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조선업의 구조 조정, 그리고 하청 노동자의 대량해고가 신문지면을 채우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12년 <프레시안>에 연재된 '위험의 양극화, 산재는 왜 비정규직에 몰리나', 2015년 연재된 '조선소 잔혹사', 그리고 지난 6년간 허환주 기자가 조선소를 취재하며 쓴 기사들을 바탕으로 <현대조선 잔혹사>(허환주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라는 책이 발간됐다. <프레시안>에서는 책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 싣는다.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 '스토리 펀딩'을 진행 중입니다. 후원금액의 일부는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돕는 데 쓰입니다. ☞스토리 펀딩 바로가기)
자식을 잃은 어미는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얼마나 흘러야 그 눈물이 멈출 수 있을까. 시종 가슴을 쥐어뜯으며 눈물을 터뜨렸다. 어미는 죽은 자식을 가슴으로 품는다고 했던가.
지난 5월 28일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을 하던 김 씨(19)는 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역내로 들어온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여 사망했다. 잔인한 죽음이었다. 자식의 죽음을 뒤늦게 확인한 어미는 오열, 아니 절망했다. 아침만 해도 웃으며 인사하던 아들이 온몸이 부서져 차가운 안치실에 누워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죽은 아들을 봤습니다. 머리털이 피에 붙어...(울음) 20년을 키운 어미가 아이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처참한 모습이...(울음) 우리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길을 지나갈 때, 뒤통수만 봐도 우리 아들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데, 아무리 봐도...(울음) 뒤통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절대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는데. 짙은 눈썹과 벗어놓은 옷가지를 보니, 우리 아이가 아침에 입고 나간 옷이 맞았습니다... (울음)"
자식의 죽음에 자책하는 부모
김 씨 어머니는 자기가 자식을 죽인 거 같다고 오열했다. 정직하고 책임감 있게 상사가 시키는 일을 잘 하라고 했는데, 그게 자식을 죽인 원인 같다고 했다. 자식의 죽음을 자책하는 어미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한 명의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가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아버지 이만우(57) 씨였다.
현대중공업 도크에서 블록 작업을 하던 이 씨 아들은 크레인에 실려 이동 중인 다른 블록에 부딪혀 12미터 아래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사고로 아들은 우측 두개골 골절 및 뇌출혈상으로 의식불명 상태가 됐다.
당시 상황을 종합해보면, 작업자들은 블록 작업을 마친 뒤, 블록을 크레인에 매달고 이동 중이었다. 하지만 균형이 어긋나 블록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래서 다른 블록 위에서 작업을 하던 아들이 흔들리던 블록에 맞아 도크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도크는 각각의 부품, 즉 블록을 결합해 선박을 완성하는 곳이다. 아들과 다른 업무를 하던 작업자들은 새로 결합할 블록을 크레인에 매달고 이동 중이었다. 블록을 크레인에 매달 때는 좌우 균형을 잘 맞춰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내 균형이 어긋난 블록이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주위에 있던 아들이 블록과 부딪치면서 사고가 발생했다. 또 다른 블록의 벽면에 매달려 작업을 하던 이 씨 아들은 블록이 다가오는 것을 미처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크레인으로 블록을 나를 때 신호수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블록이 움직일 동선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대피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하청 업체가 운반해야 하는 블록 안에 사람이 있는지만 확인하고 곧바로 블록을 이동시킨 게 사고의 원인이었다. 그의 나이 고작 스물여덟이었다.
고인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유가족 인터뷰는 가장 힘든 인터뷰 중 하나다. 울산대병원 뒤편에서 담배를 태우는 아버지 이만우 씨가 보였다.
“서울서 이까지 오느라 욕 좀 봤겠소. 이야기는 좀 있다가 합시다.”
아직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이 정리되지 않았다. 아버지 이만우 씨는 아들의 장기를 모두 기증하기로 했다. 기증 절차를 위해 의사를 만나고 온 뒤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한참 뒤 다시 나타난 이만우 씨는 늦어서 미안하다며 담담하게 자기 아들과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아버지는 정규직, 아들은 비정규직
이만우 씨는 조선소 노동자다. 현대중공업 정규직이다. 1986년에 입사했다. 내년이면 일한 지 만 30년이 된다. 부산에서 생활하다 27세에 결혼했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다. 일은 험해도 조선소에서 일하면 목돈을 쥘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울산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딱 5년만 열심히 일하면 목돈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시 부산에 내려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선소를 떠나지 못했다.
그사이 자식들이 자랐다. 막내인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2년제 전문대에 들어갔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아들 ‘스펙’으로는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고민하다 졸업도 하기 전에 군에 자원입대했다. 아버지인 이 씨도 아들 생각만 하면 골치가 아팠다. 일자리 구하기가 그리 어렵다고, 가방끈 긴 사람들도 취업난에 허덕인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쓰였다. 아들은 정규직인 자신과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었다.
전역 후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붙들어 앉혔다.
"힘든 직업이지만 적응하기 나름이여."
아버지는 비정규직으로라도 조선소에 취업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어렵사리 건넸다. 아버지가 생각할 때, 2년제 대학 나와서는 답이 없었다. 남은 학기를 마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취업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나마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보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기회라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아들은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 뒤,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들은 얼마 뒤 조선소 직업훈련원에 들어갔다. 제대한 지 20일 만이었다.
그렇게 아들은 스물두 살 나이에 현대중공업 하청 업체 용접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성실하고 실력도 좋았다. 임금을 올려 줄 테니 오라는 제안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정규직 전환은 쉽지 않았다. 그런 제안을 해오는 건 모두 하청 업체들뿐이었다.
이 씨는 그런 아들이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아버지로서는 시대를 잘 타고난 것 말고는 아들보다 모든 게 부족했다. 하지만 자신은 정규직이고 아들은 비정규직이었다.
그사이 아들은 가정을 꾸렸고, 손주 둘을 안겨 줬다. 그렇게 6년이 흘렀다. 일을 마치고 회사 사람들과 회식을 하고 있는데 딸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 정욱이가 일하다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 왔어요. 빨리 오세요."
급히 택시를 타고 아들이 누워 있는 울산대학교병원으로 향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다. 수술하면 괜찮겠지. 병원에 도착하니 아들이 다니던 회사 대표를 비롯해 현대중공업 노조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아버지의 가슴은 내려앉았다.
내가 아들을 조선소에 취업시켜서 그런걸까
다섯 살 된 큰 손자는 연신 아빠를 찾았다. 한 번은 며느리가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을 가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비가 많이 오자 아빠들이 차를 끌고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손자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며느리에게 물었다.
"아빠는 어디 갔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며느리는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졌다. 자신이 아들을 조선소에 취업시켜 이런 결과를 만든 게 아닌가 자책했다. 아들이 병상에 누워 있는 내내 끊임없이 반문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 게 아닐까?
결단을 내려야 했다. 더는 차도가 없었다. 그만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꽃도 못 핀 아들이 한 줌 재로 돌아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 떠나더라도 다른 이에게 희망을 주었으면 했다. 아들 장기를 기증하기로 했다. 나중에 손주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아빠는 죽은 게 아니라 어디선가 남에게 희망을 주면서 살아가고 있어."
아버지 이 씨는 사고가 발생한 지 한 달여 만에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공교롭게도 아들이 떠난 날은 이 씨의 생일 전날이었다. 앞으로 자신의 생일날 아들 제사상을 차려야 한다. 경황이 없던 터라 이날이 자기 생일인지도 미처 몰랐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자기 생일 때문에 아들을 하루 더 붙잡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내가 정규직 노동자지만 아들과 같은 하청 노동자, 즉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나와 똑같이 일한다. 원・하청을 떠나 노동자들은 모두 같은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회사는 원・하청 등으로 나눠 노동자를 갈라치기 한다. 이것으로 사람 목숨의 가치도 구분하고 있다."
인터뷰 도중 이 씨에게 문자 한 통이 전달됐다. 한참을 물끄러미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이 씨가 허탈하게 웃었다.
"현대중공업에서 29년 동안 일했는데, 사장에게 생일 문자를 받기는 처음이다."
권오갑 현대중공업 대표이사가 이 씨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그 문자가 되레 아버지의 마음을 후벼팠다. 아들이 죽은 '덕분에' 사장에게 생일 축하까지 받은 이 씨였다. 자식의 죽음이 더욱 비통해졌다.
"아들을 조선소로 이끌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아버지의 자조는 공허하게만 들렸다. 아들의 죽음이 어디 아버지의 잘못인가. 하지만 자식을 잃은 아비의 자책은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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