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지금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역사학자 이병한의 '유라시아 재통합'의 현장을 가다 - 일대일로에서 할랄스트리트까지'를 주제로 <프레시안>, 서해문집, 더미래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유라시아 견문> 발간 기념 북 토크 및 좌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 박사는 뒤집힌 세계 지도를 보여주며 지난 1년 반 동안 중국과 터키, 이란, 인도, 인도네시아 등을 직접 찾아다닌 이유를 설명했다.
"몽골 사람들은 세계 지도를 거꾸로 본다. 이렇게 보면 동쪽에 유럽이 있다. 북방 사람들의 감각으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동서의 방향도 뒤집힌다. 이렇게 보니까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서 중국 현대사와 관련된 논문만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 이런 생각을 하게 됐으니 직접 유라시아 대륙을 가보자는 마음으로 총 3년 동안의 견문을 시작하게 됐다."
그는 지난 1년 반 동안 중국과 인도, 이슬람 국가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이들 지역에는 공통적인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위치한 한 쇼핑몰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쇼핑몰의 이름이 '이븐 바투타'이다. 이븐 바투타(오늘날 모로코에 속하는 지브롤터 해협 인근의 항구도시 탕헤르 출신의 여행가. 30여 년 동안 중국과 동남아시아, 인도, 오늘날의 터키, 중동, 아프리카 대륙 등을 탐험했다. 편집자)가 여행한 곳을 전시관처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쇼핑을 하도록 구성돼있다.
쇼핑몰에는 '1000년의 지식을 재발견한다'라는 구절이 쓰여 있다. 과거 이슬람이 만들었던 네트워크를 다시 복원해 간다는 발상이다. 또 쇼핑몰에는 중국 정화 (명나라 영락제 때의 환관. 28년 동안(1405~1433년) 일곱 차례에 걸쳐 남경에서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30개국, 500여 개 지방, 총 18만 5000km를 항해했다. 편집자)가 원정을 했을 때 탔던 배를 실물 크기로 만들어 놓기도 했고 당시 남유럽과 이집트의 풍경을 모티브로 한 공간도 마련돼 있다"
물론 이슬람 공동체를 복원한다는 이러한 경향을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측면도 있다.
이 박사는 "지난 2014년 이슬람 국가(IS)가 등장했는데, 이들은 칼리프의 복원을 표방하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 중동이 혼란스러웠던 것은 칼리프 제도가 붕괴되고 국가별로 쪼개져서 서로 싸웠기 때문이라는 인식 하에 다시 이슬람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칼리프 제도의 복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라면서 "그런데 이슬람 국가들의 여론조사를 보면 70% 이상이 IS에 반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IS에 반대하고 있는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칼리프와 이슬람 공동체의 복원에 대해서는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이 박사는 "1924년 오스만 제국이 붕괴한 뒤에는 이슬람 국가에 칼리프(황제와 유사한 개념)나 술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 지난 100여 년 동안 아프리카 모로코부터 아시아의 인도네시아까지, 무슬림 공동체는 국가별로 찢어져 있었다"면서 "그런데 최근 이들 국가에서 칼리프 제도를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여론조사를 보면 80% 정도가 칼리프 복원에 찬성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그는 "1924년 오스만 제국이 영국과 프랑스의 합의에 의해 쪼개질 때 오늘날의 국경이 만들어졌다. 오스만 제국 당시에는 시리아나 이집트는 우리의 도지사 정도였다. 여기에 민족 국가, 국민 국가라는 근대적 이데올로기가 주입되면서 제국이 찢어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600년은 평화로운 시기였다. 1000년 이상 이슬람적인 세계 질서가 있었고, 무슬림들도 마치 중국의 황제처럼 국가 위에 공통된 무엇인가가 있어야 전체 세계가 평화롭다는 발상을 했던 것"이라며 "그런데 최근 100년 동안 중동은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이슬람 세계의 복원을 염원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이슬람 국가들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이 박사는 중국과 인도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을 때 혁명의 구호는 '반제, 반봉건'이었다. 특히 반봉건은 전통에 반대한다는, 즉 유교를 비롯해 기존 문명을 뒤집어 엎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2012년에 등장한 중국의 최고 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은 '중화(中華)의 부흥'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는데, 초대 총리였던 자와할랄 네루는 본인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나는 최후의 영국인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교육도 영국에서 받았고 의식이나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2014년 집권한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힌두주의', '힌두성'을 표방하고 있다. 건국 초기 추구했던 세속주의나 민주주의가 아니라 힌두 국가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그는 "제가 최근에 자주 보는 지도가 18세기 유라시아의 지도다. 당시 지도에 유라시아 동쪽 끝에 대청제국이 있었고 남아시아에는 무굴 제국, 오늘날 이란에는 사파비아 왕조라는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가 있었으며 오늘의 남유럽부터 북아프리카, 중동 지역에는 오스만 제국이 있었다. 이렇게 4대 제국이 유라시아에 존재했고 당시는 안정적인 시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이러한 제국들이 19세기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대청제국이 붕괴되고 나서 동아시아가 어떻게 됐는지는 우리나라를 보면 굳이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식민지가 된 것과 중국의 붕괴는 동시적인 현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 "지난 1년 반 동안 중국과 인도, 이란, 터키 등을 다녀보니 이들 지역에서 중요한 트렌드 중 하나는 '건국'이 아니라 '복국'(復國)이었다. 원래 가지고 있었던 문명을 회복해 가겠다는 공통적 흐름"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20세기 이들 국가들이 세워졌을 때 핵심 키워드는 '혁명'이었지만 지금은 '중흥'으로 바뀌었고, 당시는 좌파와 우파의 합작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고전 문명과 현대 문명을 결합시키는 것이 핵심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이는 20세기에는 식민지에서 벗어나겠다는 독립이 핵심이었지만, 이제는 '네트워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라며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와 인도의 인도양 공동체, 칼리프를 통한 이슬람 세계의 복원도 크게 보면 같은 흐름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유라시아 전체 인구의 80% 정도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그런데 한국은 이러한 흐름에 대해 너무 둔감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꼬집었다.
중국, 미국 대신할 패권 국가인가?
중국과 인도, 이슬람은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을까? 이날 패널로 참석한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과거 이 지역들을 중심으로 한 제국들이 유라시아의 뼈대라고 본다면, 이들 문명이 지금까지 추구해 온 공통적인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병한 박사는 이를 제국과 제국주의의 차이로 설명했다. 그는 "핵심적인 것은 '마음의 논리'인데, 제국주의는 내가 좋다고 하는 것을 남에게 권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을 듣지 않으면 바꿔버리는 것이 제국주의다. 민주주의가 좋은 것이니까 이라크에 가서 후세인 치우고 리비아에서 카다피를 치우라는 것이 제국주의적 행태"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박사는 "제국의 마인드는 이와 다르다. 자신들의 제도가 옳다고 생각은 하지만, 과거 중국인들이 조선에 와서 유교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베트남에 가서도 '왜 불교를 믿고 있냐, 유교를 이식해주겠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흐름은 20세기에도 상당 부분 지속되고 있다. 지금 중국이 북한이나 베트남, 몽골, 미얀마 등 주변 국가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며 "그래서 현재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에 우리도 개입할 여지가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이날 패널로 참석한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의원은 미국에 대항해 새로운 패권 국가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이 어떤 식의 세계 질서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보느냐고 물었다.
이 박사는 이에 대해 "일대일로는 협치, 즉 함께 만들어가는 프로젝트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역시 우리가 일정 지분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사대가 일방적인 형태가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가 개입하고 함께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내다봤다. 중국이 일방적인 패권 행태만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런데 그는 이보다 더 중요한 지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한국에서 중국을 미국과 함께 G2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건 우리가 세계를 동북아 중심으로 봐서 그렇지 유라시아 전체로 보면 중국이 혼자 부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두고 미국 대신 중국이 전지구적인 패권 국가가 될 것이라고 하는데 이건 실재가 아니다. 이렇게 현실을 바라보다 보니 인도가 얼마나 크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고, 10년 이상 계속 전개되고 있는 이슬람 공동체의 복원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구조적인 오판이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수십년을 내다보는 중국, 1~2년에 매몰돼있는 한국
이날 패널로 참석한 이인영 의원은 "이병한 박사는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탐색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민주주의가 가진 폭력성에 대한 비판, 근대 민주주의가 가지는 문제점 등도 함께 보고있는 것 같은데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한다고 보나"라고 물었다.
이병한 박사는 "중국 지식인들을 만나보면 천부인권이라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만 18세가 되면 주권자가 될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줄 수는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정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 것에 대한 반대인데, 우리가 느끼기에는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실제 조선시대 때 정치가 이렇게 돌아갔다. 모두에게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열어주지만 그 자격에 통과해야 주권자로서 권리를 주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박사는 중국의 민간 유학자 장칭(蔣慶)을 만나 중국 일각에서 생각하고 있는 국가 운영 형태에 대해 소개했다.
"물론 이들이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는 의회를 만들되, 여기에서만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자기들이 운영해왔던, 과거제 운영의 정치로 또 다른 의회를 만들어서 양원제처럼 해보자는 것이다. 이미 이란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하원은 국민들의 투표로 선출하고 여기에서 법을 만들되, 원래 이슬람에서 정치를 했던 이슬람 율법 학자들이 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세속법과 종교법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좋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 문명권에서는 서구 민주주의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자기 식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방식을 주목해 볼 필요도 있다. 올해 영국이나 미국의 대선을 봐도 그렇고,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를 가장 오래했다는 일본을 봐도, 또 민주화 30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한국의 실태를 봐도 이제는 이런 고민을 할 단계가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칭화대학교 후안강(胡鞍鋼) 교수와 제자들을 만났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현재 민주주의와 선거 체제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후 선생의 제자들,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에 있는 제 또래들을 만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들은 2049년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2049년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이 때 중국을 어떻게 만들지를 고민하며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오면 다 내년 이야기만 한다. 내년에 한국 대선이 있기 때문이다. 그 똑똑하다는 친구들의 사고 단위가 1~2년에 불과한 셈이다. 바다 건너 중국의 젊은 학자들은 수십 년을 내다보고 있다. 이 차이가 앞으로 어마어마하게 커질 것이다.
이건 서구식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와도 통하는 사안이다. 선거를 하면 그 사회의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 4~5년 단위로만 사고하고 100년을 내다보지 않는다. 중국의 사고 단위가 4~5년이 아니라는 점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한편 이날 패널로 참석한 백원담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장은 "이병한 선생님이 견문을 통해 만났던 분들도 좋게 말하면 공공 지식인들인데, 실제 유라시아의 전환과 새로운 세계 체제의 문제가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아시아 학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아서 농민들이 농경지 점거 운동을 하는 곳을 방문했다. 원래 커피 플랜테이션 농장을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농민들이 플랜테이션을 거부하고 땅을 점거해서 자기들이 필요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게 된 것이다"라며 "수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유라시아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규명하는 게 핵심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이 박사는 "하위 주체가 연결되는 대안적인 아시아라는 측면은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상당히 유통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오히려 한국 지식사회에서는 그런 측면만 부각되는 것 같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제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인도, 중국, 이란 등에 가서 만나는 지식인들은 '경세가'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실제로 그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이 소개가 되지 않고 있는 것도 국가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근대적 인식이 투영된 지식인의 편견이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원래 동방 지식인들은 자신에게 소위 '똥물'이 튄다고 할지라도 더러운 세상에 나가서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상형이 있었다"면서 "실제 지금 유라시아를 만들어가는 핵심 인재가 그들이라면 이들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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