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4년 차를 맞은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일 관계도 역사를 직시하는 가운데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라는 것 외에 일본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일본이 빠진 자리는 북한과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로 채워졌다. 특히 박 대통령은 북한의 간부와 주민들에게 "통일은 여러분 모두가 어떠한 차별과 불이익 없이 동등하게 대우받고 각자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박 대통령은 북한 내 조선노동당 당원 혹은 간부들을 안고 가면 북한의 최고 권력층이 고립되고 그렇게 되면 북한의 붕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말은 되지만 현실적으로 쓸 수 없는 전략"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저런 발언은 북한의 붕괴를 전제로 한 것인데 최근 평양에서는 대동강 맥주 축제를 했다더라"라며 "곧 붕괴할 나라의, 그것도 수도에서 맥주 축제를 하겠나"라고 되물었다. 정 전 장관은 "결국 8~9월이 되면 북한이 손 들고 나올 거라는 박근혜 정부의 예상은 이미 어긋나 버린 셈"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북한의 붕괴를 염두에 두고 대북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드 배치로 인해 대북 제재의 국제 공조가 흔들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한이 미국과 일본의 군사 동맹 하위 파트너가 돼버렸는데도 여전히 압박 정책만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 전 장관은 "한국이 뭣도 모르고 미국의 대중국 압박 전략의 그물에 걸린 것이다. 이런 의식구조를 가지고 일을 추진하니까 사드 배치로 인해 남한이 미국의 대중 봉쇄 정책의 전초기지가 된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라며 "북한을 압박할 줄만 알지, 중국이나 러시아와 원수가 될 수 있는 생각은 안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익과 외교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있음에도 사드 배치를 밀어붙이는 박근혜 정부,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정 전 장관은 국회가 나서서 사드 배치를 국회의 비준 동의를 받는 사안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미 양국이 사드를 배치하기로 합의한 형태가 조약인지, 협정인지, 약정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긴 하다"면서도 "그렇다고 이게 실무적으로 협의하고 끝날 일은 아니다. 국가의 국익과 국민의 안전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인터뷰는 지난 16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편집인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과 관련,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새롭게 만들어가자"는 것 외에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한일 간 현안은 전혀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북한과 사드 이야기로 채웠습니다. 특히 북한의 간부들에게 "통일은 여러분 모두가 어떠한 차별과 불이익 없이 동등하게 대우받고 각자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박 대통령이 북한 붕괴를 신념화한 것 같습니다.
정세현 : 박 대통령은 북한 내 조선노동당 당원 혹은 간부들을 안고 가면 북한의 최고 권력층이 고립되고 그렇게 되면 북한의 붕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말은 되지만 현실적으로 쓸 수 없는 전략입니다.
이런 걸 상대방을 갈라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북한에서 저 말을 듣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밀어내거나 귀순을 할 사람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저런 말은 북한의 정치, 문화, 사회 전반의 속성에 대해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우선 저 발언은 북한의 붕괴를 전제로 하고 있는 건데, 북한의 붕괴 가능성은 별로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북한의 핵 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지난 3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안 2270호가 통과됐는데, 이 결의안 이후에도 북한이 경제적으로 쪼그라드는 징후가 없습니다. 심지어 지난 12일 북한에서는 대동강 맥주 축제를 했다고 합니다. 곧 붕괴할 나라의, 그것도 수도에서 맥주 축제를 하겠습니까?
이번 달에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역을 다녀온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제재 이후에도 북한 경제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만난 중국인 대북 사업가에 따르면 북한 경제는 전혀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고 제재로 인해 북한 주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제재 때문에 북한 경제가 어려워지고. 그래서 북한의 민심이 곧 폭발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북한과 중국 간에 심야에 이뤄지는 물자 왕래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북한에 필요한 물자가 들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가 역시 몇 년 동안 큰 변동이 없고 달러 환율도 크게 부침이 없는 상황입니다.
또 이번 달에 평양에 다녀온 한 인사에 따르면, 제재에도 불구하고 평양 내에 자동차가 늘었다고 합니다. 특히 택시와 버스가 많아졌다고 하는데요. 밤에는 깜깜했던 평양 곳곳에 불빛이 많이 보였다고도 전해집니다. 물론 평양이 보여주기 위한, 이른바 '쇼윈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는 분명히 변화된 모습이기도 합니다.
안보리 차원의 대북 제재가 이뤄지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북한 내에서는 이미 돈주들이 물건을 확보해 놓았다가 물가가 올라갈 때 풀고 떨어지면 조이는 식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 현지의 전언입니다. 이들이 물가를 조절하고 있다는 겁니다. 북한의 돈주는 사실상 권력과 연계돼있는 자본가들입니다.
북한 사회가 이렇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남쪽에서 "김정은 배반하면 너희들 용서해줄게" 라는 말을 해봐야 먹혀들기가 어려운 겁니다.
물론 실제로 김정은을 배반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지만 가능성은 상당히 낮습니다. 독재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생존이 먼저입니다. 김정은이 2013년 장성택을 처형했을 때 북한 사람들은 김정은이 잔인하다고 욕하기 보다는 그 앞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을 겁니다.
결국 8~9월이 되면 북한이 손 들고 나올 거라는 박근혜 정부의 예상은 이미 어긋나버렸습니다. 그 다음엔 뭐라고 할까요? 첫 눈이 지나면 북한이 손 들고 나올거라고 할까요?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프레시안 :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건데요. 박근혜 대통령이 처음 취임했을 때 남북관계에서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발표했고 외교‧안보에서는 동북아 평화 협력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을 제시했죠. 그런데 취임 이후 3년 반 만에 이 모든 게 없어져 버렸습니다. 사실상 공약을 파기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습니다.
정세현 : 박 대통령이 취임 직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처음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햇볕정책 버전 0.8 정도는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북 간에 작은 신뢰를 쌓아 나가고, 이후 신뢰가 구축되면 그걸 동력으로 북핵 문제까지 풀겠다는 구상이었죠.
그런데 2014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 협력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모두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통일 대박이 흡수통일을 전제로 한 구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은 당시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이러한 구상을 준비했습니다. 또 2013년 연말 남재준 당시 국정원장이 '2015년 자유민주주의 체제 통일론'을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이는 정권 핵심부가 이미 북한 붕괴와 흡수 통일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흡수 통일을 상정하고 있는 박 대통령이 통일 대박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통일 비용에 대한 저항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실제 북한이 붕괴하면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 아래, 이명박 정부 때 이미 통일 비용이 얼마나 들어갈지 계산한 적도 있습니다. 당시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했을 때 들어가는 비용이 갑작스럽게 통일을 했을 때와 비교해 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당시 통일세 도입을 이야기하면서 통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의 반발이 커졌죠. 통일세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면서 통일 준비를 한다고 '통일 항아리'까지 만들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본 박근혜 정부는 통일 비용에 대한 반발을 사전에 예방한답시고 통일 대박이라는 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그해 3월 박 대통령은 구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연설을 합니다. 저는 이 연설을 보면서 북한을 상대로 한 제안인데 막상 여기에 북한 '당국'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레스덴 선언의 상당 부분은 다 우리가 직영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농촌이 피폐하고 산림이 황폐화됐다면서 개발을 하겠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건 북한의 경제 활성화 전략이지, 대북 관계 개선의 메시지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드레스덴 선언에는 북한의 당국은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베풀어주면 북한은 받아야 한다는 숨겨진 논리가 있었습니다. 이걸 보고 확실히 북한 붕괴론을 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드레스덴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상징성도 있습니다.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는 이곳에서 연설을 통해 마르크(독일의 화폐 단위)를 원하면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한다면서 1990년 3월 독일 통합 의회 선거에서 자신의 소속 정당인 기민당을 선택해달라고 했습니다. 동독의 붕괴를 상정한 연설이었죠. 이런 곳을 택해서 저런 내용의 연설을 한 것은 결국 북한의 붕괴가 머지 않았고, 이후 상황을 대비하겠다는 뜻으로 비쳐지기에 충분합니다.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취임 3년차였던 2000년 3월 9일 베를린에서 연설을 갖고 북한에 경제 지원을 제안하고 남북 당국자 간 경제 협력을 촉구했습니다. 또 북한 내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투자보장 협정, 이중과세 방지 협정 등을 맺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더불어 북한의 농업구조 개혁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게다가 베를린 연설 이틀 전에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연설 내용을 미리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밑거름이 돼서 결국 그해 정상회담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겁니다.
드레스덴 연설 이후 박 대통령은 주변 국가들에게 동북아 평화 협력 구상과 통일을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통일하려고 할 때 잘 관리해서 너희들한테도 혜택을 줄 수 있으니 견제하지 말라 또는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남북관계는 지금보다야 낫지만, 사실상 돌아가는 별로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북아 평화 협력 구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허황된 것이라는 생각에 1층 없는 2층집이 있을 수 없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습니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까지 여행하겠다는 소녀 시절의 꿈을 이루고 싶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재밌는 건 북한 붕괴를 전제한 이야기인데, 그 열차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연결됐던 선로를 이용한다는 겁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남북관계 및 외교‧안보 정책이 상당 기간 동안 잘 이행되길, 그리고 그 정책이 진심이길 바랐던 것 자체가 너무 나이브한 태도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25년 전부터 '북한 붕괴'…지금은?
프레시안 : 이명박 대통령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쓰러졌던 2008년 8월, 북한의 붕괴가 멀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말 장성택 당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처형 이후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정세현 :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성택 처형과 김정은 체제 붕괴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쁜 짓을 한 놈이 빨리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심정은 인지상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주로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김정은이 장성택을, 즉 자신의 고모부를 무자비하게 죽였기 때문에 인민들은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민심의 이반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본 모양인데, 독재 국가에서는 무자비한 놈에게 귀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김정은이 장성택을 처형했을 때 저 '나쁜 놈'이라는 생각보다 생존을 위해 '진짜 무섭다,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이런 정도의 판단력도 못하는 사람들이 대통령 주위에 있다는 것이 비극이죠.
프레시안 :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 흐름을 보면 보수 정권 내에서는 북한 붕괴에 대한 기대 심리가 대북정책에 계속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세현 : 6자회담이 2008년 이후 중단된 것도 이러한 측면에 기인합니다. 북한이 붕괴되면 우리가 핵 무기를 통제할 수 있다는 계산도 있습니다. 보수 정권 내에서 기정사실화 돼있는 북한 붕괴론이 대외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대통령은 다를지라도 박근혜 정부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기본적인 흐름은 이어진 겁니다.
실제 올해 박근혜 정부는 지난 1월 북한의 핵 실험과 2월 장거리 로켓 발사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고 개성공단을 사실상 폐쇄했습니다. 여기에 사드 배치까지 이어졌습니다. 이게 모두 북한 붕괴론에 입각해 연결되는 조치입니다.
확성기 방송을 통해 북한 인민들한테 북한 체제가 나쁘다는 이야기를 계속하면 결국 북한 인민들이 봉기해서 붕괴가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또 개성공단을 막아버리면 공단에 근무하던 노동자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니까 대북 제재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고 이것이 북한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에서는 사드까지 배치하면 북한은 곧 무너진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북한이 사드를 무력화시키려면 군사적으로 투자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냉전 시절이던 1983년 3월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악의 제국' 소련에 대항해 미사일 방어망 구축을 선언했습니다. 이른바 '스타워즈'로 불리던 군비 경쟁인데요. 이에 소련은 여기에 대항하느라 막대한 국가 재원을 국방비로 쏟아 부었고 결국 해체 수순을 밟았습니다. 이처럼 북한도 군비 확충에 돈을 쓰다가 인민 경제의 투자 역량이 줄어들면서 결국 망하는 수순을 밟을 거라고 생각한 듯 합니다.
프레시안 : 북한 붕괴론이 벌써 25년 째 남한 사회를 떠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정세현 : 원래 북한 붕괴론이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겁니다. 냉전이 해체되면서 김일성이 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을테니 북미 수교를 하자고 했지만 미국은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했습니다. 북한이 곧 망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이와 유사한 생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다가 대패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은 전략적 폭격으로 북부 베트남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면 남쪽의 공산당 조직인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후방기지를 없애버릴 수 있고, 이렇게 되면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 정부가 베트남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에서 물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유물론적' 사고를 한 겁니다. 하지만 민심을 읽지 못한 미국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미국은 지금까지 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한 전쟁이나 외교 협상에서 이렇다 할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한창 갈등을 빚고 있을 때 미국은 이들을 중재하겠다면서 사실상 국민당 편을 들었습니다. 이후 국공 내전으로 사태가 확산되자 초기에 미국은 국민당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다가 공산당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노련한 외교술에 넘어가서 결국 나중에는 공산당 편을 드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미국은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한 뒤 미국은 자신들은 잘해보려 했지만, 국민당이 워낙 부패를 많이 해서 민심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밝혔습니다. 국민당은 전투에 능했지만 민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공산당은 전투에 지면서도 민심을 끌어 들여 결국 현재와 같은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일본 아래로 들어가 버린 한국
프레시안 : 그런데 지난 2014년 12월 말 한미일 3국은 군사정보공유 약정을 맺은 바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드를 배치가 현실화되면 이는 군사적으로 우리가 일본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는 건데요.
정세현 : 애초부터 미일 동맹과 한미 동맹은 격이 다릅니다. 미일 동맹이 A급이라고 한다면 한미 동맹은 B 마이너스 급 정도입니다. 미국 동아시아 정책의 우선순위는 일본인 상황에서 한일 양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급하게 합의, 한일 간 사이 좋은 모양새를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미국은 미일 동맹, 한미 동맹이라는 양 날개로 중국을 압박해 들어가는 모양새를 취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물론 양쪽 날개의 경중은 상당히 다릅니다.
프레시안 : 1963년 일본은 미쓰야(三矢)계획(쇼와 38년 합동군사계획)에서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군이 진출할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시켰습니다. 당시 이러한 구상이 이제 현실화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사드 배치는 한반도의 방위를 일본군에 맡기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는 행위니까요.
정세현 :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부터 이미 한국의 국제적 지위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더구나 지난해 자위대 해외 출병을 허용하는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지침이 만들어지면서 자위대는 미국의 병참 지원이라는 목적으로 어디든 출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는 한반도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헌법 3조를 근거로 일본 자위대가 북한 지역에 출병하더라도 우리와 협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남북한은 국제적으로 봤을 때 유엔 가입국이며 별도의 국가입니다. 일본은 이러한 점을 들어 남한의 관할권이 휴전선 위쪽에 미치지 않는다며, 남한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제법적으로는 우리가 반박하기 상당히 어려운 상황인 겁니다.
프레시안 : 사드 배치의 국제정치적 함의는 우리가 중국, 러시아와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것이고 또 미국과 일본의 군사 동맹 하위 파트너로 들어가는 것인데요.
정세현 : 신(新) 컨테인먼트 팔리시(Containment Policy‧봉쇄 정책, 미국의 전통적인 대중국 정책 중 하나. 냉전 기간 미국은 소련에 대한 봉쇄 정책을 폈으나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회귀' 정책 이후 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으로 전환했다. 편집자)에 하위 체계로 들어간 겁니다. 뭣도 모르고 미국의 대중국 압박 전략의 그물에 걸린 겁니다.
이런 의식구조를 가지고 일을 추진하니까 사드 배치하면서 이게 MD(미사일 방어체계)에 편입된 것은 아니라고 뻔뻔하게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드 배치가 곧 MD로의 편입이고, 이렇게 되면 결국 미국의 '컨테인먼트 팔리시'의 전초기지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북한을 압박할 줄만 알지, 중국‧러시아와는 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생각 안 하는 겁니다.
실제 러시아에는 나진-하산 프로젝트가 중단된 것에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극동 러시아 개발에 굉장히 열정적으로 움직였는데, 나진-하산은 북핵을 구실로 한국이 끊어버린 것 아닙니까? 또 여기에 사드 배치 이야기까지 나오다 보니 러시아 극동개발부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최근 한국에 "주권국가라면 주권 국가답게 행동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은 리우 올림픽에서 함께 찍은 남북 선수들의 사진을 올려두고 왜 남북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렇게 하지 못하냐며 따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권 국가인 한국이 남의 나라에 와서 해결해달라고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다음달 2일에 시작되는 동방 경제 포럼에 와서 유엔 안보리 2270호 이행과 북핵 문제 해결에 협조하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사전에 이야기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남북이 잘 지내야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추진할뿐만 아니라 가스 수출도 가능합니다. 러시아가 한반도를 상대로 소위 '장사'할 수 있는 아이템들이 이런 것들인데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이 강경 모드로 가니까 장사하기가 어려워지는 겁니다. 러시아가 사드 배치와 남북관계 경색에 민감해하는 이유가 군사 안보적인 것 외에 이런 측면도 있는 겁니다.
사드, 불가역적인 조치?
프레시안 : 사드 배치는 이제 사실상 불가역적인 조치 아니냐, 기정사실화된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드 배치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은데요.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됐는데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정세현 : 결국 국회, 국민의 힘으로 배치를 기정사실화 해나가려는 정부 정책을 자꾸 견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년 말에 배치 문제가 끝나지 않도록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더민주 의원들을 만나서 사드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했는데 저는 더민주에 국민의당 보다도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필리버스터든 뭐든 어떻게 해서든 사드 배치는 막아야 한다고 했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일이 진전되지 않도록 할 책임이 여러분들에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 중국을 다녀온 한 의원이 본인이 들은 이야기라면서, 사드의 레이더 탐지 범위가 900km인 것을 가져다 놓으면 중국이 불만을 제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신의주와 서울까지가 400km 정도 되는 상황에서 사드 레이더가 성주가 아니라 수도권에서 사용된다고 해도 중국이 안심할 수 있는 레이더 탐지 범위를 생각해보면 900km의 절반 정도인 것으로 가져다 놓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합니까? 또 정말 미군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더민주가 정말 사드 배치를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이에 대해 대응하겠다고 하면 중국에 가는 의원들을 격려해줄 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보내야 합니다. 양쪽에서 모두 의견을 들어보고 사드에 대한 정확한 입장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수권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보일 수 있는 겁니다.
국회가 사드 배치 문제를 좀 더 신경 써야 합니다. 사드 배치에 대한 비준 동의 권한을 행사하겠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물론 한미 양국이 사드를 배치하기로 합의한 형태가 조약인지, 협정인지, 약정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긴 합니다. 그렇다고 이게 실무적으로 협의하고 끝날 일은 아닙니다. 국가의 국익과 국민의 안전이 달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국민 여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설문조사 질문도 바꿔야 합니다. 사드의 득실을 모두 설명하고 찬성과 반대를 조사해야지, 북한의 핵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사드가 필요하냐고 물으면 누가 여기에 반대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었는데 반대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죠.
프레시안 : 일부에서는 지난 7월 6일 북한이 정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비핵화 협상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면서 이를 활용해서 남북 간 대화 물꼬를 트고, 이후 사드 배치 백지화까지 진행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세현 : 일단 북한과 대화하려면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하는 것부터 멈춰야 합니다. 사드 배치에는 전혀 변화가 없으면서 대화를 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또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면 대화 테이블에 마주 앉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공개적으로 대화를 제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드를 배치해서 북한을 압박하면서 갑자기 대화 제의는 왜 하는 것이냐는 국내 반발이 나올 겁니다.
물론 비공개 접촉은 할 수 있습니다. 압박을 세게 하면서 비공개 접촉 통해서 북한에 회담을 하자고 제안하면 가능할 수 있죠.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투명한 대북정책'을 하겠다며 비공개 접촉은 지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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