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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꽉 막힌, 여기가 지옥이구나!"

[현대조선 잔혹사] 기자, 조선소에 취업하다

연일 조선업의 구조 조정, 그리고 하청 노동자의 대량해고가 신문지면을 채우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12년 <프레시안>에 연재된 '위험의 양극화, 산재는 왜 비정규직에 몰리나', 2015년 연재된 '조선소 잔혹사', 그리고 지난 6년간 허환주 기자가 조선소를 취재하며 쓴 기사들을 바탕으로 <현대조선 잔혹사>(허환주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라는 책이 발간됐다. <프레시안>에서는 책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 싣는다.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 '스토리 펀딩'을 진행 중입니다. 후원금액의 일부는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돕는 데 쓰입니다. ☞스토리 펀딩 바로가기)

여긴 어디일까?

사방이 꽉 막힌 공간.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조명 불빛을 따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세한 먼지와 철가루가 떠다녔다. 환기는커녕 햇볕조차 비집고 들어올 구멍이 없다. 바닥은 드릴과 철사 등 각종 장비와 자재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걷다가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바로 자빠질 것만 같다. 곳곳에서 용접 불똥이 폭포수처럼 떨어졌다. 철 가는 소리, 드릴 박는 소리, 쿵쿵 울리는 망치 소리, 철과 철이 부딪히면서 발생하는 파열음이 쉴 새 없이 귓구멍을 때리니 내 옆의 사수가 하는 말조차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동료들은 모두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하나같이 똑같은 하늘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푹 눌러쓴 안전모와 눈언저리까지 한껏 올려 쓴 마스크까지 하나같다. 1층에서 용접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3층에서 철을 자르고, 옆에서 페인트칠을 하던 사람이 어느새 2층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 모두가 비슷해 보이니 드는 착각이다. 그 사람들이 하나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보려면 얼마나 많은 눈빛을 주고받아야 할까.

공사판에서 험한 일 좀 해봤다고 가졌던 헛된 자신감은 조선소에 들어서자마자 사라졌다. 우선 규모부터가 나를 압도했다. 회사 정문에서부터 배가 떠 있는 바다까지는 1, 2킬로미터. 사내에서 대부분은 자전거나 스쿠터, 승합차를 이용해 이동한다. 큰길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선박에 장착될 각종 부속품을 만드는 공정이 한창이다. 이들 하나하나가 작은 공장 규모다.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집채만 한 크기의 블록 안에서 철을 주무른다. 10층 아파트 크기의 블록 안에 들어가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일을 시작한 곳은 배의 엔진룸 케이싱. 쉽게 말하면 배의 엔진 시설을 둘러싼 큰 상자다. 그렇다고 일반 컨테이너 박스 정도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큰 배의 경우 축구장 크기의 두 배에 육박하기 때문에 그런 배를 움직이는 엔진 크기도 그에 걸맞다. 엔진 크기에 따라 케이싱의 크기도 달라지는데, 어떤 날은 족구장 면적에 아파트 5층 정도 높이의 케이싱에서 일하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테니스 코트 면적에 아파트 10층 높이의 케이싱에서 일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살면서 그런 공간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과거 나는 경상남도의 작은 조선소에 위장 취업했다. 취재를 위해서였다. 고작 열흘 남짓 있었던 곳이지만 그곳 작업장의 풍경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면서 그런 공간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가 들어간 곳은 국내 빅3(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조선소가 아니다. 따지자면 이들 세 회사에 부품을 납품하는 하청업체가 재하청을 준 조선소였다. 세계 빅3라고 해도 무방할 이들 조선소에 비하면 내가 일한 곳은 레고 블록 만드는 곳 정도에 불과했다.

내가 들어간 공장은 배의 엔진룸 케이싱 내부의 파이프들에 단열재 붙이는 일을 맡아 하는 하청업체였다. 아파트 10층 규모의 공간은 복잡하게 얽힌 파이프들이 꽉 채우고 있었는데, 파이프 지름이 작은 건 1미터, 큰 것은 3미터를 넘었다. 이 파이프들 주변으로는 도로 배수구처럼 생긴 철제 통로가 배치돼 있다. 배 엔진을 수리할 때 사용하는 통로다. 이 철제 통로가 없는 파이프 주변에는 어김없이 족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한 층이 1.5미터 높이로 10층까지 이어져 있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거미줄이 펼쳐져 있는 것 같다.

첫날 나는 단열재로 감싼 파이프 위에 함석판을 씌우는 일을 맡았다. 함석판은 단열재가 공기 중에 날리는 것을 막기 위해 덧씌우는 일종의 미관용으로, 단열재로 감싼 투박한 파이프를 다시 함석판으로 둘러싸고 나면 꽤나 단정해져 마치 우주선 내부 같은 모습이 됐다.

함석판을 쥐고 있던 왼손이 뚫릴 뻔하기도

단열재를 붙이는 것보다는 덜 해로운 일이었지만, 얇은 함석판을 다루는 일이라고 해서 쉽지만은 않았다. 미리 파이프 모양에 맞춰 제작해 놓은 함석판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나사못으로 이를 파이프에 부착하면 되는데, 드릴조차 몇 번 써본 적이 없는 나는 정해진 위치에 구멍도 제대로 뚫지 못했다. 함석판 표면이 너무 매끈해 구멍을 내려면 드릴에 힘을 단단히 줘야 했는데, 처음에는 드릴이 미끄러져 함석판을 쥐고 있던 왼손을 뚫을 뻔했다. 게다가 내 장갑은 이상하게 나사못과 함께 자꾸만 말려들어 갔다. 나사못이 회전하면서 장갑까지 물어 버리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나사못을 다시 풀고 장갑을 뺀 후 작업을 했다.

게다가 파이프가 벽과 밀착된 곳은 족장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밀착된 부분의 함석판에도 나사못을 박아야 작업이 완성되기 때문에 벽에 몸을 기댄 채 드릴 작업을 해야 했다. 나는 삐끗해서 밑으로 떨어질까 두려워 제대로 힘을 줄 수 없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대신 공중에 매달렸다. 스파이더맨이 따로 없다. 조선소에서 사고가 나면 사망 아니면 전신 불구라더니 그 말이 내 앞의 현실이 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5층 높이 족장에서 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뻥 뚫린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조금만 삐끗하면 바로 추락할 것만 같은 곳이었다. 게다가 안전모를 써서 훌쩍 커진 몸으로 높이가 1.5미터밖에 안 되는 족장과 족장 사이를 이동하려니 늘 허리와 무릎을 굽히고 돌아다녀야 했다. 제대로 무릎을 굽히지 않아 위층 족장에 머리가 부딪힐 때면 파이프와 못 같은 것들이 덜커덩거렸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여관방 서랍에서 나온 앵그리버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내가 조선소에 취업했을 때는 2012년 초. 한진중공업 대량해고 사태 취재를 마친 후였다. 조선소 하청노조 활동가 꾐에 넘어갔다.

"허 기자, 조선소 하청 노동자를 제대로 취재하려면 직접 일을 해봐야 한다니깐. 암만 말로 들어도 몰라. 그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당시만 해도 노동계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한진중공업 사태. 하지만 거기서 일했던 하청 노동자의 거취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규직이야 노조도 있고, 파업도 할 수 있었지만 하청 노동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일 하라면 이 일 하고 저 일 하라면 저 일하다 어느 순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들이 누군지가 궁금했다.

위장취업하면서 숙소는 하루 1만5000원 하는 여관방에서 지냈다. 고작 열흘 남짓 있었던 곳이지만 그곳 골목 풍경은 여전히 생생하다. 여관방의 큼큼한 '아저씨 냄새'도 잊을 수 없다. 살면서 그런 공간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가 지내던 여관방 서랍에서는 그림 두 장이 나왔다. 삐뚤빼뚤 서툰 솜씨로 그린 앵그리버드와 정체 모를 동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가 그린 게 분명했다. 근방 여관에는 가족 단위의 투숙객이 적지 않았다. 노동자인 아버지 혹은 남편을 따라 나선 이들이다. 내가 묵은 방 또한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몇 개월 동안 그들의 '집'이었을 것이다. 허름한 방에서 크레파스를 손에 쥐고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가 눈앞에 그려졌다. 그 가족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홀로 여관방에 누워 있으면 그런 생각이 문득 나를 괴롭혔다.

평생 이렇게 일해야 한다면...

출근 첫날, 잔업까지 마치고 퇴근하니 저녁 여덟 시. 구부리고 있던 다리와 허리를 그제야 제대로 펴고 휘청거리며 여관방에 돌아오니 아홉 시를 넘겼다. 씻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평소에도 무릎이 좋지 않았던 터라 좁은 공간을 오리걸음으로 돌아다니며 일하다 보니 차라리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침에 허물 벗듯 빠져나온 이불에 그대로 몸을 뉘였다. 한참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누워 있다가 그래도 살아야겠다 싶어 인근 식당을 찾았다. 삼겹살 3인분을 입에 구겨 넣었다. 정성껏 키운 돼지의 맛이었지만, 그래도 어지럽고 메스꺼운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몸속으로 파고든 유리 가루로 온몸이 까끌까끌했다.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내일 아침 다시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니. 평생 이렇게 일해야 한다면, 나는 할 수 있을까.'

조선소 신입의 입사 첫날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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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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