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조선업의 구조 조정, 그리고 하청 노동자의 대량해고가 신문지면을 채우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12년 <프레시안>에 연재된 '위험의 양극화, 산재는 왜 비정규직에 몰리나', 2015년 연재된 '조선소 잔혹사', 그리고 지난 6년간 허환주 기자가 조선소를 취재하며 쓴 기사들을 바탕으로 <현대조선 잔혹사>(허환주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라는 책이 발간됐다. <프레시안>에서는 책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 싣는다.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 '스토리 펀딩'을 진행 중입니다. 후원금액의 일부는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돕는 데 쓰입니다. ☞스토리 펀딩 바로가기)
조선소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을까. 더 있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았다. 취재도 거의 마무리되고 나니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졌다. 마음이 떠나니 하루하루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열이틀 만에 신문사에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알렸다. 이제는 작업장에 알려야 할 차례. 하루 일을 마치고 어둑해질 무렵, 현장 사무실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담배를 태우던 작업소장에게 주뼛주뼛 다가갔다.
"더는 일을 못할 것 같아요. 서울에 계신 부모님이 그만 올라오라고 하네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서투른 내게 하나하나 세세하게 일을 가르쳐 주고 배려해 주던 곳이다. 그런데 그만둔다는 말을 들은 작업소장이 빙그레 웃었다.
"그동안 수고했어요."
그 한마디가 전부였지만 내게는 오만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정리할 건 없었다. 그간 입었던 작업복과 신발, 그리고 출입 카드만 반납하면 끝이었다. 동료들과 인사를 나눌 처지도 아니었다. 얼마 일하지도 않은 내가 그들의 '동료'일 수는 없었다. 그들 눈에는 내가 남긴 작업복과 신발만 보이는 것 같았다. 천연덕스럽게 내 치수를 물어보면서 남겨진 작업복을 자기 몸에 이리저리 대본다. 여기는 작업복을 사비로 사야 하니 그들에겐 얼마 입지 않은 작업복을 공짜로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씁쓸히 현장 사무소를 나오는데 사수가 나를 불러 세웠다.
"행님요, 서울 가면 꼭 연락할 테니 연락 씹지 마요. 알았죠? 행님이랑 술 한잔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네예. 마이 아쉽다 아닌교."
고맙다 못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2인 1조로 일하며 하루 종일 붙어 지냈던 사수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선소 안에서는 모두가 대화도 없이 각자 일만 할 뿐이었는데, 유독 나를 잘 챙겼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어렸지만 내게는 형 같았다. 서툴기 짝이 없는 나한테 짜증 한번 낸 적이 없었다.
"행님요, 나는 이 조선소가 싫어예. 일이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그보다는 서로가 너무 정이 없어. 지는 그게 갑갑하다 아닌교."
고된 일을 하면서 웃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말도 잘 붙이고, 농담도 자주 했다. 위장 취업 사실을 이 사람에게만은 털어 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내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리던 차에 조금이라도 신세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저도 좀 마음이 그러네요. 혹시 시간 되면 제가 술 한잔 사도 될까요?"
사수는 흔쾌히 자기 동네로 안내했다. 사수가 잘 아는 고깃집이 있다고 했다. 정육점과 함께 하는 식당이라 고기가 신선하단다.
허름한 시장 인근이었다. 둘이 마주 앉아 고기가 나오기도 전에 연거푸 술잔을 꺾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안주라도 잘 먹이고 싶었다. 나는 호기롭게 소고기를 주문했다.
"행님요. 머 한다고 이런 것까지 시키는교. 무리하는 거 아니라예? 우쨌든 행님 덕분에 간만에 소고기 먹는다 아닌교."
휘둥그레진 눈이 이내 싱긋거렸다. 고기가 나오자 둘 다 전광석화처럼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를 먹었을까. 그가 갑자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행님요. 저기 …… 혹시 제 집사람을 불러도 되는 거라예? 아내가 셋째를 임신하지 않은교. 출산 날 얼마 안 남았으라예. 근데, 내가 못나서 이 친구 고기 한번 제대로 먹여 본 적이 없다 아닌교. 민망한데, 아내 불러서 고기 좀 먹여도 되는교? 말 꺼내고 보니 미안하네예. 해본 말이니 그냥 잊으라예."
한숨이 나왔다. 그놈의 고기가 뭐라고. 아내가 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오는 사이, 사수는 자기 이야기를 하나둘씩 풀어놓았다.
올해 서른을 넘긴 사수 서민진 씨는 조선소에서 일한 지 9년이 됐다. 딸이 둘인데, 다음 달엔 셋째 딸이 태어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애들 먹여 살리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조선소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래저래 방황을 많이 했다. 술 먹고 사고도 많이 쳤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서 씨를 군대에 보냈다. 전역하고 집에 온 날, 자신의 손을 잡고 조선소로 향하는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아버지도 조선소 하청업체에서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자신이 다니는 하청업체 사장에게 굽실거리며 마련한 취업 자리를 마다할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더는 부모님께 누를 끼칠 수 없었다. 막상 일을 해보니 스물세 살 청년이 하기에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퇴근하면 실신하듯 잠이 들었다. 자명종을 맞춰 놓아도 늦잠을 자버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지각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늘 서 씨를 깨워 함께 통근 버스를 탔다.
그렇게 2년을 일했다. 이제는 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었다. 그런 서 씨가 아버지는 뿌듯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소주 한잔 하자는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보다 일찍 끝난 서 씨는 먼저 퇴근해 집 근처 아버지와 자주 가던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기다리던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가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잔업을 마치고 귀갓길 회사 통근 버스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보상금은 고사하고 산재 신청도 하지 못했다. 회사에서는 아버지가 눈을 감을 때는 일하던 중이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심장마비와 작업환경 간의 연관성을 밝혀야 하는데 그런 지식도, 여력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억울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는 다시 묵묵히 통근 버스에 올랐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아이에겐 자신과 같은 삶을 물려주기 싫었다. 아내와 상의 끝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안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느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하루 일하면 7만5000원을 받았다. 2만5000원을 하루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 5만 원은 저금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돈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비가 오거나 몸이 아픈 날에는 일을 할 수 없었다.
명절 때 차비가 모자라 고향에 못 간 적도 있었다. 돈이 없어 끼니를 굶기도 했다. 그렇게 8개월을 버티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조선소가 싫어 조그마한 제조업 공장에 들어갔다. 나사를 조이는 단순한 일이었다. 하지만 100만 원 남짓한 돈으로는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예전에 다니던 조선소에 다시 들어갔다. 조선소 일이 그나마 한 푼이라도 더 가져갈 수 있었다. 그 후 지금까지 서 씨는 이곳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도돌이표 인생인 셈이다.
"아내는 인터넷 게임 하다 만났지예. 요즘도 퇴근 후에는 아내와 게임을 하고 있다 아닌교."
아내는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셋째까지 태어나니 걱정이 많겠다고 했더니 '열심히 살면 되지 않겠느냐'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물정 모르면서 넘겨짚은 내가 되레 머쓱해졌다.
불콰해질 정도로 마셨지만 취재를 위해 이곳에 왔다는 말은 끝내 꺼낼 수 없었다. 대신 나는 고기 몇 근과 케이크 한 상자를 그에게 안겼다. 손사래 치며 안 받겠다는 것을 억지로 아내 손에 쥐어 줬다.
사수와 아내는 택시 타는 길까지 와서는 날 배웅했다. 서울 가면 꼭 연락하겠다고 했다. 나도 몇 번을 끄덕거리고 택시 시트에 몸을 뉘었다. 한참 동안 손을 내리지 못하는 사수의 모습이 뒷거울에 비쳤다. 나도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의 조선소 생활도 그렇게 '안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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