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남짓한 대선을 앞두고 예비주자들이 경선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캠프를 구성하고, 인재를 모으는 쟁탈전이 치열하다고 한다.
좋은 인재를 널리 구해서, 시대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정책과 비전을 준비하는 것은 전투를 앞둔 장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그런데, 문재인의 경우 야권 부동의 1위 후보라는 점에서 그가 어떤 진용을 짜는 지는 내년 정권교체의 향배에 관련하여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은 문고리 권력을 호남에 맡기는 방안을 깊이 고민해주기 바란다. 문재인의 최대 아킬레스건은 호남 지지율의 회복일 것이다. 따라서 그가 호남 인재의 영입에 사활을 걸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된다.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 밑에서 정무부시장을 지낸 임종석 전 의원을 문재인 측에서 영입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식의 인재 영입 방식도 나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더욱 본질적인 고민을 하기 바란다.
지금 한국정치는 지각변동의 시대를 경과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호남에서 영원한 제1당으로 보였던 민주당이 총 28석중에서 3석을 넘어 폭삭 내려앉고 안철수와 호남 중진이 이끄는 국민의당이 23석을 얻어 호남맹주로 새로 등장하였다. (민주당은 의석수에서는 참패하였지만, 지지율에서는 25%가 넘는 의미있는 지지기반을 확인하였다. 총선 후에는 국민의당과 민주당이 호남1당을 둘러싸고 시소게임을 벌이고 있다. 필자 주)
지난 주에는 민주당의 창당 대주주였던 손학규 전 대표가 탈당하면서 개헌을 매개로 여야를 아우르는 제3지대론을 주창하였다. 손 전 대표 역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지각변동을 꿈꾸면서 내년 대선 도전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지각변동의 진앙지는 어디일까? 그것은 호남판과 친노판의 대충돌에서 시작된 것이다. 야권의 두 세력이 정면충돌한 여진이 정치권을 강타하면서 정치판의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것이다. 즉 총선의 지각변동이나 이후의 이합집산이라는 것은 호남과 친노의 충돌에 따른 종속변수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문재인이 이 문제를 잘 풀면 지각변동은 소멸될 것이며, 제대로 풀지 못하면 거대한 변동이 올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호남은 왜 친노와 문재인에 대해 '레드 카드(red card)'를 꺼내든 것일까? 호남은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친노에 대한 호남의 비토를 나름 이론화한 서남대 김욱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호남은 자신의 정당한 목소리를 인정받기를 원하며, 친노는 호남의 동맹세력이 아니라 그동안 호남을 억압해온 영남패권주의 세력에 투항했다'고 불신감을 피력한다.
문재인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호남으로부터 신뢰를 다시 얻을 수 있을까? 궁극적인 방식은 호남이 스스로 이용대상이라고 느끼지 않을 방식으로 정중히 예우하는 정치연합을 추구해야 한다고 본다.
'노무현 정부 때처럼 이 권력은 대통령이 된 내 권력이고 호남은 내가 알아서 배려해 줄테니 그리 알아라'라는 식으로 가면 안 된다는 말이다.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연합은 전혀 다른 세력이 정치연합을 이룬 우리 정치사에서 드문 희귀한 예이다. DJT연합은 상호 존중과 예의를 바탕으로 정식 합의문에 바탕한 정치연합이었다. 반면에 노무현 정부 시대, 정권창출의 최대 공적을 세운 것은 호남이었지만, 호남이 그에 합당한 예우를 받았다고는 보기 어렵다. 호남은 대주주 지분을 가진 세력이 아니라 배려의 대상이었을 따름이었다.
호남과의 정중한 정치연합의 재건은 내년 대선과정에서 문재인이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최우선 과제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연합을 위한 정지작업 차원에서 우선 할 수 있는 일이 문고리 권력을 호남에게 맡기는 방식이다.
민주화 시대의 대통령제하에서도 문고리 권력의 중요성을 우리는 매일같이 목격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경우, 3선 4선의 중진의원들조차 대통령을 면담하려면 측근 비서들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고 한다. 대통령 비서실장조차 대통령 면담이 어렵다는 풍문이 돌아다니고 있다. 사실 문고리 권력을 잘못 사용해서 망한 사람을 들라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차지철 경호실장이라는 희대의 괴물에게 문고리 권력을 맡긴 그는 결국 또 다른 문고리 권력인 중앙정보부장의 권총에 사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부정적 의미뿐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도 문고리 권력은 민주화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호남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른바 '부산팀'을 문고리 권력으로 선택했고, 이들이 부산친노로 발전했고, 그 대표자가 바로 문재인이다. 현재 문재인의 문고리 권력을 누가 쥐고 있을까? 문재인 대통령이 되면 누가 문고리 권력을 잡을 것인가? 또 '부산친노'인가 아니면 '386세대'인가? 그런 점에서 문재인이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문고리 권력을 호남이 맡게 될 것이라는 사인을 준다면 호남과의 연합정권을 수립하겠다는 진정성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안 그래도 문재인 후보의 독주가 다른 후보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는데 필자는 왜 특정 후보에 관한 글을 열심히 쓰고 있을까? 친노와 호남의 연합은 문재인 개인을 넘어선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풀어보자.
오늘의 야권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87년이후 지난 30년간을 15년으로 잘라 두 단계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앞 15년은 87년의 대분열을 거쳐, 야권이 김대중으로의 단일 리더십으로 재편되는 과정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김대중 정부가 출현하고 퇴임하는 시기다. 이 시기의 특징은 김대중 권력의 확립과 집권을 위해 호남과 재야민주화 세력의 모든 역량이 김대중 주위에 총집결하는 과정이었다. 비록 야당이었지만, 김대중 세력 (일명 동교동 세력)에 편입된 세력은 국회의원 직과 호남이라는 영지가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가장 춥고 배고픈 세력은 김대중의 호남세력이 아니었다. 민주화 운동의 또 한 축이었던 김영삼의 3당합당에 반대하여 부산·경남(소위 PK지역)에서 민주화 운동이라는 깃발을 들고 야당을 하던 사람이었다. 이들의 대표자가 바로 노무현이었다.
처음에는 3김 청산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김대중의 대안을 만들지 못했던 그들은 결국 김대중 당에 흡수되어, 자신들의 고향지역에서 이른바 독립운동 차원의 야당생활을 하게 되었다. '전라도당의 앞잡이'라는 멍에 속에서 이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철저히 소외된 정치활동을 하였다.
2002년 노무현 정부가 출현하자 상황은 정반대로 역전되었다. 척박한 PK지역에서 민주세력의 뿌리를 복원하기위해 노무현 대통령은 총력을 기울였다. PK출신 인재의 양성은 기본이고,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나 중·대선거구로의 국회의원 선거제도 변경 등 온갖 방법을 강구하였으나 모두 무위로 돌아갔고 남은 것은 호남과 노무현 세력의 반목과 증오였다.
첫 15년동안 PK민주화 세력은 춥고 배고팠고, 뒷 15년 동안 호남민주세력은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이 갈등이 현재 야권을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는 재앙의 근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서로 손가락질만하면 문제를 풀 길이 영원히 없다. 갈등의 본질을 꿰뚫어볼 필요가 있다. 87년 대분열의 후과에서 이 모든 비극이 연유함을 확실히 인식한 토대 위에서 이 분열을 근원적으로 뛰어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김대중과 김영삼이라는 걸출한 지도자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79년 부마항쟁과 80년 광주항쟁을 출발점으로 하여, 모든 민주세력이 지역과 계층과 세대를 뛰어넘어 단결하여, 87년 6월항쟁의 승리를 통해 마침내 군부독재를 추방하고 민주공화국을 바로 세웠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제휴는 '민주화'라는 가치를 토대로 한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가치동맹이었다. 또한 그것은 가장 강력한 지역연합이기도 했다. 호남과 PK는 반독재 민주화투쟁이라는 공감대하에서 유례없는 위대한 성과를 이루었던 것이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은 부산출신이고, 이한열은 광주출신이다. 필자주)
당시만 해도 김대중과 김영삼의 제휴를 정치연합으로 인식하지도 못했고, 또 이것이 지역연합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지 두 지도자 개인차원의 협력과 경쟁으로만 받아들여졌다. 지략이 뛰어난 김대중은 두뇌의 역할을 했고, 용감무쌍했던 김영삼은 심장의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87년 대통령선거의 분열로 이 가치동맹·지역연합은 균열되기 시작하여 90년 3당합당을 계기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민주화의 두뇌와 심장이 분리되었다. 그리고 불완전한 민주주주의로의 이행기가 30년 진행되었다.
한 세대가 흘렀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는 것일까. 2016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야권단일후보였던 오거돈 후보가 49.3%를 얻어 한나라당 후보를 1%차이까지 추격하였다. PK의 맹주이던 김영삼조차 전성기 시절에도 지지도가 55%정도였다. 마침내 2016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PK지역에서 8명의 당선자를 배출하였다. 이제 부산경남 지역은 다시 민주세력의 근거지로서의 위상회복을 꿈꿀 단계로 발전하였다.
총평한다면, 87년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이 야권 뿐 아니라 우리 현대사의 진행 방향을 완전히 왜곡시켰다. 2002년 노무현 정부는 이를 바로잡지 못했다. 그 결과 지난 15년 호남과 친노는 처절하게 반목했고, 어부지리는 고스란히 군사독재의 잔재세력이 마음껏 누렸다.
이런 맥락에서 문재인은 두 가지 역사적 소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그동안 새누리당의 아성이었던 부산·경남지역을 민주세력의 메카로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PK와 호남의 동맹을 회복하여 민주세력을 재건하는 과제다. 문재인은 자신의 어깨 위에 친노의 운명만 걸머진 것이 아니고, 한국 현대사를 바로잡을 사명이 놓여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근본적 변화든 혁명적 변화든 그것을 추동하기 위해서는 야권이 집권하더라도 강력한 개혁엔진을 탑재해야 한다.
내년 대선에서 문재인이 호남과의 연합에 실패한다면 우리 현대사는 다시 한번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뒤틀린 경로를 밟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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