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게이트를 보도하는 외신들의 키워드는 '샤머니즘'이다. 현대적 통치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는, 주술사의 국정 개입 사건으로 묘사한다.
우리도 놀랐다. 박정희, 박근혜로 이어진 박 씨 일가와 최태민, 최순실로 이어진 최 씨 일가의 40년 넘는 인연이 나라를 이토록 말아먹었으니 '망령 정치'란 말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하지만 미국의 활동가이자 작가, 교사인 K.J. 노(Noh)는 이 해괴한 스토리를 한국적 특수성으로만 단순화하지 않는다. 독재 체제의 본성에 이미 주술적 요소가 깃들어 있으며, 신자유주의의 모순도 세련된 주술로 본질을 감춘 채 작동한다는 주장이다.
박정희가 만주국을 모델 삼아 한국 사회에 이식한 '박정희 프레임'이 딸 박근혜의 시대에 극단적 부조리로 표출된 점은 아이러니다.
그는 "자본주의라는 시체에 기생해 살아왔던 구더기들이 만천하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최순실 파문을 정의한다. 아울러 한국이 독재 체제의 좀비들을 청소하고 '자본주의의 주술'에서 벗어날지 여부는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이 같은 주장과 함께 박정희 독재 체제부터 비롯된 최순실 게이트의 전말을 소상히 담아 <줌인코리아>에 게재한 K.J. 노의 칼럼 전문을 번역해 싣는다. (☞원문 보기 : South Korea’s Shamanic Influence-Peddling Scandal: The mystical underbelly of Korean fascism)
한국의 비선 실세 스캔들 : 한국 독재 체제의 급소 '주술'
미신이 독재 정치에 필수 요소는 아니지만, 독재자들은 종종 주술을 동원한다. 정치적 폭력을 휘두르며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독재자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양심의 가책을 정신적으로 망각하기 위해, 그리고 국민들에게 유혈극이나 고통을 안겨준 업보에 따른 처벌의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서다.
무솔리니 치하 이탈리아 국민들은 그들 나름의 독재 체제에 대한 신화를 창조했다. 나치도 주술적 상징과 의식을 행하며 신화에 사로잡혔고, 쇼와 시대부터 아베 신조 체제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결코 변화할 줄 모르는 역사 수정주의적 극단적 군국주의자들도 일종의 주술적,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다.
한국 독재 체제의 변모 과정에도 종교단체와 주술, 선지자를 자칭한 사기꾼들이 개입했다. 대표적인 이가 통일교를 창시한 문선명 목사다. 그는 박정희 정부 및 중앙정보부(KCIA)와 결탁해 미국 정계에 대해 악명 높은 로비 활동을 벌였다.
최근 들어 한국 독재 체제의 주술이 다시 살아났다. 강남 갑부인 샤먼과 승마 선수 딸, (고 육영수의) 망령이 전했다는 해괴한 메시지, 조잡한 의상 제작 등…. 이건 가장 끔찍하고 저급한 이야기다.
피, 섹스, 그리고 죽음
전직 일본 제국의 관동군 포병 장교 다카키 마사오(혹은 오카모토 미노루)가 한국군에서 고위급으로 승승장구하던 때가 1961년이었다. 그는 한국군 장성이 됐다. 한 해 전인 1960년, 미국이 세운 꼭두각시 학살 정권의 대통령 이승만은 국민적 저항에 떠밀려 하야했다. 무능한 독재자였던 이승만은 자기를 대통령으로 만든 미국으로 꽁무니를 빼고 하와이에서 타락한 여생을 보냈다. 이 정치적 진공 상태에서 다카키 마사오(오카모토 미노루), 즉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기획했다. 1년 뒤, 그는 한국의 새 대통령이 됐다. 미국이 케네디, 존슨, 닉슨 정부를 거치는 동안 한국 대통령으로 재임한 그는 유신 개헌을 단행하기도 했다.
'검은 선글라스와 항공 점퍼'로 상징되는 박정희는 비정상적인 야망을 품고 폭력을 휘두르며 철권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는 한국에서 강력한 의지와 유능하고 청렴한 관료들을 통해 황폐해진 나라의 경제 발전에 시동을 건, 시대의 영웅으로 추앙된다. 하지만 박정희가 추진한 '경제 기적'은 그가 복무했던 일본군 점령의 만주국을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을 장악한 경제개발부 차관 기시 노부스케는 군대식 노동 통제, 독점적 기업국가, 성 노예 산업화, 절대적인 계획경제를 추진해 (국가가 국민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죽음의 국가(necropolitical state)'라는 기괴한 결과를 낳았다.
박정희는 기시의 이런 정책들을 배워 만주국과 유사한 방식으로 한국의 경제 개발을 추진했다. 이는 자주 노선으로 실질적 경제 기적을 이룩한 북한의 사례에 대항할 이른바 '자유세계'의 경제 개발 사례를 원했던 미국의 필요와도 맞아떨어졌다. 미국은 아프리카 대륙 전체보다 더 많은 원조를 한국에 퍼부었으며, 박정희가 병영국가, 노동집약형 공단, 사창 산업 등 제멋대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도록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정희는 총으로 억눌렀으나, 이는 강한 증오와 반대, 저항을 유발했다. 고문과 테러, 유혈사태가 그 시절의 질서였다. 피범벅이 된 이들이 한국의 '기적'을 가능케 한 토양이 된 셈이다.
1974년 8월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에게 앙심을 품은 한 재일교포(문세광)가 박정희의 연설 도중 저격을 시도했다. 박정희는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박정희 뒤에 앉아있던 부인이 총탄을 맞았다. 기념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저격범은 진압됐고 퍼스트레이디의 주검은 식장 밖으로 들려나갔다. 박정희는 연단으로 돌아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선 한 치의 동요와 주저도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설을 이어갔다. 이러한 박정희의 행동이 초인적 극기인지 사이코패스 같은 행동인지를 놓고 역사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은 논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 기록은 후자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날 이후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22년을 온실 속 화초로 자란 어린 대학생이던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로 혼란과 두려움과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자칭 불교 승려였다가 기독교 목사였다가 마침내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된 최태민은 죽은 육영수의 메시지를 전해 줄 수 있다며 박근혜에게 접근했고, 박근혜는 그를 멘토로 삼아 오랜 관계를 지속했다.
몇 년 후 박정희 대통령도 시해됐다. 성적 일탈을 위한 비밀 안가에서, 두 명의 젊은 여인들(대학생과 가수)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였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최태민 문제를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다 분위기가 험악해졌고,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부모의 잇단 비참한 죽음을 본 박근혜는 아버지의 측근들은 물론이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곳으로 보였다. 그녀가 내면으로 움츠러들수록,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 등 극소수 측근들에게 의존했고 이러한 관계는 최근까지 지속됐다.
한국의 라스푸틴
1970년대 들어 최태민은 영혼합일법을 깨달았다며 난치병 말기 환자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수가 추앙하는 신앙요법으로 사이비 교단을 만든 그는 근근이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많은 아이들을 낳았다.
'영원한 세계의 종교'라는 의미의 영세교, 혹은 '영원한 삶의 종교'라는 의미의 영세교를 만들어 기독교, 불교, 천도교를 종합했다고 주장했다. 불교의 열반, 기독교의 성령 강림, 천도교의 인내천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미륵, 살아 있는 부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절대적인 존재와의 영매를 추구했던 것 같다. 육영수가 저격된 후, 최태민은 박근혜에게 여러 통의 위로 편지를 보냈다. 그중 한 통의 편지에서 그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 근혜에게 이런 뜻을 전해 달라'고 했다"고 썼다.
1975년 3월 마침내 박근혜는 최태민을 만났다. 기록에 따르면 최태민은 육 여사의 목소리와 버릇, 말투를 흉내 내는 등 육영수의 영매 노릇을 했다. 이런 식으로 최태민은 청와대의 이너서클에 진입했다.
박근혜와 인연을 맺은 지 오래지 않아 최태민은 애국 재단을 표방하는 '구국봉사단'을 설립하고 박근혜에게 명예총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구국봉사단은 이후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꾸는 등 박정희가 추진한 새마을 운동의 파생단체였다. 박근혜가 정치 경험을 쌓은 곳, 최태민의 딸 최순실과 친분을 맺은 곳, 최태민의 꼭두각시가 된 곳이 바로 구국봉사단이었다.
새마음 재단은 독직과 뇌물, 비리의 온상이었지만 박근혜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75년부터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 10월 26일까지 박근혜가 공식석상에 나타난 137번 중 64번은 최태민과 함께 자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태민과 함께 있는 박근혜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육체적 관계를 맺었느니, 내연 사이라느니, 아이가 있다느니 등 수많은 미확인 소문이 퍼졌다. 박근혜의 첫 번째 책 <새마음의 길>은 최태민의 생각을 담은 연설집으로, 50만 권이 팔렸다.
결국 이 은밀하고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스캔들이 박정희의 노여움을 샀다.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조사한 박정희가 '최태민을 내치고 청와대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도 있다. 박근혜는 울면서 최태민에 대한 선처를 빌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희도 시해됐다. 박정희의 충복 전두환 장군이 새로운 독재자가 됐다. 전두환도 최태민을 재조사해 6개월 동안 그를 전방 군부대에 보냈다. 그 때도 박근혜는 최태민에 대한 선처를 청원했다고 한다. 라스푸틴처럼, 최태민은 9개의 목숨을 가졌던 것 같다.
샤먼의 딸
1989년 박정희의 둘째딸(근령)과 아들(지만)은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최태민이 가족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고 경고하는 내용의 12페이지의 청원서를 썼다. "최태민이 언니에게 교묘히 접근해 언니를 우리에게서 격리시키고 고립시키려 하고 있다. (…) 이번 기회에 언니를 구출해내지 못하면 언니는 영원히 최 씨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그의 장난에 희생되고 말 것이다."
청원서의 성과는 없었다. 박근혜는 결국 형제자매와 완전히 멀어졌다. "목사님은 암흑의 시대에서 나라를 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최 목사가 나를 정신적으로 도왔고 안정시켰다"면서 최태민에게 여전히 의존했다. 최태민은 1994년 끝내 죽었지만, 그의 교리는 영매적 기질을 물려받았다는 다섯째 딸 최순실로 이어졌다. 최순실의 남편 정윤회는 정치 무대에 돌아온 박근혜의 최측근 보좌관으로서 의정활동과 대선 레이스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아직도 박근혜와 최 씨 일가의 관계에 대한 수많은 소문이 나돈다. 첫 번째로 대선에 도전했던 2007년, 주한 미국 대사관은 외교전문을 통해 "최태민 목사가 박근혜의 인격 형성기에 심신을 완전히 지배했고, 그 결과 최태민의 자식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다"고 썼다.
2012년 박근혜는 대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훗날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에 힘입어 당선된 것으로 밝혀졌다. 군은 사이버사령부를 동원해 인터넷 공간에서 경쟁 후보를 비방하고 박근혜를 최대한 띄웠다.
이렇게 간신히 대통령에 당선된 박근혜는 통합진보당 소속 정치인들을 체제전복을 기도한 불순분자라고 트집을 잡아 감옥에 보냈다. 기자들이 해직되고 노동운동가들이 수감됐다. 민주주의가 억눌려 박정희 독재 시절로 후퇴하는 동안 나라는 온갖 재난에 휘청거렸다. 박근혜가 2007년 하버드대의 케네디스쿨 연설에서 한 약속, 즉 신자유주의와 시장주의 맹신이 기본 질서가 됐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예측가능성이 모조리 무너져 내렸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쓰일 수백 톤의 철근을 과적한 여객선이 갑자기 전복된 (세월호) 사건이다. 수학여행을 떠난 300여 명의 학생들이 침몰하는 배에 갇혔다. 7시간 동안 재난 본부는 대통령 집무실로부터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이 국가적 재난이 벌어지는 와중에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구조 작업도 제대로 시도되지 못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익사했다. 어떻게도 설명되지 않는 이 리더십 붕괴는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나라 전체가 분노에 차올랐다. 몰지각하고 무능하고 무분별한 정부의 모습은 계속됐다. 그러나 대통령은 냉담했고 무관심했고 현실인식도 제대로 못했다. 세월호 참사 당일이 최태민 사망 20주기라는 해괴한 소문이 다시 나돌았다.
말춤, 강남스타일
서울의 부촌 강남 논현동의 호화 사무실에서 샤먼의 딸 최순실이 사업을 시작했다. 박근혜의 정치경력 19년 동안 수행한 무대 감독과 엄마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최순실은 전 남편(정윤회), 헬스트레이너, 호스트바 애인 등 그녀의 측근들과 공사를 넘나들며 정책에 관여해 부를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한국 언론의 관련 보도 내용이다.
- 국가 기밀 접근 : 최순실은 정호성 청와대 비서관으로부터 매일 30cm 두께의 대통령 보고 자료를 자기 사무실에서 받아보고 정책 지침을 하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 연설문 수정 : 최순실은 대북 정책 설계도인 드레스덴 연설문을 포함해 대통령 연설문을 검토했고, 경우에 따라선 수정하기도 했다.
- 대북정책 지시 : 최순실은 대북 확성기 방송이나 개성공단 폐쇄 등 통일, 외교, 안보 분야 주요 정책에 관여했다. 최순실은 "북한이 2년 안에 무너질 것"이라면서 이에 기초해 대북 정책을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와 통일부 등 정책 담당자들은 반대하거나 애매한 입장을 취한 것들이다.
- 대통령 개인 의상 선정 : 최순실은 내각의 인사뿐만 아니라 박근혜의 의상과 액세서리 선정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조잡하고 어색했다.
- 공식 행사의 무속화 : 최순실의 영향을 받은 박근혜는 오방낭이나 무속적 의례, 특이한 심령적 언어 등 주술적인 요소를 공식 행사에 포함시켰다.
- 부패와 불법적 영향력 행사 : 1500억 원에 달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이 최순실이 추진하는 사업에 쓰였다. 이는 그녀의 측근들 몫으로 돌아갔다.
- 강탈 의혹 : 최순실은 미르 재단과 K스포츠재단이라는 두개의 재단을 설립했다. (두 재단 이름을 붙여보면 미륵, 즉 최태민이 자칭한 미륵이 된다.) 이 두 재단을 통해 최순실은 삼성, 엘지, 현대 등 한국 굴지의 대기업들로부터 불과 며칠 만에 800억 원을 모금했다. 비정상적인 모금이나 부정이 아니라면, 마술이다. 이렇게 모금한 돈은 최순실이 연관된 유령회사로 흘러들어갔다.
- 입시 부정 : 승마 선수인 최순실의 딸은 상위권 대학인 이화여대 입학 당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대는 갑자기 승마 우수 학생에 대한 특례입학 조치를 취했다. 수업 출석도 제대로 하지 않은 그녀는 후한 학점을 받았다. 부정입학 의혹은 비리 스캔들에 맞먹는 국가적 공분을 일으켰다.
- 지독한 말춤 : 최순실의 딸이 2013년 전국 승마대회에서 2등을 하자, 박근혜는 8명의 문체부 공무원들을 해임했고, 대한승마협회에 대한 조사와 감사를 지시했다.
'강남스타일' 노래가사에 빗대자면 "뛰는 놈, 그 위에 나는 놈"이다. 최순실은 높이 날았다. 말춤을 췄다. 보통사람들 위에 올라타 권력을 배후에서 조종했고, 전례 없는 국정개입을 했다. 박근혜에 올라탄 최순실을 풍자한 패러디물이 정확한 비유다. 진짜 강남스타일이다.
쇠고랑, 호송차, 단두대
입방아에 오르던 미르, K스포츠재단, 이대 입시 비리 사건이 보도되더니 이젠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사태 초기, 박근혜는 관련 보도에 대해 "헌정질서를 위협하는 심각한 불법적 행위"라며 분개했다. 대통령 연설문이 최순실 검토를 받았다는 보도가 나오자 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은 "봉건시대에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최순실의 태블릿 PC에는 최순실의 셀카 사진을 비롯해 대통령 연설문들과 국가기밀 자료들, 이메일이 담겨있었다. 비선의 국정 개입 의혹을 부정한 지 몇 주 뒤, 박근혜는 90초간 짤막하게나마 자신의 책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곤 통치 위기 상황에 몰렸다. 박근혜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침통한 표정으로 일부 연설문 작성에 (어려운 시기에 자기를 도와준 오랜 친구인) 최순실에게 도움을 받았으며, 최순실은 대통령 당선을 전후해 순수한 마음으로 연설문 작성을 도왔다고 했다.
비선 실세의 국정 개입이 확인되자 몇 시간 만에 나라 전체가 박근혜의 책임을 물으며 충격에 빠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된 지 37주년 되는 날이었다. 박근혜 지지율은 14%로 내려앉았다. 그를 지지했던 보수언론들도 책임을 물었고 여당조차 진상 조사를 요청했다. 3만 명이 하야를 요구하며 촛불집회를 열었다.
대선 개입 사건, 세월호 침몰 사건, 중국과 갈등을 유발한 사드 배치 결정, 제주 해군기지 건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구속 등 지속적인 노동 탄압,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메르스 창궐 사건, 역사교과서 수정, 부정과 정실 인사, 형편없는 경제상황 등 박근혜 정부에서 쌓여온 모든 울분이 폭발했다. 최순실이 박근혜 등에 올라탄 패러디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패러디물들이 널리 퍼졌다. 한 젊은 여성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발 하야하라"고 쓴 손팻말을 들었다.
10월 29일, 검찰은 청와대와 최순실 측근들에 대한 압수수색해 컴퓨터와 서류들을 확보했다. '문고리 3인방'을 포함한 참모진들에 대한 경질 압박이 쏟아졌다. 체포 요구에 최순실도 결국 귀국했다.
왕조의 종말
1365년, 왕비 노국공주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고려 공민왕은 신돈에게 국정을 맡겼다. 6년 뒤 신돈은 대역죄를 물어 결국 내쳐졌다. 처음의 기대를 접은 공민왕은 신돈의 사형을 명했다. 공민왕도 결국 자신의 수호무사에 의해 살해된 지 2년이 지나 500년 고려 왕조도 종말을 고했다.
공민왕 이래 지금처럼 복잡하고 거대하며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종교-정치 스캔들은 없었다. 정국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청와대는 시나리오를 계산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다. 박근혜의 최측근 참모들은 물러났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비리에 얽혔고,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김재원 정무수석, 오랜 세월 박 대통령의 개인 비서 역할을 해온 '문고리 3인방' 정호성, 이재만, 안봉근 비서관도 물러났다.
닉슨의 하야로 이어진 '토요일 밤의 대학살'에 비유될만한 이 사건이 어떻게 끝날지는 불분명하다. 박근혜가 위기를 탈출할지, 아니면 측근들과 함께 호송차를 타게 될지 알 수 없다. 박근혜에게는 면책특권이 있고, 탄핵 소추를 하더라도 박 대통령이 임명한 헌법재판관들이 있는 헌법재판소를 통과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전히 국민들은 통치의 정당성의 위기가 임계점을 넘었고 형식적 조치나 말로서 진정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전환의 시기는 세계의 지정학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사드 배치, 대북 정책, 대중 정책, 위안부 문제,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과 TPP 등 한반도를 둘러싼 거대한 지정학적 문제들이 재고되거나 재편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특징은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주술적 사고, 그리고 비합리적이며 미신적인 본질에 있다고 갈파했다. '야수적 충동', '물신주의', '보이지 않는 손', '시장 균형' 등 신고전파 경제학이 전파한 신비화와 기타 동화 같은 이론들이 자본주의의 취약성과 부조리, 폭력, 불안정성, 시스템의 혼란 등을 호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혼란스럽고 주술적 비리 게이트가 박 씨 독재 왕조의 종말,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의 탈선을 미리 알리는 징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자본을 둘러싸고 추악한 내부 투쟁을 벌이고 있는 여러 분파 간 갈등의 일시 휴전에 불과한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태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최대 약점인 주술적, 미신적 특성들을 아주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시체에 기생해 살아왔던 구더기들이 만천하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신자유주의의 좀비들이 주술, 혹은 언론의 속임수로 부활할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한국 국민들은 주술의 저주가 부디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한국이 주술의 저주로부터 벗어날지 여부는 세계의 지정학과 인류의 미래에 어마어마하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번역=임경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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