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조선업의 구조 조정, 그리고 하청 노동자의 대량해고가 신문지면을 채우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12년 <프레시안>에 연재된 '위험의 양극화, 산재는 왜 비정규직에 몰리나', 2015년 연재된 '조선소 잔혹사', 그리고 지난 6년간 허환주 기자가 조선소를 취재하며 쓴 기사들을 바탕으로 <현대조선 잔혹사>(허환주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라는 책이 발간됐다. <프레시안>에서는 책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 싣는다.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 '스토리 펀딩'을 진행 중입니다. 후원금액의 일부는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돕는 데 쓰입니다. ☞스토리 펀딩 바로가기)
해병대를 나온 김병욱 씨는 전역 직후인 2001년 4월, 비파괴검사 전문 KNDT&I(주) 울산출장소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구인 광고를 보고 지원서를 냈다. 해병대 출신으로 건강했던 그는 무난히 입사 통보를 받았다. 회사에서 그가 맡은 일은 비파괴검사. 방사선 등을 이용해 선박 용접 부위에 결함이 있는지 살펴보는 작업이다. 업무는 주로 현대중공업, 진명기업, 세진중공업 등으로부터 위탁받았다.
작업은 주간조와 야간조로 운영됐다. 주간에는 초음파나 자력을 이용한 검사가 진행됐고, 방사선 투과 검사는 야간에 집중됐다. 낮에 방사선 투과 검사를 하면 선박 내 다른 노동자가 피폭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 씨가 하는 일의 경우 작업자가 방사선에 오래 노출되는 일이 없도록 주간조와 야간조가 번갈아 가며 일하도록 규정돼 있다. 2주간 야간 일을 하면 1주간은 주간에 일을 하는 식이 업계 관행이다. 하지만 김 씨가 속한 조는 주간에 1주일을 일하면, 야간 일은 연속 3주, 심지어는 연속 12주까지 한 적도 있었다. 나중에 따져 보니 김 씨의 근무 일정은 10년 내내 야간 근무 위주로 짜여 있었다.
더구나 김 씨는 입사 이래 안전 교육조차 받아 본 적이 없었고, 회사는 안전 장비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방사선 투과 검사를 할 때는 피폭 정도를 알 수 있는 휴대 안전 장비(필름배지, 포켓 선량계, 알람 모니터, 서베이 미터 등)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김 씨는 보통 방사선 노출 여부를 알려 주는 알람 모니터만 휴대하고 작업을 했다.
나머지 보호 장비는 몇 번 구경도 못했다. 작업 시 항상 휴대해야 하는 필름배지도 마찬가지다. 김 씨는 회사에서 피폭 사고가 나거나 원자력안전위원회 검사관들이 안전 검사를 하러 올 때만 잠시 필름배지를 받았다. 작업자의 피폭량을 알려 주는 필름배지는 회사가 직원들로부터 일괄 회수해 관리했다. 원자력법에 따르면 방사선 작업 종사자의 피폭선량한도는 1년에 50밀리시버트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5년간 1백 밀리시버트로 규정돼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선량한도를 초과하지 않고서는 작업을 할 수 없어 필름배지를 사업주가 일괄 보관한다고 했다.
안전 수칙도 마찬가지다. 방사선 투과 검사는 반드시 2인 1조나 3인 1조로 팀별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방사능에 노출되면 위험하므로 교대로 작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김 씨는 대부분 혼자였다. 하루 최대 작업량도 지켜지지 않았다. 2인 1조일 경우에도 최대 50장 이상 찍는 걸 금지하고 있지만 김 씨는 혼자서 평균 2백 장, 많을 때는 3백, 4백 장도 찍었다.
그렇게 필름배지도 알람 모니터도 없이(고장으로 반납한 상태였다) 작업을 이어 가던 어느 날, 출근해 보니 사무실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너 괜찮냐?"
관리소장이 물었다. 전날 김 씨가 일할 때 사용한 방사선 투과 검사기에서 방사선이 새고 있던 것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김 씨는 그것도 모르고 하루 종일 방사선에 노출된 채 작업을 했던 셈이다. 필름배지도 휴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폭량 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괜찮다고만 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그는 10년을 일했다.
당연히 몸 속은 피폭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렸다. 방사선을 취급하는 작업자는 매년 의무적으로 혈액 검사를 하게 돼 있다. 2001년 입사 당시 정상이었던 백혈구 수치가 2006년 혈액 검사에서는 정상 이하로 떨어졌다. 그러나 회사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김 씨는 계속 야간조에서 방사선 투과 검사를 했다.
그러다 2010년 발가락 염증이 낫지 않아 병원에서 혈액 정밀 검사를 받았다. 골수형성이상증후군 판정을 받았다. 항암 치료를 시작했지만 이미 손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물론 이는 김 씨만의 일이 아니었다. 김 씨가 일한 KNDT&I에서 야간조 노동자 20명 중 김 씨를 포함한 네 명이 혈액 관련 병을 얻었다. 2007년에 입사한 조 씨가 2009년에 백혈병 판정을 받았고, 또 다른 노동자 한 명이 골수형성이상증후군 진단을 받고 원자력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외에도 노동자 한 명이 혈액 수치 이상으로 특별 관리 대상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비파괴검사 노동자들은 특별교육은 물론 정기 교육조차 거의 받지 못하며, 필름배지는 아예 사업주가 관리하고 있었다. 2010년, 김 씨가 일한 업체를 대상으로 한 교육과학기술부의 역학조사 결과에서도 이런 상황은 명확히 드러났다. 당시 교과부는 방사선 피폭선량을 확인하기 위해 업체에 김 씨의 필름배지를 요구했지만 업체는 제출하지 않았다. 필름배지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다른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역학조사 과정에서 업체 관계자는 "개인 피폭선량을 초과하게 되면 일정 기간 동안 작업을 시킬 수 없다"며 "필름배지 같은 경우, 회사에서 일괄 보관, 관리하는 게 현실이다"라고 진술했다.
이는 김 씨가 다니던 업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전국에 비파괴검사 업체는 50여 개, 종사자는 5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 대부분은 김 씨와 비슷한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2005년 과학기술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04년 방사선 피폭량이 20밀리시버트 이상인 56명 중 48명이 비파괴검사업체 종사자였다. 지난 2007년부터 3년간, 기준치를 넘겨 방사선에 피폭된 노동자 10명 중 9명이 비파괴검사원이기도 했다. 비파괴검사 노동자가 이직이 잦고, 교과부 통계에 잘 잡히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비파괴검사는 배를 만드는 업체 입장에서는 꺼리는 작업이다. 방사능과 관련한 작업이라 문제가 생길 게 뻔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규제나 기준도 실은 없다. 하지만 선박 발주처에서 요구할 경우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니 업무를 하청에 떠넘겨 외주화한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도 후회됩니다. 왜 그리 회사의 이익을 위해 죽어 가는 줄도 모르고 억척스럽고 어리석게 일했는지……생각하면 답답하기만 할 뿐입니다. 치료라도 제때 잘 받아서 다시 건강했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십시오."
병상에서 쓴 김 씨의 경위서는 여기서 끝이 났다. 김 씨는 경위서를 쓴 지 1년여 만인 2011년 9월 29일, 서른여섯 해 삶을 마감했다. 김 씨와 함께 일했던 동료 한 명도 이듬해인 2012년 3월 4일,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김 씨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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