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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이정현을 위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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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이정현을 위한 변론

[사회 책임 혁명] 이정현의 단식은 왜 조롱을 샀나

살면서 목격한 '정치적 단식' 가운데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단식처럼 그렇게 심하게 조롱의 대상이 된 사례는 없었다. 지난 2일 이 대표가 단식을 중단하자 심지어 "아쉽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SNS에서 떠도는 글 하나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지지받은 단식은 처음 보았다. 이처럼 온국민이 아쉬워한 단식 중단을 평생 본 적 없다. 단식은 이렇게 어이없이 시작하고, 이렇게 우습게 중단해야 한다는 것을 이정현은 보여주었다. 김대중, 김영삼도, 심지어 예수도 이정현처럼 환영받은 단식을 하지 못했다. (…) 단식을 위해 송로버섯과 샥스핀으로 준비했다. 그렇게 단식 준비가 철저했던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또한 이정현의 '악마의 주둥이'는 누구도 갖지 못한 단식 무기였다. 그 입으로 들어간 음식이나 그 입으로 나온 말은 모조리 악마의 것이었다. 송로버섯과 악마의 입이 이정현의 단식 투정을 성공하게 만들었다."

앞서 이정현이 단식 투쟁에 '성공'하면 사인 규명을 위해 "부검을 실시하자"는 듣기에 따라선 섬뜩한 주장까지 나왔다. 이정현 단식을 조롱하는 재치 있는 글들에 많은 이들이 환호했고 발랄한 댓글로 호응했다. '정치적 명분'을 내건 단식에 이렇게 단식의 지속을 종용하며 열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대표의 단식 명분이나 단식 자체에는 1%도 동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단식이란 절박한 선택을 내린 인간을 조롱하는 건 심한 일이라고, 이 대표를 반대하는 누군가가 이 대표를 옹호하는 반론을 편 걸 보았다. 그의 단식이 역설적으로, 저잣거리의 명백한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방증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핵심 단어는 '카타르시스'다. 보통 '정화'로 번역되는 카타르시스는 비극의 기능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데,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성취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명한다. 간단히, 비극의 핵심기능은 카타르시스이며 카타르시스는 연민과 공포를 통해 달성된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정한 비극의 주인공은 평범하지 않고 비범하며 더구나 악한이 아니다. 오이디프스처럼 대체로 영웅적인 인물이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비극의 주인공은 자신이 의도한 죄악으로 인해 몰락하지 않고,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상황, 즉 운명에 의해 불행해진다. 인간적인 결함이 아닌 신적인 농단에 의해 비극적 결말에 도달한다. 오이디프스를 떠올리면 된다. 여기서 비극의 주인공이 감당하게 되는 불행은 그가 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며 나아가 인간의 기준으로는 터무니없이 과도하다고 간주되기에 주인공은 관객에게서 연민을 자아낸다. 또한 탁월한 주인공마저 어쩔 수 없이 과오를 저지르고 징벌을 받는 '불가피성'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 불행이 더 용이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관객에게 공포를 만들어낸다. 연민은 주인공의 탁월함에, 공포는 관객의 동일시에 초점이 맞춰진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소재면에서 단식은 분명 비극이어야 하는데, 이정현 대표의 단식극은 기이하게도 연민과 공포의 부재를 특징으로 한다. 요컨대 주체의 탁월함과 관찰자의 동일시가 결여되어 있다. 김대중이나 김영삼이 결행한 군사 독재 시절의 단식은 분명 관객 또는 관찰자, 즉 국민에게서 연민을 자아낼 수 있는 요소를 지녔다. 후대의 평가와 무관하게 당대에 그들은 독재와 싸우고 민주주의를 구원하려는 영웅적 면모를 보였기에 아리스토텔레스적 비극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었다. (사실 모든 정치가는 일종의 배우이다.) 국민들은 독재 정권에 맞서다 고통 받고 희생당하는 그들에게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정현에겐 영웅적 요소가 없다. 영웅적 요소란 어떤 이들에겐 '독재자의 딸'인 박근혜에게서 나타나는 혈통일 수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겐 영웅적 행위를 통한 인정일 수 있다. 독재의 혈통에 그야말로 견마지로를 다하는 충성으로 출세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그에게는 견마지로 외에 자신의 존엄을 높일 만한 아무런 성취가 없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이 대표는 추앙의 대상인 비범한 인물이라기보다는 무시 혹은 멸시의 대상이다. 또한 이번에 그가 자처한 고통은 평범한 민중의 고통을 대변한다기보다 (추미애 더민주당 대표의 말대로) 충견이 주인에게 충성하여 치사를 받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결론적으로 그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연민과 공포의 여지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연유로 이정현 대표의 단식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의 소재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조롱이 유발된 것은 이러한 전환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다. '높은' 동일시(연민)든 '낮은' 동일시(공포)든 동일시를 가능케 하는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이물감과 혐오를 부추기는 억지 광대 짓이었기에 그의 비장한 결단은 웃음거리로 귀결하고 말았다. 개그에 웃음으로 반응한다고 나무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슬프다. 비범이 대체로 야만과 연결되기 십상인 우리 세태에서 '몸빵' 하나로 평범을 극복하려고 한 동시대인의, 그 자체로는 진정성 넘치는 몸짓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 소멸하는 전 과정이 정치적 관점이 아니라 존재론적 관점에서 안타깝다. "자신이 정극에서 비장한 연기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웃더라"고 한 어느 개그맨의 고백처럼 이 대표에게는 애초에 비극이 허락되지 않았다. 더 비극적인 것은 자신에게 개그맨 이상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 대표가 모른다는 점이다. "한 톨의 쌀알을 대패질하는 심정으로" 살아온 이정현에게, 그런 심정으로 단식하고 단식을 중단한 이정현에게서 나는 남들과 다른 관점에서 연민과 공포를 느낀다.

광대극이 광대의 의지만으로 상연된 적은 없다. 그래서 그를 쉽게 조롱하게 되지 않는다.

(안치용 교수는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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