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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하고 또 강간하고…1947 '지옥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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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하고 또 강간하고…1947 '지옥열차'

[유라시아 견문] 남아시아 펀자브 : 대분할 ②

붉은 강

파키스탄의 라호르는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국경을 넘었다는 실감이 덜했다. 겨우 한 시간 남짓 걸렸을 뿐이다. 시차는 고작 30분이었다.

하지만 거리는 가깝되, 거리감은 적지 않았다. 일주일에 단지 두 번의 항공편만 있을 뿐이다. 연결망이 뜸한 것이다. 그런데도 방금 비행기를 타고 떠나왔던 델리와 몹시 흡사했다. 무굴제국과 대영제국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시 외양부터 비슷했다. 시장 풍경도 어딘가 친숙했다. 거리에서 파는 음식부터 흘러나오는 노래까지 내가 석 달을 살았던 마유르 비하르의 뒷골목을 연상시켰다.

인도의 델리는 남인도의 첸나이와 서인도의 뭄바이보다 라호르와 훨씬 더 닮았다. 북인도 내륙부의 생활 세계를 공유했던 이웃 도시였기 때문이다. 본디 델리와 라호르는 펀자브를 대표하는 양대 도시였다. 적어도 500년간 펀자브 세계를 공유했다. 1858년에서 1911년까지 콜카타가 영국령 인도의 수도였을 때도 델리는 펀자브 주에 속해 있었다. 델리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행정 구역이 분리된 것이다.

내년(2017년)이면 인도도 파키스탄도 건국 70주년이 된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델리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24시간 전, 파키스탄은 카라치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분리 독립, 분단 건국이었다. 그러나 델리에도 카라치에도 '인도 독립의 아버지' 간디는 없었다. 그는 콜카타에서 단식 농성을 하고 있었다.

당시 벵골에서 자행되고 있던 힌두와 이슬람교도 간 폭력과 학살을 멈추라며 절절하게 호소했다.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만 갈라졌던 것이 아니다. 벵골도 동/서로 찢어졌다. 서벵골은 인도가 되었고, 동벵골은 파키스탄이 되었다. 그래서 신생 국가 파키스탄의 모양새는 기형적인 것이었다.

인도 아대륙의 서북에는 서파키스탄이 들어섰고, 동북에는 동파키스탄(현재 방글라데시)이 세워졌다. 한 나라라고 했건만 서로 15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적성국이 된 인도를 통해서는 왕래도 할 수 없었다. 서파키스탄의 카라치에서 동파키스탄의 치타공까지 배편을 이용하면 꼬박 닷새가 걸렸다. 인공적이고 작위적인 근대 국가의 탄생이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잘못된 장소에서 독립을 맞이했다. 인도의 깃발 한복판에는 법륜(法輪)이 있다. 업보와 윤회의 상징을 국기에 새겨 넣은 것이다. 파키스탄의 국기는 녹색 바탕에 초승달이 그려졌다. 이슬람 국가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에는 여전히 힌두교들이 있었다. 인도에도 적지 않은 이슬람교도들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독립이 곧 해방을 뜻하지 않았다. 숨죽인 채 낯선 국가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국경 마을'에서는 양국의 깃발이 번갈아 게양되기도 했다. 어떤 이는 두 번의 독립 행사에 모두 참여했다. 델리와 카라치에서는 폭죽이 터졌지만, 더 많은 곳에서는 약탈과 방화와 학살이 일어났다. 환호보다는 비명이 더 자주, 더 크게 들렸다. 특히 펀자브가 그랬다. 8월과 9월, 60일 사이에 60만 명이 죽었다.

펀자브(Punj-ab)도 우르두 어이다. 페르시아 어에 기원을 둔다. 'punj'가 다섯을, 'aab'가 물을 뜻한다. 다섯 개의 물, 다섯 줄기의 강을 일컫는다. 펀자브를 동서로 가르는 다섯 개의 강을 상징한다. 동쪽의 히말라야 눈이 녹아 서쪽의 타르 사막까지 흘러가는 중간에 펀자브가 자리했다. 풍부한 수량과 너른 벌판이 만나 풍족한 곡창 지대를 일구었다.

인구도 밀집되었다. 문화도 번성했다. 이슬람이 주류인 북인도 일반과도 다르고, 힌두교가 대세인 남인도와도 달랐다. 페르시아 문명과 힌두 문명이 가장 먼저 융합되는 곳이 펀자브였다. 나아가 독자적인 종교, 시크교도 번성했다. 넉넉한 살림살이는 마음가짐도 여유롭게 했다. 종교 갈등은 드물었다. 이슬람, 힌두, 시크는 그들만의 언어인 펀자브 어로 소통했다. 펀자브도 일종의 준(準) 국가였다.

과장이 아니다. 반 토막이 났을지언정 펀자브는 오늘날 파키스탄에서도 가장 큰 주이다. 주 인구만 9000만 명에 이른다. 2억 총인구의 절반이다. 9000만 명은 중동의 패자를 다투는 이집트, 이란, 터키보다 더 큰 숫자이다. 사실상 펀자브가 파키스탄의 군사와 경제, 정치와 문화를 주도한다. 그래서 '펀자브 패권주의'라는 말도 있다.

세계를 국가 단위로 쪼개어 보는 근대적 편견을 거둔다면,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펀자브를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동펀자브, 즉 오늘의 인도령 펀자브에도 2800만 명이 살고 있다. 모두 1억2000만 명, 일본에 맞먹는 규모이다. 그 준 국가의 중심지였던 라호르는 대영제국 아래서도 '동방의 파리'라는 명성을 누렸다. 음식, 건축, 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 윤택한 도시였다.

펀자브의 동서 분할은 전형적인 탁상행정이었다. 현장 실사는 없었다. 시간은 촉박했고, 인력은 부족했다. 결국, 지도 위에 줄을 치고 선을 그었다. 다섯 개의 강을 경계선으로 삼았다. 표본으로 삼은 것은 1941년의 인구 통계였다. 이슬람교도 비중이 70%인 서펀자브는 파키스탄으로, 이슬람교도 비율이 30~50%를 차지했던 동펀자브는 인도라고 했다. 자연 지리와 인문 지리가 크게 뒤틀렸다.

펀자브 세계의 고유성과 복합성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힌두, 이슬람, 시크교의 공존과 공생이 파국을 가중했다. 특히 불안해진 것은 시크교도들이었다. 1947년 당시 600만 시크 가운데 400만이 펀자브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펀자브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여기고 살아왔다.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쪼개진 펀자브에서 시크교가 어떤 처지로 몰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무굴제국 때도 대영제국 시절에도 경험하지 못했던 난국이 닥친 것이다.

특히 두 번의 세계 대전 동안 대영제국을 위해 전장에서 싸웠던 시크교 군인들은 격분했다. 죽음을 불사하고 희생했던 대가가 고향의 분할이란 말인가. 시크교의 창시자인 나낙 데브(Nanak Dev)의 탄생지(Nankana Sahib)가 서펀자브, 즉 파키스탄으로 귀속된다는 소식에 동펀자브의 시크교도들은 더더욱 격노했다. 성지 순례조차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차라리 다민족, 다종교 국가인 '펀자브국'을 만들자고 했다. '시키스탄(Sikhistan)'으로 분리 독립하자는 이도 있었다.

결국,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시작했다. 마을마다 자경단을 만들었다. 시크교도들은 인도 총독부가 가장 군사적인 민족으로 분류했던 이들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북아프리카의 사막에서 이탈리아를 무찌르고, 동남아시아의 정글에서 일본을 격퇴했던 실전 경험까지 갖추고 있었다. 어제의 역전의 용사들이 펀자브 내전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펀자브에서 자행된 힌두, 이슬람교도, 시크 간 삼파전은 유난히 치열하고 격렬했다. 우연하고 우발적인 범죄보다는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인종 학살에 가까웠다. 유럽의 홀로코스트와 아시아의 킬링필드가 동시에 펼쳐진 것이다. 흥건한 핏물이 다섯 개의 강을 붉게 적셨다.



죽음의 기차

분단 건국으로 사태가 종결된 것도 아니었다. 근대 국가는 국민을 산출하고, 국민은 비국민을 양산하며, 난민을 국가 밖으로 배출한다. 건국 이후 폭력은 이제 '내부의 적'으로 향했다. 특히 출신 성분이 의심스러운 군인과 경찰들은 곧바로 직위를 박탈했다. 일부는 동료들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다. 양민 학살도 이어졌다. 인도인은 잠재적인 파키스탄인, 이슬람교도를 향해 테러를 가했다. 파키스탄인은 인도인에 가까운 이들, 힌두와 시크를 살해했다.

결국, 10월 14일, 양국 정부는 동/서 펀자브의 '소수자'들을 교환하기로 합의한다. 건국 이전보다 이후에 더 많은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피난민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각국을 순화시켜가는 과정, 근대적인 국민 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국경'을 넘는 이들이 많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웃 마을이었던 곳이 돌아갈 수 없는 타국이 되었다.

펀자브에서만 약 1000만 명이 이동했다. 동펀자브에서 서펀자브로 이주한 인구는 435만, 서펀자브에서 동펀자브로 이주한 인구는 429만을 헤아린다. 인도/파키스탄 전체로는 1500만 명이 이동했다. 20세기를 통틀어 최단 기간 내 최다 인구의 교환이었을 것이다. 1951년 통계로 파키스탄 인구의 10%가 난민이었고, 델리 인구의 3분의 1이 난민이었다. 인도는 한때 수도 이전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펀자브와 가까운 델리가 안보상 취약한 지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은 결국 이슬라마바드라는 별도의 행정 수도를 지었다.

방향은 달라도 피난 경로는 겹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기차가 복병이었다. 기차역 곳곳에서 습격과 폭동이 일어났다. 떠나는 자들은 곧 적을 의미했다.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살아남은 자들은 다음 기차역에서 보복을 가했다. 그들에게는 남은 이들이 적이었다. 마을에 불을 지르고 여성들을 강간했다.

보복과 복수가 반복되면서 남성들이 보여준 극한의 야만성은 종교를 가리지 않았다. 강간으로 내 편의 모욕을 씻고, 적에게는 치욕을 남기려 했다. 이 무한의 악순환으로 기차 또한 피로 물들어갔다. 기차는 떠났지만, 철로에는 핏자국이 남았다. 기차마다 산 자만큼이나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가 많았다. 시체를 싣고 도착하는 죽음의 기차 행렬은 1947년 대분할의 상징적 이미지로 남아있다. 1992년 구자라트에서 일어난 힌두의 이슬람교도 학살 또한 기차를 목표물로 삼은 것이었다.

'압축적 근대화'

펀자브가 아수라장이 되고 있을 때, 영국인은 뭄바이 항에 집결했다. 길게는 동인도회사 이래 200년, 짧게는 대영제국 100년의 식민지 통치를 청산하고 귀환 길에 올랐다. 적지 않은 이들에게 영국은 낯선 땅이었다. 인도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영제국의 해체를 애감해했다. 힌두교와 이슬람 간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인도 아대륙을 애통해했다.

영국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명화가 덜 된 것이라고 여겼다. 런던에서도 죽지 않은 노병, 윈스턴 처칠이 몇 마디 보태었다. 인도에서 자행되고 있는 대학살이 절대 놀랍지 않다고 했다. 대살육이 더 이어져 아대륙의 인구가 격감할 것이라고도 했다. 격감까지는 아니었다. 원체 인구가 많았다. 자잘한 유럽 국가들과는 애초 규모가 달랐다.

순교자의 공도 있었다. 1948년 1월 30일 뉴델리에서 간디가 암살된다. 마하트마 간디가 파키스탄에 유화적이라며 앙심을 품은 힌두 근본주의자의 소행이었다. 그의 죽음 앞에서만은 파키스탄도 인도도 하나가 되어 애도를 표했다. 상호 대학살에도 일시적인 제동이 걸렸다. 마하트마의 죽음을 통해서만이 아힘사(비폭력)가 잠시나마 실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인구 분포는 이미 현저하게 달라져 있었다. 동펀자브에서 이슬람교도는 격감했다. 서펀자브에서 힌두와 시크는 사라지다시피 했다. 오늘날 라호르에서 힌두 사원을 찾아보기는 좀처럼 힘들다. 일부로 골목 구석구석을 다녀보아도 눈에 들지 않았다. 순수한 이슬람 도시가 된 것이다. 시크와 이슬람교도와 힌두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우물을 사용하며 장기 지속했던 펀자브 세계가 말끔히 소거된 것이다. 오래된 펀자브가 사라지고, 새로운 펀자브가 들어섰다.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근대화'되었다.

종교에 기반을 둔 국가의 분할은 인도 아대륙에서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었다. 무굴제국 이래 반천 년간 지속되어왔던 제국사로부터 급진적으로 이탈한 것이다. 애초 남아시아에서 종교 전쟁부터가 이례적인 것이었다. 인도 아대륙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힌두교와 불교, 자니교 등의 특성상 극단적인 갈등은 드물었다.

기독교-이슬람의 천년 전쟁과 천주교-개신교, 수니파-시아파 간 신/구 전쟁은 유라시아의 서쪽 아브라함 전통이 깊은 곳에나 해당하는 현상이었다. 즉, 남아시아에서 종교적 귀속감에 따라 정치 공동체를 결집하여 적대하는 것은 20세기의 소산, 전형적인 '서구화'의 산물이었다. 왕년의 신앙 공동체를 근대의 신념 공동체로 전변시켜갔던 유럽식 '민족주의'가 이식된 것이다. 신교 국가와 구교 국가의 영토를 명확히 구획했던 국가 간 체제의 도입과 함께 남아시아 또한 이슬람 근본주의와 힌두 근본주의가 길항하는 대분할 체제로 재편된 것이다. 문명화가 덜 되어서가 아니라, '문명화'에 따른 현상이었다.

대영제국의 '식민지 근대화' 또한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총독부는 인구 통계를 위하여 종교와 민족을 분류했다. 분류된 종파와 종족은 분리 통치를 위해 활용되었다. 선거에서도 힌두와 이슬람교도를 분류하여 대표자를 따로 선출토록 했다. 마을 구석구석까지 근대적인 인구 정치가 침투하면서 주민과 이웃 간 타자화를 촉발시킨 것이다. 당장은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의 분화를 야기했고, 결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할을 초래했다.

오늘날 파키스탄의 국어는 펀자브 어가 아니라 우르두 어이다. 인도의 펀자브에서도 힌디 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펀자브가 두 개의 국민 국가로 쪼개지면서 지역성은 약화되고 국가성은 강화된 것이다. 그래서 펀자브 어는 시크교도만의 언어인 마냥 쪼그라들었다. 우르두 어는 무슬림 언어, 힌디는 힌두의 언어, 펀자브 어는 시크의 언어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 또한 근대적인 언문일치, 언어 민족주의로 갈라진 것이다. 불과 100년 전까지 하나의 언어 공동체로 작동하던 펀자브 세계의 독자성, 고유성, 토착성은 시나브로 사라져 갔다.

펀자브의 복합 사회를 낭만화하고 싶지는 않다. 작년(2015년)에 방문했던 중국 윈난 성의 이슬람 마을에 견주자면 친밀도가 훨씬 떨어지는 편이었다. '食口(식구)'가 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도는 돼지고기를 삼가고, 힌두는 소고기를 피한다. 반면 시크교도는 육식을 꺼리지 않는다. 한집에서 함께 살며 끼니를 나누어 먹는 원초적인 친밀감을 공유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도 오순도순, 알콩달콩은 아니었을지언정 아웅다웅, 티격태격 살지도 않았다. 끝내 '펀자브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용해되지는 않았지만, 다종교 다문화가 공존하는 '펀자브성'만은 이루었다. 이 펀자브성의 상실이야말로 대영제국이 남아시아에 남기고 간 최대의, 최장의, 최악의 유산이다.

▲ 파키스탄 라호르의 모스크. ⓒ이병한

▲ 파키스탄 라호르의 아침. ⓒ이병한

▲ 파키스탄 라호르의 야시장. ⓒ이병한

트라우마

양국이 적성국이라는 사실은 비자 인터뷰 때부터 느낄 수 있었다. 내 인도 비자는 연구원에게 발급되는 6개월짜리였다. 그 기간 인도의 안과 밖을 오갈 수 있는 복수 여권을 신청했다. 인도 대사관에 근무하는 직원이 어느 나라를 다닐 계획이냐고 물었다. 인도 주변국 즉 네팔, 부탄, 스리랑카, 몰디브, 파키스탄 등이라고 답했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주어 담을 수는 없었다. 파키스탄에 간다고? 그는 재차 물었고, 나는 움츠러들었다. 가고는 싶지만 확실하지는 않다며 어물쩍거렸다. 그는 다시금 확인했다. 파키스탄에 갈 계획이 있느냐? 이번에는 슬쩍 역정이 났다. 문제가 된다면 가지 않겠다, 인도 비자가 만료되고 가면 그만이라며 으쓱 어이없다는 어깨 짓을 보였다.

비자를 발급받기 전까지는 무조건 고분고분해야 한다는 철칙을 잠시 잊은 것이다. 당장 부작용이 일었다. 사무실 밖에 나가서 기다리란다. 그렇게 다섯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루 일과를 마치기 전에야 다시 나를 불렀다. 본국에 확인해보니 파키스탄 방문도 가능하단다. 미덥지 않았다. 일부러 몽니를 부린 것 같았다. 괘씸했지만, 고맙다고 했다.

라호르 공항에서도 입국이 간단치는 않았다. 인도에서 발급한 6개월 복수 비자를 보더니, 이유를 묻는다. 인도에서 무슨 일을 하며, 파키스탄에는 왜 온 것이냐며 꼬치꼬치 캐묻는다. 언론인이라고 하면 일이 더 꼬일 것 같았다. (다음 주에 쓸) 카슈미르 방문에서 이미 곤욕을 치른 후였다.

역사학자라고 해도 여의치 않을 듯싶었다. 궁여지책, 여행 작가라고 했다. "Journey to the Eurasia"를 집필 중이라고 했다. 라호르와 카라치, 이슬라마바드의 숙소까지 확인한 후에야 입국 도장을 찍어 주었다. 실제로 두 나라는 상호 비자 발급이 매우 까다롭다. 가족과 친지를 방문하고 돌아온 경우에도 요주의 인물로 분류된다고 한다.

새천년을 전후로 분할 체제가 흔들리는 듯 보였다. 1999년 2월, 당시 인도 총리였던 바지파이는 뉴델리에서 버스를 타고 라호르에 도착하는 역사적인 이벤트를 선보였다. 당시 파키스탄 총리 샤리프를 비롯해 수천 명의 펀자브인들이 환대하고 환영했다. 2004년 인도-파키스탄 정상 회담은 특히 펀자브인들에게 인상적인 기억을 남겼다.

인도 총리 만모한 싱은 1932년에 태어난 시크교도였다. 서펀자브가 고향이다. 대분할 당시 인도로 떠난 피난민 출신이었다. 반면 당시 파키스탄을 통치하던 무샤라프 장군은 1943년 델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싱과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한 피난민이었다. 뉴델리에서 정상 회담을 마친 두 펀자브인은 이슬라마바드에서 재회하기로 했으나, 끝내 성사되지는 못했다.

펀자브 주 차원에서의 노력도 각별하다. 2012년 11월 인도령 펀자브의 주지사가 정치인과 경제인을 대거 대동하여 라호르를 방문했다. 펀자브 동서 간 무역을 증진시키자며 비관세 상품을 확대하고 도시 간 연결망을 강화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서펀자브 국경 지대 마을 사람이 동펀자브의 병원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조치도 마련했다.

특히 라호르-델리 간 고속열차 'Samjhauta Express'가 주목된다. 지금은 직통이 아니다. 국경 마을에서 버스로 이동하여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이곳을 직선으로 잇는 고속열차를 짓자는 것이다. 내년(2017년)에 사업자를 선정하여, 2022년에 개통하는 것이 목표이다. 중국과 일본의 수주 경합이 치열하다고 한다.

분단 100년이 되는 2047년에는 '펀자브 공동 시장'을 출범시키자는 얘기도 나온다. 정치적 재통일까지는 아닐지라도 생활 세계의 재통합은 일정한 궤도에 오른 모양새이다. 과연 두 개의 국가, 세 개의 종교 집단으로 분할되었던 '펀자브 세계'가 복원될 수 있을지 유심히 지켜볼 작정이다.

녹록치는 않아 보인다. 후유증이 원체 심했기 때문이다. 간접적인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델리에서 요가 인맥으로 초대받은 한국분의 남편이 펀자브 출신이었다. 그의 할머니가 피난민이었다. 평생을 악몽에 시달리셨다고 한다.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이 산 채로 불에 타서 죽어가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꿈에 나왔다는 것이다.

남편의 죽음에도 모성은 질겼다. 두 아이를 데리고 델리로 피신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라호르에서는 집 안에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언제 이슬람교도들이 망치와 낫을 들고 와 강간하고 살해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밤마다 지붕 위에 올라가 아이들을 품에서 재우고 할머니는 밤을 꼬박 새웠다고 한다.

겨우 기차를 타고 나서도 괴한들이 침입하며 식칼을 들이밀고 힌두 국가를 원하느냐, 이슬람교도 국가를 원하느냐 심문받기도 했다. '호신용'으로 준비해둔 코란을 보여주고서야 살아남을 수 있었단다. 그 당시에 정신과 상담 같은 것은 드물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분할 당시의 상처를 안고 여생을 났다는 말이 된다. 그 집합적 트라우마는 지금도 간헐적으로, 그러나 폭발적으로 분출한다. 지난 3월 네루 대학교 사태 또한 1947년의 대분할과 결코 무관치 않은 사건이었다. 내상이 무척 깊다.

실제로 분단 건국이 무섭게 인도와 파키스탄은 곧장 전쟁에 돌입했다. 냉전기에만 세 차례 전면전을 벌였고, 탈냉전기에도 간간이 국지전이 일어났다. 화근은 단연 카슈미르였다.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의 모순이 응축되어 있는 장소이다. '히말라야의 눈물' 카슈미르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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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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