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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의 이한열 vs. 16년의 백남기,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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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의 이한열 vs. 16년의 백남기, 다른가?

[사회 책임 혁명] 민주주의는 국가의 '폭력 면허증'이 아니다

1987년 6월 9일에 당시 대학생 이한열이 쓰러졌다. 이젠 역사의 기록으로 남은 그날, 그가 쓰러지던 날 그 현장에 나는 함께 있었다. 굉음과 함께 최루탄이 사방으로 터지고 백골단으로 불리던 날렵한 경찰 체포조가 시위 학생들에게 뛰어들면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육식동물의 습격을 받은 초식동물 무리의 행태와 흡사하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마도 그때 나는 앞쪽에서 누군가 쓰러지는 걸 본 듯하다. 대열이 무너지면 처음에는 전방을 주시하며 뒷걸음치기에, 전력으로 도망치기 전에 아마도 보았을 수 있다. 물론 정확하진 않다. 나중에 새로 구성된 기억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쓰러진 그 대열에 같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지금에서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명료하지 않지만, 그날 그는 저쪽 앞에 나는 조금 떨어진 뒤에 있었다. 그는 그때 쓰러져 영원한 청년으로 남았고 나는 중년의 남자로 적당히 늙어가며 그날을 회상하는 글을 쓰고 있다. 이한열과 친분은 없었다. 인연을 찾자면 그의 동아리와 나의 동아리가 학생회관의 같은 층에 있었다는 정도.

이한열은 그 해 7월 5일 숨졌다. 학생들이 돌아가며 이한열이 있는 병동을 지켰는데, 나도 어쭙잖은 각목 하나 들고 또래 학생들과 병원 진입로 부근을 지킨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장례식도. 저 멀리 연단에서 누군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열사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고, 그때마다 주변에서 흐느낌이 퍼졌다. 마지막에 부른 열사 이름이 이한열이었을까.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

주지하듯 그의 죽음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지만 불행히도 이한열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마지막 열사가 되지는 않았다.

2016년 9월 25일에 백남기 농민이 유명을 달리했다. 지난해 11월 14일 민중 총궐기 시위 도중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사경을 헤매다 317일 만에 끝내 운명했다. 1966년생인 이한열보다 스무 살 가량 많은 1947년생으로, 이한열보다 50년 가량 더 살았지만 비슷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했다.

1987년 그날의 장례식이 있고, 비록 군사 정권의 연장으로 귀결하였지만 아무튼 명목상일지라도 민주주의가 도입된 이후, 나는 우리나라에서 적어도 이한열과 비슷한 양상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상(理想) 국가에서도 국가에 의한 폭력이 원천적으로 근절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의 소위 민주 국가에서, 더구나 우리가 절절이 체감하듯 단지 명목상의 민주 국가에서는 국가에 의한 폭력이 더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불가피성에 관해서는 민주 국가에서 최소한 군사 독재 정권보다 더 공정하고 더 정당한 숙고를 거치리라고 예상했다. 언필칭 국민의 손으로 선출된 정권이 아닌가.

그러나 현실에서 목도하듯 백남기 농민은 이한열과 같은 방식으로 이승을 떠났다. 차이라면 가해 흉기가 SY-44 대신 물대포였고, 희생자가 청년 대신 노년이었다.

고 백남기 농민의 유가족과 관련 단체, 야당에서는 경찰의 '살인 진압' 책임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이 국가의 부당하고 적법하지 않은 폭력에 의해 사망하였다면 그 폭력의 책임 소재를 가리고 책임 있는 사람에게 응당한 처벌을 가하는 게 상식이다. 군사 독재 정권이라면 모를까, 민주 정권에서는 분명 상식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책임 규명은커녕 제대로 된 사과조차 없다. 정부나 여당은 후렴구처럼 잘못된 시위 문화 탓만 하고 있다. 국민의 죽음 앞에 너무나 파렴치한 짓이다.

대학 시절 나는 국가가 두려웠다. 등하굣길은 물론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국가는 공포의 표상이었다. 이한열이 죽고 얼마 뒤, 같은 학교를 다니던 한 친구가 이한열처럼 SY-44 직격탄에 얼굴을 맞았다. 불발탄이 되어 '다행스럽게도' 목숨을 구했다. 병문안 가서 우리는 "너 열사 될 뻔했다"며 청년다운 호기를 부렸으나 병실을 돌아 나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누구나 '그게 나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나서, 정신없이 사느라 그랬는지 한동안 국가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살았지만, 요즘엔 다시 두렵다는 생각이 든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대한, 박종철·이한열 때 그들에게서 표명된 그나마 거짓 죄의식마저 사라진 요즘 그들의 당당함과 뻔뻔함에 더 큰 두려움을 느낀다.

국가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이 국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곳을 민주 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이 나라가 딱 그 모양이다. 국가가 국민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심지어 우습게 여기는 상황이다. 그런 국가에 국민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민주주의를 국가에 부여된 '폭력 면허증' 쯤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이 나는 정말 두렵다.

(안치용 교수는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햅위원장입니다.)

▲ 백남기 농민이 경찰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고 있다. ⓒ프레시안(손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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