협력' 업무를 오랫동안 총괄해 왔다. 권력층과의 인맥 관리를 담당했다는 뜻이다. 최순실 씨 일가에 대한 지원 역시 그가 지휘했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여야 정당은 한때 장 사장을 증인으로 채택하기로 합의했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론 배제됐다. 이에 대해 박영선 의원은 "삼성 요청이 있었느냐"라며 격렬히 항의했다. 박 의원은 "(삼성이) 김종중 삼성 미래전략실 사장과 김신 삼성물산 사장을 부르는 대신 장충기 사장을 빼달라고 했다고 밖에는 해석이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장 사장의 증인 채택이 무산된 뒤 "삼성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라며 "그런 국정 조사를 무엇 하려고 하느냐"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정유라 그리고 하나은행이 빠졌다
그리고 최순실 씨의 딸인 정유라 씨가 있다. 정 씨는 삼성이 준 돈을 실제로 쓴 사람이다. 하지만 정 씨 역시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는다. 만약 정 씨가 국회의원들 앞에 나타났다면, 삼성을 통해 받은 100억 원대 돈을 쓴 방식에 대해 캐물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이 무산됐다.
앞서 돈을 건넨 쪽과 쓴 쪽을 거론했다. 그 중간 고리 역시 조사해야 한다. 바로 하나은행이다. 그러나 하나은행 관련자 역시 증인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하나은행은 최순실 씨 일가 재산의 해외 도피를 위한 자금 세탁을 했다는 의혹이 있다.
아울러 삼성이 최 씨 측에 돈을 건넨 경로 역시 삼성의 거래 은행인 우리은행 삼성타운 지점에서 하나은행 프랑크푸르트 지점으로 송금된 뒤 몇 개의 독일 현지 은행 계좌로 쪼개진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이런 과정에서 핵심 실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 전(前) 하나은행 독일법인장이 올해 초 인사에서 특혜 승진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었다. 삼성이 최순실 씨 일가에게 돈을 준 과정에서 하나은행이 한 역할은 중요도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다.
참여연대 "벌써 '삼성 봐주기'인가?"
요약하면, 이렇다. 돈을 건넨 지휘자인 장충기 사장, 돈을 쓴 사람인 정유라 씨, 돈을 전달한 하나은행 관계자 모두 증인으로 불려나오지 않는다. '대금 결제'에 주목하는 게 대통령에게 뇌물죄를 적용하는 쉬운 경로인데도 말이다.
참여연대가 5일 논평에서 이 문제를 거론했다. 참여연대는 "이재용-정유라-하나은행 커넥션에 대한 국정 조사와 특검 수사 촉구"라는 논평에서 "정치권이 벌써부터 삼성 봐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참여연대는 앞서 거론한 '이권 제공'에 대해선 '박근혜-이재용-국민연금 커넥션'을 지적했다. '대금 결제'와 관련해선 '이재용-정유라-하나은행 커넥션'을 거론했다. 둘 다 제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참여연대는 "박근혜-이재용-국민연금 커넥션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국민연금 관계자의 출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국회 국정 조사 특위는 박영선 의원 등 일부 의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 때 국민연금 관계자의 출석을 뒤로 미룬 바 있다"고 밝혔다.
"'이재용-정유라-하나은행 커넥션', 삼성 영향력이 국정 조사 왜곡"
'이재용-정유라-하나은행 커넥션'에 대해 참여연대는 "당초 증인 명단에까지 있었던 장충기 사장을 최종 단계에서 제외한 것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며 "증인 채택의 실무를 담당한 여야 간사 의원(새누리당 이완영 의원,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 국민의당 김경진 의원)이나 위원회 전체의 운영을 맡고 있는 위원장(새누리당 김성태 의원)이 과연 삼성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상태에서 공정하게 이번 문제를 처리한 것인지"에 대해 따져 물었다.
장충기 사장이 증인 명단에서 배제된 데 대해 참여연대는 "삼성의 영향력에 의해 정상적인 국정 조사 절차가 왜곡된 것"이라고도 했다.
아울러 참여연대는 "국회는 즉시 장충기 사장과 정유라 씨를 국정 조사대에 세워서 관련 사실을 조사하고, 특검은 정유라 씨를 강제 송환한 후 자금 세탁 혐의와 외국환 거래법 위반 등 범죄 행위에 대해 삼성, 정유라 및 하나은행 관련자를 철저하고 신속하게 수사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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