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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너 냄새 때문에 뽀뽀도 못했는데...."

[현대조선 잔혹사] 원청 사장실 점거한 노동자들

연일 조선업의 구조 조정, 그리고 하청 노동자의 대량해고가 신문지면을 채우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12년 <프레시안>에 연재된 '위험의 양극화, 산재는 왜 비정규직에 몰리나', 2015년 연재된 '조선소 잔혹사', 그리고 지난 6년간 허환주 기자가 조선소를 취재하며 쓴 기사들을 바탕으로 <현대조선 잔혹사>(허환주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라는 책이 발간됐다. <프레시안>에서는 책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 싣는다.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 '스토리 펀딩'을 진행 중입니다. 후원금액의 일부는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돕는 데 쓰입니다. ☞스토리 펀딩 바로가기)

"허 기자님이지예? ○○○가 연락처를 알랴 줘 이리 전화하는데예 지금 퍼뜩 창원으로 내려오이소. 여기 난리가 났다 아니라예."

수화기 너머로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흘러나왔다. 밤 11시, 고민 끝에 받은 전화였다. 나와는 안면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서울에서 창원까지 줄잡아 네 시간. 밤새 달려간다 해도 창원에 떨어지면 아침이 될 판이다. 그런데 다짜고짜 내려오라니?

이 시간에 오는 전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기자를 부담스럽게 하는 취재원들이다. 하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나를 연결해 준 사람은 내가 일하는 신문사의 중요한 필자였고, 상황도 다급해 보였다. 전화를 끊고 조용히 짐을 쌌다.

창원역에는 나를 '모시고' 갈 승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달리다 바퀴라도 빠질 모양새였지만 여기까지 나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경상남도 진해 바닷가에 위치한 조선소. 선박 블록을 제작하는 회사로 대형 조선 3사의 사외 하청업체다. 그날은 30여 명의 노동자들이 사장실을 점거하고 농성 중이었다. 대부분이 40~50대 여성들이다.

내게 전화한 사람은 전용수 씨였다. 그는 2003년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 노조에 가입했다 쫓겨난 노동자였다. 이후 STX조선해양, 오리엔탈정공 등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보따리 하청 노동자’가 됐다.

"여기 사람들 다 사연이 구구절절하다니깐. 허 기자가 이 사람들 인터뷰 좀 해줘요. 그거 해달라고 여까지 부른 거요. 기자가 이런 사람들 취재해서 살아 있는 기사 써야 되는 거 아닌교."

서울에서 기자가 왔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이목이 집중됐다. 저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오죽했으면 그 새벽까지 사장실을 점거하고 있을까. 숨 돌릴 틈도 없이 불특정 다수와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김명자 씨(48)는 배에 붓질을 하는 도장공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도 9년이나 됐다. 그전에는 10년 넘게 조그만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다 회사가 망해 퇴사했다. 30대 후반 나이에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드물었다. 그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식당보다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이 일을 시작했다.

그녀가 지난 9년간 해온 일은 일명 '터치업', 용접 부위나 페인트 분무가 안 되는 틈새에 붓을 들고 다니면서 페인트칠을 하는 일이다. 그녀의 일을 두고 업계에서는 ‘개미가 자동차를 도색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배라고 하면 어선이나 유람선 정도를 생각하지만 김 씨가 작업하는 배는 주로 대형 컨테이너선이다. 20피트(약 6미터)짜리 컨테이너 8600개를 실을 수 있는 대형 8600TEU급 컨테이너선의 경우, 길이 323미터, 높이 25미터, 폭 46미터에 이른다. 축구장의 세 배 규모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이런 곳을 손바닥만 한 붓으로 칠해야 하니 일은 고될 수밖에 없다. 배 안쪽 바닥에 페인트칠을 할 때는 일자 사다리를 타고 건물 7층 높이를 오르내려야 한다. 한번 내려갔다 올라오는 데 걸리는 시간도 상당하다. 작업반장의 눈총이 부담스러워 용변도 작업장 한쪽 구석에서 해결하고 점심시간 말고는 아예 오르내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배 구석구석 페인트칠을 하다 보면 온몸이 페인트 범벅이 된다. 그래서 최대한 몸을 감싸고 눈만 내놓고 일하는 게 기본이다. 그러다 보니 한여름이 더욱 고되다. 사방에 깔린 철판이 햇볕에 달궈져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렵다. 한창 뜨거울 때는 신발 밑창에서 타는 냄새가 날 정도다.

반면, 탱크 안에서 일할 때는 햇볕이 없어 곤욕이다. 조그마한 소형 랜턴 하나에 의지해 붓질을 해야 한다. 자칫 탱크 안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탱크는 보통 생각하는 물탱크가 아니다. 5층 아파트 규모의 탱크 안에는 이런저런 칸막이와 사다리 등이 복잡하게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김 씨와 함께 일하던 동료가 탱크 안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작업이 끝난 뒤 탱크 문을 잠갔다. 그는 다음날 아침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가스 과다 흡입이었다. 탱크 안에는 유독 가스가 가득 차 있어 주기적으로 환기를 해줘야 한다. 탱크 문을 잠그면서 환기 시설도 꺼버리는 바람에 낳은 참사였다.

작업환경이 이렇다 보니 몸에는 늘 이상 징후가 있다. 생리가 일정하지 못한 건 흔한 일이고, 김 씨는 알레르기성 비염을 달고 산다. 다른 동료들도 비슷한 병을 앓고 있다. 작업장 내에서는 '여자가 여기서 일하려면 애 다 낳고 와야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김 씨가 사용하는 페인트는 특수 페인트로 독성이 강하다. 일한 다음 날 아침에 소변을 보면 시너 냄새가 진동한다. 호흡기를 통해 마신 시너가 그대로 신체에 축적되는 것이다. 일하고 난 뒤에는 한동안 입에서도 시너 냄새가 지워지지 않아 아이들에게 뽀뽀도 할 수 없다. 발톱도 새까매지고 손톱은 늘 갈라져 있다.

김 씨가 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것은 2011년 6월. 그전에는 경상남도 통영에 있는 조선소 사내 하청 노동자로 일했다. 집이 부산이라 숙소 생활을 했다. 경상남도 진해에 위치한 조선소 내 하청업체로 옮긴 건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어서다. 가족과 저녁밥이라도 같이 먹는 게 김 씨의 소원이었다.

하지만 출퇴근도 만만치는 않다. 부산 해운대 근처에 사는 김 씨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통근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조선소는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을 하지만 잔업 때문에 대부분은 7시가 되어야 끝난다. 집에 도착하면 대개 9시가 넘으니 사실 저녁밥 같이 먹긴 하늘에 별 따기다.

일도 일이지만 남성 작업반장의 치근거림도 참기 어려웠다. 반장의 눈 밖에 나면 고된 일에 배치된다. 현장에서는 작업반장이 절대 권력자다.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술을 마셔 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정규직, 즉 원청 직원과의 차별도 사람 마음을 옹졸하게 만든다. 통근 버스에도 정규직 자리가 지정돼 있는데, 그런 자리는 비어도 함부로 앉지 못한다. 정규직 직원이 나오지 않는 날에는 온수도 나오지 않아 찬물로 샤워를 한다. 정규직 퇴근 시간이 지나면 기본 전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끊긴다.

그렇게 두 달 넘게 일하다 얼마 전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접했다. 하청업체 대표이사가 원청으로부터 받은 공사 대금 8000만 원을 들고 잠적했다. 대표의 잠적으로 김 씨를 포함한 100여 명의 하청 노동자가 1억7000여만 원의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됐다. 김 씨는 최근 두 달 치 임금을 받지 못했다. 하청업체가 원청에 공탁금을 걸어 놨다면 그 돈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지만 이 회사는 그런 것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비슷한 처지의 하청 노동자 30여 명과 원청업체 사장실을 점거했다. 공탁금을 걸지 않고 하청업체를 받아들인 원청 책임도 컸기 때문이다.

"하청업체가 돈을 가지고 튀었는데 원청에서는 자기들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어요. 우리는 정규직과 똑같은 작업복을 입고 일해요. 회사 통근 버스도 같죠. 안전 교육도 모두 원청에서 받았죠. 그런데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하니 답답할 따름이에요."

김 씨가 일하다 돈을 떼인 건 처음이 아니다. 과거에도 다른 사내 하청에서 두 달간 일한 돈을 받지 못했다. 하청업체 사장은 지금과 같이 공탁금 한 푼 걸지 않았다. 그러고는 원청으로부터 선수금을 받고 지금과 같이 잠적해 버렸다. 고소도 하고 별의별 짓을 다 했지만 돈을 돌려받을 수 없었다. 당시에도 원청 조선소에 책임을 묻고 싶었지만, 노동부 근로감독관마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포기를 종용했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생기니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을 당한 건 김 씨만이 아니었다. 도장 전에 철판을 갈아 녹이나 불순물을 제거하는 그라인더 작업을 하는 전수환 씨(46)도 마찬가지였다. 돈을 떼이는 일이 하도 많아서 이번에는 공탁금이 걸려 있는지 확인하고 일을 했는데, 또 이런 일을 당한 것이었다. 그렇게 인터뷰는 동이 틀 때까지 이어졌다.

그날은 사장실 구석에서 쪽잠을 잤다. 달리 잘 곳도 없었다. 세 시간 정도 지났을까. 도망친 하청업체 사장 부인이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약속이 지켜질지는 알 수 없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 복잡하고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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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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