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보도에서 "'관계자'가 뭐라고 말했다"는 문구를 보면 가끔 웃는다. 문맥에 따라 그 '관계자'가 기자 자신으로 읽힐 때가 있기 때문이다. 경제 기사에서 '업계', 사회 등 다른 기사에서 취재처와 상관없이 '전문가'란 실명 없는 출처로 인용이 달릴 때도 마찬가지다. 다는 아니고, 정황상 의심이 갈 때가 있다.
나의 의심대로 만일 기자가 자신의 기사에서 스스로 익명의 전문가가 되어 인용을 단다면, 그 이유는 아마 기사의 신뢰성과 객관성을 포장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실 실명의 '전문가'나 '관계자'가 들어갔다고 해서 신뢰도가 높아지고 더 객관적이 되는 건 아니지만, 소위 '적정한 주의 의무(due diligence)'를 기울였다는 표시로서 인용은 관행적으로 사용된다. 물론 '적정한 주의 의무'를 기울인 편파적이고 거짓된 기사 또한 있을 수 있다.
어쨌든 대체로 '전문가'나 '관계자'란 표현이 없는 기사가 기사 자체로는 더 완성도가 높은 기사라는 데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기자는 관계자를 무슨 부 아무개 국장으로, 전문가를 무슨 연구원 아무개 선임연구위원으로 적도록 노력한다. 그런데도 무턱대고 관계자나 전문가가 등장하는 보도가 심심찮게 목격되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관계자가 실명을 밝히길 원하지 않았을 때로, '적정한 주의 의무'를 기울였음에도 불가피하다. 다른 하나는 '적정한 주의 의무'를 기울이지 못한 때이다. 마감하느라 시간에 쫓겨 이런저런 연유로 관계자에게 직접 물어보지 못하는 상황이 빚어졌을 때 관계자 없이 관계자를 쓰기도 한다. '적정한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나 다한 것으로 가장하는 행태라고 할 수 있다.
'관계자'와 직접 대화하거나 통화하지 못한 채 기자가 '관계자'란 단어를 써서 작성한 기사는 물론 문제시되어야 하지만, '논외로' 그 기사가 무조건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출입처에 오래 나가거나 취재를 오래 한 기자는 저절로 또는 애써서 '관계'에 편입되면서 사실 '관계자'의 인식을 사전에 파악하게 되어 그 '관계자'의 반응까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기자가 관계자로 둔갑하는 유형의 기사는 '적정한 주의 의무'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기사화하지 말아야 하는 기사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사가 진실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기사 작성에서 '적정한 주의 의무'는 보도의 전제 조건이기에 우리는 작문을 기사라고 하지 않는다. 기사는 진실을 쫓지만 진실이라고 모두 기사화할 수는 없고, 합당한 확인 절차와 '적정한 주의 의무'를 거쳤을 때만 공론의 장으로 기사의 형태로 들고 나올 수 있다. 이때 기자는 공인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서론이 길었다. 김제동 씨의 '영창' 발언을 두고 그게 김 씨의 실제 경험에 근거한 건지, 아니면 꾸며낸 것인지에 관한 최근의 논란을 검토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기에 우선 언론 윤리를 살펴보았다. 당연히 김 씨는 언론인이 아니다. 쟁점은 그가 '단지' 개그맨이냐일 것이다.
만일 김제동 씨가 단지 개그맨이라면 또 그 발언이 단지 공연을 위한 것이라면 김 씨가 실제로 영창을 갔든 안 갔든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문제는 김 씨가 개그맨이긴 하지만 단지 개그맨만은 아니며 발언이 분명 개그이지만 개그 이상의 목적을 담고 있다고 간주된다는 점이다. '경북' 사람인 자신을 '종북'이라고 우기는 사람에 대해, '종북'이 아니라 '경북'이라고 반박하는 상황은 그가 정치적 맥락 안에 위치함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김제동 씨는 정치인이 아니지만 이미 정치적 인물이며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실상 비선출직 공인이란 얘기다. 그럼에도 '영창'은 적어도 이 대목에서 문젯거리는 아니다. 이후 그가 소명한 대로 영창을 갔다 왔다면 논란 자체가 소멸하며, 가정하여 만약 안 갔다 하여도 "웃자고 한 이야기였다"면서 사실과 다르다고 사과했다면 마찬가지로 논란이 수그러들었을 것이다. 공인이라 하여도, 그는 개그맨인 공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김제동 씨에게 다른 상황이 전개될 전망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김 씨에게 부여된 개그맨의 '특권'이 면탈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창' 건에 대해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들면 답이 없다"고 한 김 씨의 답변이 모호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이후 진실 게임 양상으로 번지고 있으며 국방부는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라고 한다. (여담으로 개그맨의 개그에 대해 정부가 내용을 확인하는 사태 자체가 개그라고 한다면, 김제동 씨가 국가적인 개그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개그를 통해 희화화한 대상이 더 이상 그의 개그를 개그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면, 또 그가 개그맨으로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의 개그에 다른 개그맨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김제동 씨의 말대로 '영창' 건의 본질은 응당 잘못된 군대 문화이다. 또 김 씨가 희화화한 그 일이 실제로 그에게 일어났든 일어나지 않았든, 이 나라 군대가 김씨의 개그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김 씨는 자신의 사적 경험(혹은 소재)을 근거로 사회적 병폐를 거론한다. 반면 김 씨의 반대자는 사회적 병폐는 제쳐두고 김 씨의 사적 경험의 진위를 확인하자고 덤빈다. 부패한 권력과 부당한 권위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일이 개그의 본령에 속할진대 만일 비판받고 조롱받는 권력과 권위가 개그를 언론 보도와 동일하게 받아들여 보도와 동일한 잣대로 공격한다면, 개그맨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김제동 씨가 희화화한 대상이 김 씨의 개그를 언론 기사 대하듯 한다고 해서 그가 기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영판 개그맨이 아닌가. 그러나 공론의 장에서 수행하는 그의 공적 기능을 감안할 때 공인으로서 적어도 자신의 기능에 예민해질 필요는 있다. 이제 김제동 씨는 자신의 개그에 훨씬 더 많이 '적정한 주의 의무'를 기울여야 한다. 그가 정치와 개그 가운데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면, 그의 개그는 정치적 개그가 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개그는 보다 정치적이 되어야 더 개그로서 성공적이며, 그 조건은 더 투철한 공인의식이다. 재미를 버려야 재미를 얻을 수 있다.
(안치용 교수는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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