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은 8.15 광복절 경축사에선 '운명'이라는 단어도 사용했다. 사드 논란을 겨냥해 "우리의 운명이 강대국들의 역학 관계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는 피해의식과 비관적 사고를 떨쳐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사드 배치 결정이라는 주권적 선택은 가장 비주권적인 결과를 잉태하고 있다. 또한 사드 배치 결정으로 인해 "우리의 운명이 강대국들의 역학 관계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결기와는 정반대로 '주권과 운명의 타자화'가 가시화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최근 <인민일보>를 중심으로 드러나고 있는 중국의 사드에 대한 입장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 내 사드 배치는 중국의 안보를 침해하는 중대 사안이기 때문에 사드 대응은 "핵심 이익"에 해당된다. 둘째, 중국은 러시아와 연대해 한국과 미국이 "생각하지도, 감당하지도 못할 대응"에 나설 것이다. 셋째, 중국과 미국과의 무력 충돌 발생 시 사드가 배치된 한국은 최우선 공격 대상이 될 것이다.
"핵심 이익"이라는 표현 속에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중-러 대응에는 유엔 안보리에서의 공조 강화와 함께 전략 무기 협력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이 최우선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경고는 유사시 사드 기지에 대한 정밀 타격을 가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거칠지만 이게 중국의 입장이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만약 미-중 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해 사드가 대중국용으로 이용되면, 한국은 국제법적으로 중국에 군사적 적대 행위를 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는 중국이 사드 기지를 정밀 타격할 수 있는 국제법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주권적 의지와 관계없이 한국이 미-중 간의 무력 충돌에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너무 비관적인 시나리오가 아니냐는 반문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미-중 간의 국지적 무력 충돌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고,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개입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여지도 많지 않다.
'운명의 타자화'는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미국이 사드 기지를 중국용으로 사용할 것인가의 여부, 중국이 한국에 대해 군사적 보복을 취할지의 여부는 기본적으로 이들 나라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핵 시대 이후 강대국들은 전선을 상대방의 영토로까지 확대하는 걸 주저한다.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공멸의 위험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는 대리전이나 제3국에서의 전쟁이 대신해왔다. 내전과 국제전의 성격을 동시에 품고 있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그리고 최근 시리아 및 우크라이나 사태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사드는 한국이 강대국들 사이의 전쟁터가 될 위험을 키우고 있다.
전쟁터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지 않더라도 사드는 국가 안보에 두고두고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사드 배치는 어떤 형태로든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적 대응을 촉발할 공산이 크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군사적 적대국은 하나에서 셋으로 늘어나게 된다. 더구나 사드는 북핵을 잡는 데에 무용지물이다.
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전략적 사고가 절실하다"는 박 대통령의 발언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에게 절실하게 해당된다. 대통령이 이럴 의지도 능력도 없다면, 국회와 국민이 나서야 한다. 대통령의 유체이탈식 화법에 우리의 주권과 운명도 이탈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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