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 원 세대>(레디앙 펴냄)에서 두 저자 우석훈, 박권일은 저임금, 비정규 노동에 시달리는 젊은이에게 "짱돌을 들고, 바리케이트를 쳐라"고 주문했습니다. 당시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가 '말이야 쉽지, 우리가 어떻게 짱돌을 드느냐'고 되뇌었을 겁니다. 그리고 9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현실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88만 원 세대>가 나온 1년 후, 세계 금융 위기가 일어났습니다. 비정규 노동이 지구화하면서, 이제 북반구 구세계 대부분에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자리는 비정규, 저임금 노동에 몰리고, 가계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복지가 후퇴하고, 증오가 타오릅니다.
한국은 이 대열에서 세계 최첨단을 달립니다. 우리는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은 관련 통계를 욉니다. 노인 자살률 세계 1위 같은 통계 말이지요. 오죽하면 '헬조선'이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다시 <88만 원 세대> 저자의 주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사람들은 짱돌을 들지 않을까요? 1960년대 유럽, 1980년대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짱돌을 들었는데 말이지요. 지금은 그때보다 더 살기 어려운데, 왜 아무도 저항하지 않을까요?
식상한 비유긴 합니다만, 까만 눈과 검은 머리카락의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지식인 박노자 오슬로 대학교 교수가 <주식회사 대한민국>(한겨레출판 펴냄)으로 다시 한국의 독자를 찾았습니다. 박 교수는 이 책에서 나라가 이 지경으로 망가졌음에도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추적합니다.
<프레시안>과 <시사통>이 진행하는 '독서통'은 지난 4일 서울 서교동 <시사통> 스튜디오에 박노자 교수를 모시고 그 이유를 들었습니다. 아래는 전문입니다.
왜 한국은 헬조선이 되었나
김종배 : 독서통 시간입니다. 이번 주 소개할 책이 뭐죠?
강양구 : 오늘 현장에 계신 서평단 여러분이 유난히 저자에 열광하시네요. 박노자 오슬로 대학교 교수의 <주식회사 대한민국>입니다. 따로 저자를 설명하지 않아도 독자 여러분이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김종배 : 박노자 교수를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박노자 : 네, 안녕하세요.
김종배 : 언제 입국하셨어요?
박노자 : 약 일주일 전에 학회 참석차 일본을 들렀다 입국했습니다.
강양구 : 방학 때 이삼주 정도는 꼭 한국에 들어오시는 걸로 압니다.
박노자 : 네. 정확히 일주일 후에 출국합니다만, 8월 초에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이 있어 다시 들어옵니다. (비행기 티켓을 자주 살) 여유가 없다 보니 자주 들락거리지는 못합니다만, 그래도 기회만 닿는다면 자주 오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김종배 : 몸은 노르웨이에 있지만, 한국 뉴스를 계속 보시죠?
박노자 : 심심하니까요. (웃음)
김종배 : 그 동네는 별로 재미없습니까?
박노자 : 재미없습니다. (웃음) 영국에서는 브렉시트(Brexit)다 뭐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유럽연합(EU)에 아예 가입도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될 일도 없습니다.
김종배 : 다이내믹 코리아라고 해야 하나요? (웃음)
박노자 : '다사다난'이 맞겠죠. 그런데, 세계의 주변부 국가를 보면 늘 그렇습니다.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느낌과 언제 흥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있죠. 제 첫 번째 고향이었던 러시아도 비슷합니다. 세계 체제로 봐서는 한국과 비슷한데,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긴장감이 있죠.
김종배 : 노르웨이에서 한국 뉴스를 보시면서 '뭔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느끼셨어요?
박노자 : 그렇죠. 예를 들어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을 볼 때 '이제 고문도 돌아오는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했어요. 통진당 해산 사유가 '내란음모죄'입니다. 전두환 군부 독재 시절 재판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때와 같은 죄목이죠. 1982년으로 돌아간 거죠.
그 때 고문도 지독했거든요. 내란음모죄도 부활했는데, 고문도 못할 게 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뉴스를 볼 때마다 '어디까지 갈까' 하는 생각에 불안합니다.
오늘(4일)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놓고서 판결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도 얼마나 치욕적인 일로 역사에 기록될지 걱정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전국 노총 위원장이 구속되고 판결을 기다리는 나라가 한국 외에 어디 있습니까. (서울중앙지법은 이날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때 경찰버스 등을 파손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한상균 위원장에게 징역 5년에 벌금 5000만 원을 선고했다.)
김종배 : 전국 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이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은 심지어 전국에 생중계됐죠.
강양구 : 노총 위원장이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이 생중계되고, 이를 지켜보는 시민은 무감각한 나라입니다.
박노자 : 당시 제가 학회 참석차 한국에 있었는데, 같이 온 한 미국 교수가 이때 조계사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본인 추산으로 7000명의 경찰이 단 한 사람을 잡기 위해 모였다며 놀라시더군요. 미국에서는 평생 볼 수 없는 광경이라며 흥분해서 얘기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김종배 : 박노자 교수께서 이와 같이 매의 눈으로 관찰한 한국에 관해 쓰신 책이 <주식회사 대한민국>입니다.
강양구 : 부제가 이 책의 핵심을 잘 담은 것 같습니다. 이 책에 실린 글 한 편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김종배 : 이 짧은 글이 소셜 미디어에서 엄청나게 화제가 됐죠.
강양구 : 이 책은 '헬조선'을 키워드로 왜 한국이 헬조선인지 설명하고, 그럼에도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한편으로는 헬조선을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사람의 의식 상태도 해부하고요.
대한민국 대통령은 '바지사장'?
김종배 : 헬조선과 '주식회사 대한민국'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고 있습니까?
박노자 :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니 '헬(지옥)'이 되는 겁니다.
김종배 :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뜻을 푸신다면요?
박노자 : 아주 간단합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다양한 형태의 피고용인입니다. 하지만 배당을 받지는 못합니다.
김종배 : 일부 극소수 대주주만 배당을 받는다는 거군요?
박노자 : 네. 한국은 상위 10%가 국가 전체 소득의 66%를 차지하는 나라죠. 이런 구조에서는 소주주도 아니고, 오직 대주주만 배당금을 독차지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피고용인이 되죠.
국가와 기업의 경계가 사라졌다는 점에서도 한국은 주식회사입니다. 국가는 기업의 심부름센터가 됐죠.
김종배 : 책에 '기업 국가'라는 개념도 사용하셨어요.
박노자 : 이 개념이 일본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기업 국가'라는 말이 나왔을 때만 해도 지금의 한국보다 국가가 기업에 자율성을 더 갖고 있었죠. 관료제가 강력한 나라니까요. 그런데 한국은 기업에 관해 상대적 자율성도 거의 사라진 것 같습니다.
김종배 : 한국에서 정권이 곤경에 빠졌을 때 기업을 공격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롯데가 공격 대상이죠.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박노자 : 국가가 기업을 통제할 힘을 갖고 있다는 걸 특히 선거가 가까워지면 국민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김대중 정부 때 언론사 세무 조사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후로 뭐가 바뀌었나요? 별로 바뀌는 것 없습니다.
한국의 가장 인기 스포츠가 '다음 대통령은 누구냐'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까? 대선 3~4년 전부터 온 국민이 관심을 갖고 열광하죠. (웃음) 저는 그런데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를 둘러싼 격론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강양구 : 사실상 한국 대통령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한시적 바지사장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박노자 : 바지사장이죠. 경제 정책은 삼성경제연구소가 세우죠. 이런 형태에서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는 사실 다 부차적인 얘기일 뿐이죠.
100년 후 역사학자는 지금의 한국을 '신식민지-신자유주의 대한민국의 말기'로 보지 않을까 합니다. 그들이 지금 시대 역사를 쓸 때 대통령이 독재자 딸이었는지, 인권 변호사 출신인지, 1970년대 학생 운동을 했던 사람인지 중요한 의미를 두지 않을 거예요. 지금 우리가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 총독이 누구였는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과 같죠. 누가 총독이 되든, 일본 본국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는 총독부 정책의 큰 기조는 그대로였으니까요.
사실 나는 대통령을 누가 하는가에 대해 그다지 첨예한 관심은 없다. (…) 대통령이 누가 되든 간에 정책의 핵심을 대통령이 주체가 되어서 정하는 것은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를 비롯한 국내 재벌들의 두뇌 집단과 해외 대자본의 요구를, 당선에 성공한 정객들이 알아서 가감해서 경제 정책이라고 내놓는 것이다. (…) 그러니 대통령이 누가 되고 대통령이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일희일비할 것이 있는가?
새누리당 정권이든, 민주당 정권이든 달라질 건 없다
김종배 :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피고용인 입장에서도 새누리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의 차이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박노자 : 당연히 차이는 있죠. 어찌됐든 대통령 후보가 자기 차별화를 하지 않으면 선거를 치를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차별화를 위한 차별화 수준일 뿐입니다.
마침 주식회사 대한민국에는 아주 좋은 메뉴가 하나 있습니다. 이들이 차별화하는 주된 요인의 하나가 대북 정책입니다. 왜 이에 집중하느냐면, 대북 정책이 어차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별로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성공단이다 금강산 관광이다 해도 경제적으로 비중이 미미하니, 마음대로 폐지할 수 있고 만들 수도 있습니다.
대북 정책에 관해 (더불어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 우파는 조금 더 상식적인 노선을 보이죠. 어차피 북한이 망할 일이 없고 개발 정책은 필요하니, 협력해서 공감대를 만들어보자는 상식적인 노선을 견지하죠. 반면 (새누리당과 같은) 극우파는 북한을 악마화하고, 이를 통해 일부 유권자를 결집하죠. 그러나 단지 이 정도 차이일 뿐입니다.
김종배 : 그렇다면 더불어민주당 정권과 정의당 정권의 집권 대결을 상상해보면 어떨까요? 두 집단의 차이는 어떻게 보십니까?
박노자 : 지금처럼 신자유주의라는 강력한 흐름을 정의당 단독으로는 뒤엎지 못할 겁니다. 집권한다손 치더라도, 정의당은 기본적으로 우파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 정당입니다. 사민주의 안에서도 좌우파가 있는데, 정의당은 우파에 가깝습니다. (집권한다손 치더라도) 비정규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진 못할 겁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기업의 엄청난 저항을 강력하게 분쇄해야 하는데, 이를 실천할 동력이나 급진성을 지니진 못한 것 같습니다.
아마 정의당이 정권을 잡는다면 기업 과세를 약간 강화해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어느 정도 시행되는 무상 의료를 추진하겠죠. (대학 교육까지 포함한) 무상 교육까지 실천하지는 못할 테고, 등록금 인하 정도를 실시하겠죠. 이 정도 선에서 기업 집단과 타협을 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완전히 현 체제를 바꾸진 못하리라고 봅니다.
강양구 : 책에서 좌파 정책의 두 축으로 '자본의 사회화'와 '사회적 재분배'를 설정하셨습니다. 사실상 한국의 진보 정당도 자본의 사회화를 얘기하진 못하고 사회적 재분배만 이야기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책에서도 나옵니다만, 이런 재분배 정책은 사실 1950년대 조봉암의 진보당 때부터 나온 얘기입니다.
조봉암의 진보당은 좌절했지만, 비슷한 기조로 유럽에서는 사민주의 정당이 권력을 잡거나,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켰죠. 하지만 지금은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도 망해가는 상황이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사회적 재분배'만 얘기한다고 한국 사회가 바뀌겠느냐, 이런 근본적인 문제 제기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박노자 : 그렇습니다. 사실 조봉암의 진보당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을 보면 '기업 이익 균점'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조봉암은 이에 한발 더 나아가 복지 제도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했죠. 더불어 한국이 갈라진 후 처음으로 평화 통일을 얘기했고요.
김종배 : 지금 우리가 지푸라기 잡듯이 겨우 붙잡은 내용 하나가 이른바 '경제민주화법'이라는 헌법 제119조 제2항("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 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인데, 제헌 헌법 내용을 보면 이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내용이 담겨 있죠.
박노자 : 해방 직후 혁명적 분위기에서 이승만의 극우 정권이라도 그 정도 양보는 해야 했습니다. 임시정부의 정책 강령을 보면, 주요 기업 국유화까지 명시되어 있습니다. 임시정부를 실제로 이끌던 김구의 독립당은 우파 보수당이었지만, 당시로서는 그 정도가 보수의 상식이었던 셈입니다.
김구와 임시정부가 참고한 중국의 국민당만 하더라도 주요 기업 국유화 정도는 강령으로 내세우는 게 자연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이 정도는 혁명적 조치도 아니고 상식이었던 거죠. 일제 강점기의 피착취 지식인이 공산주의를 공부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 우파도 이 정도 양보를 해야만 했죠. 이에 비춰 보면,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는 우경화, 우경화, 또 우경화의 결과입니다.
김종배 : 1945년 이후 지금까지 계속 오른쪽으로만 내달려 온 거네요?
박노자 : 1980년대 말에 잠깐 국민의 저항에 부딪혀 노태우 정권이 국민의료보험, 국민연금 등을 내놓아야 했죠. 이 기간만 제외하면 우리는 계속 우향우만 했습니다.
강양구 :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있었습니다만, 대세를 거스르진 못했다는 거죠?
박노자 : 김대중에게 대북 정책은 상식적인 선택이었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할 때 채찍을 휘둘렀지만 어느 정도 당근도 제시했습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미약하나마 도입해 굶어 죽는 독거노인의 수를 조금 줄였죠.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독거노인이 굶어 죽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 대한민국이 참 잔혹한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댈 데 없는 사람을 국가나 공동체가 구제하지 못합니다.
김종배 : 폐지 줍는 노인이 이렇게 많은 나라가 별로 없죠?
박노자 : 그렇죠. 한국의 노인 빈곤율이 48.6%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어디에도 이런 나라가 없습니다. 노인 자살률은 기록적이죠(2014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55.5명으로 OECD 평균의 두 배다).
헬조선 담론, 한국 몰락의 징후?
강양구 : 오슬로 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치시잖아요? 한국의 이런 현실을 노르웨이 학생에게 설명하실 텐데, 반응이 어떤가요?
박노자 : 양심 있는 학생들은 죄책감을 느끼죠.
김종배 : 죄책감이요?
박노자 : 노르웨이와 한국의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삼성 휴대폰이죠. 품질이 좋고 가격이 합리적이라 노르웨이 대학생 가운데도 이 휴대폰을 사용하는 이들이 꽤 되죠. 그런데 이 휴대폰을 만든 회사가 어떤지를 듣고 나면 놀라는 거죠. 우리가 한국 노동자의 피땀을 간접적으로 빨아먹는다는 반응을 보이는 학생이 있습니다. 세계 체제 아래에서는 한국 노동자의 삶과 노르웨이 소비자의 삶이 무관하지 않거든요.
삼성에서 직접 고용한 노동자 수가 14만 명 정도로 미미합니다. 나머지는 다 하도급, 하도급, 하도급이죠. 이런 식으로 단가를 낮추고, 그렇게 해서 국제 경쟁력을 갖추죠. 그리고 순환 출자 구조도 재미있죠. 그들(노르웨이 대학생) 시각에서는 범죄 집단에 가까운, 마피아적 특성을 가진 기업 집단이죠.
강양구 : 2001년 귀화하신 후, 몇 년 후에 한국을 떠나셨잖아요. 책을 보니 여태까지 노르웨이에서 16년 정도 계셨는데, 그 기간 동안 한국에서 온 노르웨이 이민 문의를 많이 받으셨다고요?
박노자 : 많이 옵니다. 죽어도 군대 못 간다는 사람, 예를 들어 동성애자가 한 예입니다. 군대 가면 강간 당하고, 심신이 망가질 게 뻔하니까. 문의가 옵니다. 난민이라도 될 수 없겠느냐고. 노르웨이에서는 안 되지만, 오스트레일리아(호주)나 캐나다와 같은 일부 국가는 가능한 걸로 알고 있어요.
강양구 : 취업 이민 문의도 꽤 되는 것 같아요.
박노자 : 네. 한국에서 좋은 직장에 다니는 정규직 노동자 가운데도 '더는 못 버티겠다'며 이민을 문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김종배 : 바로 이 지점에서 헬조선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옥이라는 말이 무시무시한데, 지옥에 살면서 혁명을 꾀하는 사람이 없단 말이죠. 지옥은 탈출해야 할 곳이지, 그곳을 천국으로 바꾸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헬조선이라는 말에 깔린 의미가 이것 아니냐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강양구 : 지옥은 견디거나, 탈출해야죠.
박노자 : 저는 헬조선 담론에 이중적인 입장입니다. 일면 상황에 관한 정확한 진단이죠. 한국이 몰락 직전에 온 것 아니냐는 징후로 보입니다. 생명력이 아직 살아 있는 사회에서는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오지, 지옥이라는 말은 안 나오거든요. 1980년대 말 한국이 대표적이죠. 피 흘려서라도 바꾸자고 했죠.
다른 한편으로 헬조선 담론이 지극히 개별화되었습니다. 헬조선 탈출 담론에서 중요한 게, 탈출의 주체가 가족이 아니라 개인입니다. 헬조선 탈출 담론을 만드는 대부분의 이가 아직 내 가족을 꾸리지 않은 젊은이입니다. 연애할 시간도 없고, 사회적 힘도 없고, 돈도 없죠. 어떻게든 내가 지옥을 탈출한 후 삶을 시작하겠다는 거죠.
이건 사회적으로 보면 위험하죠. 개인 하나가 혁명할 수는 없거든요. 혁명은 개인의 연대에서 일어나죠.
강양구 : 책의 이민과 관련한 부분에서도 무작정 탈출보다 연대하는 게 더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 태도 아니냐고 하셨어요.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헬조선'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모두가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떠난다 해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본주의 세계의 일반적 문제인 착취나 소외, 차별 등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노동자'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국내에서도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투쟁하는 게 그래도 더 나은 방법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막상 헬조선에서 힘든 사람 입장에서는 뜬구름 잡는 소리 아니냐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민주의 복지국가 모델, 성공할 리 없다
김종배 : 관련해서 책 마지막 단락도 같이 거론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대로 읽겠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진보로서는 이미 깨져버린 사민주의 꿈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본에 대한 공세를 축으로 하여 이 사회의 모든 약자들을 총집결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우리는 우리 생존권을 위해 자본가로부터 비정규직을 고용할 자유나 공장 해외 이전을 할 자유, 공공 부문을 민영화할 자유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선언하고 계급투쟁의 전선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투쟁의 끝에 자본주의를 넘어선 미래의 자세한 비전을 명확하게 보여야 한다."
하나하나 여쭤보고 싶은데, '이미 깨져버린 사민주의 꿈에 대한 미련을 버려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국내에서는 사민주의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향처럼 이야기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요.
박노자 :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기본적으로 변증법적 사고관을 갖고 있죠. 변증법적 사고에서는 정치를 상태가 아닌 운동의 과정으로 봅니다.
서유럽에서 사민주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관한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민주의가 어느 정도 완결된 때가 1950~1960년대인데, 냉전기입니다. 이때 사민주의의 모범이라고 할 프랑스의 경우 공산당이 현실 정치에서도 발언권이 있었고,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에서는 공산당이 현실 정치에서는 세력이 미미했지만 노동조합에서는 달랐죠. 1980년대 유명한 광산 노동자 파업을 주도한 세력이 바로 공산당 세력입니다.
자본주의의 경쟁자인 소련과 현실 사회주의 세력이 온전하고, 자본주의 자체를 없애자는 공산주의자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활발한 당시 사회에서 사민주의자가 집권해서 (자본주의) 체제 구제, 그러니까 중도 타협을 이끌어낸 산물이 사민주의 복지 국가입니다.
서유럽까지 이야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1960년대, 일본에서 안보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가 만들어졌고, 국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미국 학자들이 대학생 의식 조사를 위해 일본을 방문했는데, 와세다 대학과 도쿄 대학처럼 투쟁의 중심이 된 대학에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학생이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학생보다 많았습니다. 일본에서도 자본주의 유지 자체를 문제시한 시점이 있었다는 거죠. 서구와 일본의 지식인은 이미 1960년대 당시 자본주의를 구시대적 체제로 생각한 겁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일본에서도 최소한의 복지 시스템을 만들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1980년대 말 동구권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중국이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에 편입되고, 급진 세력이 덩달아 약화하면서 사민주의가 위기에 빠집니다. 이 상태에서 지배 세력은 더는 타협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보다 본질적인, 본격적인 자본주의로서 신자유주의를 택할 수 있었던 거죠.
여기서 중요한 건 흐름입니다. 한때 왼쪽으로의 흐름이 있었을 때 사민주의까지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오른쪽으로 역류가 시작한 뒤에는 사민주의마저 머나먼 일이 되고 극단적인 모습으로 신자유주의가 등장했습니다. 그 와중에 사민주의가 만들어 놓은 유럽 복지 국가가 조금씩 몰락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반전을 꾀해야 할까요? 반전의 최종적 지향점을 비자본주의적 대안으로 설정하지 않는 이상, 중도 타협으로서의 사민주의와 비슷한 형태마저 얻기 어려울 겁니다.
김종배 : 그런데 소련이나 동구의 붕괴 이후 사회주의는 입에도 못 올리는 분위기 아닙니까? 사회주의는 이론적이거나 실천적으로나 실패한 모델로 간주되고 있어요. 이에 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박노자 : 이는 한국이 아직 종속형 사회임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봅니다. 사회주의를 언급하는 게 불가능한 사회가 미국이죠. 1990년대 미국이나 일본의 분위기를 한국이 그대로 본 딴 거죠.
동구권적 사회주의는 비자본주의를 지향했던 역사 속 하나의 모델일 뿐입니다. 그 안에서도 여러 가지 모델이 존재했습니다. 동구권 사회주의 모델의 경우, 사회주의라기보다 '국가화된 개발주의 사회'가 더 맞는 말이죠.
강양구 : 현실 사회주의와 같은 모습이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대안 모델을 찾는 게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박노자 :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대안 모델이 (국가 사회주의처럼) 일당 지배 체제일 필요가 없죠. 오히려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사회화한 경제 체제야말로 유일무이한 대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민 단결만이 답
김종배 : 책에서 "자본에 대한 공세를 축으로 이 사회의 모든 약자들을 총집결하는 것이 맞다"고도 하셨어요. "이 사회의 모든 약자"를 언급하셨는데, 전통적인 계급 분류로 보자면 노동 계급 안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괴리가 지금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들을 '모든 약자'로 포괄하는 게 가능하냐는 문제제기가 가능해 보입니다.
강양구 : 당장 책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로 이처럼 약자가 파편화된 현실을 짚어주셨어요.
박노자 : 일면은 분명 그렇습니다만, 한국에는 '서민', 또 '민중'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런 개념이 꼭 무의미하지만 않습니다. 같은 가족인데 아버지는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고, 아내는 마트 비정규직이고, 아들은 하도급 비정규직 노동자일 수 있습니다. 친척 중에는 망할 것 같은 구멍가게 주인(자영업자)이 있을 테고요.
대한민국 평균 퇴직 연령이 사무직, 노무직 다 합하면 50세 정도 됩니다. 이들이 퇴직하면 치킨집을 열고, 창업 후 첫해에 절반 정도가 도산합니다. 이게 대한민국 서민의 삶입니다. 정규직이라손 쳐도 가족 중에는 비정규직이 있고, 언제고 자영업자가 되어 도산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규직, 비정규직, 여성, 남성, 세대 간의 벽을 넘어서 '민중'으로 연대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김종배 : 이 책 여러 군데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하시는 개념이 '자율적 개인'입니다. 이건 어떤 뜻입니까?
박노자 : 내 상황을 상대화해 보편적 기준에 맞춰 행동하는 사람이죠.
김종배 : 옛날 말로 '계급의식을 지닌 존재'인 겁니까?
박노자 : 단순히 계급의식만 지닌 게 아니라, 역사의식, 도덕의식 등 보편적 기준을 세우고, 그에 맞춰 자신의 행동을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이죠.
강양구 : 국가가 말한다고, 기업이 말한다고, 교사가 말한다고, 언론이 말한다고 그대로 믿고 따르지 않는 사람, 의심하는 사람 말이죠?
박노자 : 그렇죠. 언론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남자는 군대에 가야 한다'고 해도, 자율적 개인이라면 행동을 취하기 전에 한 번 생각해보는 거죠. 정말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사람 죽이는 훈련을 받아야 하느냐고 말이죠.
70만 명에 가까운 군대를 유지할 이유가 뭘까, 정말 평화를 위한다면 남북한이 군축 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거죠. 실제 북한이 김대중 정부 때 군축 제안을 한 적도 있죠. 쌍방 10만 명 정도만 남기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김대중 정권이 무시했죠.
김종배 : 모든 약자의 총집결을 제안하셨는데, 이들을 담을 정치적 틀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박노자 : 약자의 집결은 한국 사회에 이미 전례가 있습니다. 3.1 운동, 6월 항쟁이 있죠. 모든 약자가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갖고 집결해서 함께 행동한 시기가 몇 번 있습니다. 2008년의 촛불 집회도 비슷한 형태였죠. 최소한의 공통분모가 3.1운동 때는 독립이었고, 6월 항쟁 때는 민주화였죠. 지금 최소한의 공통분모라면 '최소한의 공공성이 있는 국가', '다수에게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국가', '국가다운 국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적어도 독거노인이 아사하는 일은 없는 나라. 보육부터 노후까지 국가가 최소한으로 책임져야 할 부분은 제도화하자는 게 공통분모가 되지 않겠습니까.
강양구 : 책에서 '결국 문제는 정치'라고도 하셨는데, 여기서 정치는 '집합적 행동'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도 있을 것 같아요. 6월 항쟁이나 촛불 집회가 기대만큼 결실을 맺지 못한 이유로 민중의 열망을 받아 안을 현실 정치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보 정당에도 몸담으신 것 같고요.
그런데 한국의 진보 정당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과연 기대만큼 약자의 공통분모를 제도화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박노자 : 서민이 일상적으로 항쟁하긴 힘듭니다. 파견직 노동자가 항쟁에 나설 수 있겠어요? 항쟁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한 사람이죠. 결국, 그러면 약자를 위한 정치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니 매일 항쟁에 나서지 못할 대부분의 사람을 대표하는 항시적 기구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항쟁의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강양구 : 그 역할을 진보 정당이 해야 한다는 거군요.
박노자 : 그렇죠. 제도권 야당이나 여당에는 큰 차이가 없어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노무현 정부가 발의하고 이명박 정부가 완결했죠. 강정 해군 기지도 노무현 정부 때 설계됐죠. 여당이든 야당이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민중 정당이 아니라면 민중의 에너지를 담을 수 없습니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처분은 극우의 요구
강양구 : 2001년 처음 내신 책이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출판 펴냄)입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고, 지금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계기 가운데 하나가 <중앙일보>에서 크게 다룬 기사입니다. 당시 서평 섹션 1면에 대서특필됐죠. 그런데 이 책을 크게 쓴 기자가 바로 지금 극우 이데올로그로 활동하고 있어요.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민족주의 같은 한국의 의식 구조를 강하게 비판했죠. 그런데 <주식회사 대한민국>에서는 역사학계가 민족주의 비판에는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삼성그룹이 어떻게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기업이 되었는지, 국가와 재벌의 유착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연구하지 않는다고 쓴 소리 하십니다.
2001년 이후로 박노자 교수님의 책은 계속 왼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언론의 관심이나 독자의 관심은 계속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웃음)
박노자 :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쓰고 나서, 그 책에 관한 반응을 보면서 저는 양심의 가책이랄까, 그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이 신자유주의 체제로 재편되면서, 특히 기업이 더는 민족주의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어요. 이제 기업이 원하는 건 외국인 투자죠.
지금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와 같이 큰 기업은 해외 생산 비율이 70% 이상이죠. 이들 기업은 이미 국제적인 신자유주의 세력입니다. 이들에게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심지어 장애물이죠. 아니나 다를까, 2000년대 중반부터 뉴라이트가 집결했잖아요. 이들은 과거 좌파 민족주의 비판에 열을 올립니다.
그만큼 주류의 주문이 강력했던 겁니다. 비록 제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제 책이 그런 분위기와 맞아떨어졌다면, 저로서는 반성해야 할 일이죠. 의도하지 않았지만, 제 책이 대한민국 주류의 이해에 봉사했으니까요. 그래서 어느 시점부터는 민족주의 비판과 같은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제 대한민국 주류가 더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웃음)
강양구 : 안타깝게도 그럴수록 책을 찾는 독자는 더 적어집니다.
박노자 : 그러면 어떻습니까? 읽을 사람은 다 읽습니다. 그리고 그런 독자가 진짜 독자죠. (웃음)
한국 주류 언론, '정신병적 극우파'
김종배 : 이제 서평단 가운데 질문을 받아보겠습니다.
- 이번 총선 결과를 보면, 대중은 정의당조차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급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교수님께서 생각하는 정의당의 정체성(사민주의 우파 정당)과 대중이 받아들이는 정의당의 정체성(급진 세력)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박노자 : 국제적인 정당 분류 기준을 놓고 보면, 정의당의 요구는 급진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재분배를 이야기합니다. 게다가 정의당은 심지어 안보에 관해서도 목소리를 냅니다. 보수적 사민주의 정당으로 보는 게 당연합니다.
급진 세력의 정의는 대한민국의 기업, 언론, 또 현실 정치 세력 같은 주류가 설정한 '급진이냐, 보수냐'는 잣대의 중간치, 또는 표준에 따라 결정됩니다. 대한민국 주류가 설정한 표준이 다른 나라 기준으로는 매우 오른쪽에 위치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대한민국 주류 언론의 기준이 '정신병적으로 오른쪽'에 쏠렸습니다. 노동자의 희생을 요구하는 기사가 나올 때마다 '정규직 때문에 비정규직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비상식의 극치입니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주체는 기업이지, 정규직 노동자가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정규직 노동자라손 치더라도 경영에 참여하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고용에 관한 모든 결정은 경영인이 하지, 정규직 노동자가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임금 수준이 높아 국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 임금 수준이 높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제조 업체의 평균 임금은 일본이나 미국의 절반 수준입니다. 사회 임금까지 생각한다면, 한국의 임금 수준은 더 올라야 합니다.
대한민국 주류 언론이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만들어내면서, 대한민국 이념 지형의 기준치를 극단적인 오른쪽으로 끌고 갑니다. 바로 그 결과 대중이 저렇게 착각하게 된 것이죠.
- 자율적 개인이 되었을 때 과연 (한국 현실에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회사에 소속되지 않는 노동자는 자유롭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큰 문제를 겪을 테니까요.
박노자 : 맞습니다. 대한민국은 유럽과 달리 사회가 개인의 생존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큰 기업에 고용돼야 사회적 시민권을 얻습니다. 중소기업만 해도 사회적 시민권을 부여하지 못합니다. 4대 보험 처리가 제대로 안 되는 중소기업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 한국에서는 공공 기관 노동자나 대기업 노동자(화이트칼라)가 아니고선 시민이 될 수 없습니다. 나머지는 이등, 삼등 시민이죠.
또 한 가지 현실이 있습니다. 한국의 대기업은 현존하는 독재 국가입니다. 삼성이나 LG나 현대자동차는 세습제 왕조 사회입니다. 군대와 같은 규율이 지켜지고, 고위층의 부정부패가 항상적으로 발생합니다. 국가는 그나마 민주화됐다고 말할 수 있는데, 대기업이 민주화된 적은 없습니다. 앞으로 될 것 같지도 않고요.
삼성의 내부 고발자로 유명했던 김용철 변호사의 말씀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삼성이 나에게 범죄를 교사했다"고 했습니다. 대체로 독재 국가에서 중간 관리자가 범죄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처한 자율적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쉬운 대처 방법은 칸트가 얘기했습니다. 스스로를 기만하지 마라. 내가 처한 상황을 직설적인 언어로 스스로에게 말하고, 남들과 공유하십시오. 여기서 시작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대기업 노동자로서 사회적 시민권은 얻었지만, 독재 국가(대기업)에서 도저히 못 살겠다면, 스스로를 기만하지 마십시오. '나는 독재국가의 신민'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십시오. 그리고 '독립투쟁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어보십시오. 적어도 상황 판단이라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이제 인터넷이 어느 정도의 익명성을 보장할 수 있으므로, 나의 상황에 관한 자율적인 공유는 가능합니다. 이런 일을 우리 선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선조의 독립 투쟁을 보면, 가장 기초적인 투쟁이 소위 '불온낙서'였습니다. 일제가 검열하지 않는 아주 흔치 않는 장소의 하나가 공공 화장실이었습니다. 그러니 화장실에 낙서했죠. 그런데 이런 낙서가 심해지자, 일제 경찰이 화장실 낙서를 일일이 조사했습니다. 이를 연구한 분이 계십니다. (웃음)
- 그럼, 한 가지 대안으로 기본 소득 제도는 어떻습니까?
박노자 : 기본 소득 제도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체제로부터 사람의 자율성을 줍니다. 기본 소득 제도 덕분에 기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율적 개인은 비록 외국 여행은 어렵고, 비싼 건 못 사겠지만, 적어도 먹고사는 걸 보장 받습니다. 독재 국가, 왕조 기업의 수족이 될 필요가 없죠.
이런 좋은 측면이 있지만,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서유럽의 부유한 국가에서 일부 부유층마저 기본 소득 제도를 지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내수 진흥책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경기 부양책이죠. (좌파의 시각으로는 극복 대상인)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한 제도로도 활용될 수 있죠.
- 자율적 개인이 되기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나는 경상도 사람이니 새누리당을 찍어야 돼', '나는 남자니 군대에 가야 돼.' 이런 생각을 많은 이들이 합니다. 일정한 테두리를 만들고 '이렇게 해야 돼'라고 강요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자율적 개인이 될 수 있을까요?
박노자 : 우리가 가진 많은 의식이 실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만든 이념입니다. 이 점만 직시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메치니코프 부부는 아이를 갖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나쁜 세상에 또 하나의 생명체가 태어나게 하는 건 범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과연 내 아이가 평생 받을 고통을 책임질 자세가 되었는가를 고민한 거죠. 메치니코프는 '사람은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얘기를 자연의 본능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본 거죠.
'남자라서 군대에 가야 한다'는 말도 자명한 이데올로기입니다. 군대에 가야 한다는 건 누가 정한 건가요? 군대가 없다면 평화도 없다는 소리는 누가 한 겁니까? 군대를 운용하는 사람이 한 소리죠.
우리한테 주입된 각종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면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부터 시작입니다.
김종배 : 이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귀한 발걸음 해주신 박노자 교수님, 고맙습니다.
박노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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