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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이 쏟아지자 대통령은 외쳤다 "노동자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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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이 쏟아지자 대통령은 외쳤다 "노동자 만세!"

[프레시안 books] <살바도르 아옌데 : 혁명적 민주주의자>

"내 손을 고름 덩어리와 암 덩어리, 그리고 죽음 속에 집어넣어 빵을 벌었다."

1930년대 칠레는 부패와 빈곤에 신음했다. 남성 평균 수명은 35.4세, 여성은 37.7세였다. 쿠데타가 연달아 이어졌고, 민중은 빈곤에 신음했다. 훗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칠레인으로 선정된 위인이자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 제32대 칠레 대통령. 군부 쿠데타로 비극적 생을 마감하며 폭력적 제국주의의 비정함을 고발하고 세계적 민중 혁명의 상징이 된 인물.

청년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1973년)는 혼란기에 고향 발파라이소의 반부렌 병원 주검 안치소에서 칠레 노동자 생애의 처참한 민낯을 목격했다. 그가 부검한 1500여 구의 모든 시신에 빈곤의 그늘이 상흔처럼 남아있었다. 막 의사로서 삶을 시작한 청년 아옌데는 이미 군대와 감옥과 주검 안치소에서 칠레 민중의 삶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들여다 본 사회주의 사상가였다.

<살바도르 아옌데 : 혁명적 민주주의자>(빅터 피게로아 클라크 지음, 정인환 옮김, 서해문집 펴냄)는 여태 우리가 온전히 알기 어려웠던 아옌데를 다룬 평전이다.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명한 바람둥이가 되었던 그의 어린 시절부터 피노체트 군부 쿠데타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까지 생애 전 과정을 다뤘다. 프리메이슨과 아옌데의 관계, 아옌데 집권기 칠레 좌파 세력 간 반목과 갈등도 세세하게 소개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집중 조명한 미디어 작품은 많지만,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글을 만나기란 쉽지 않음을 고려하면, 이 책의 소중함은 더 말할 필요 없다.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칠레 좌파가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혁명에 끼친 영향'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지은이의 글을 한겨레TV의 정인환 기자가 우리말로 옮겼다.

▲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flickr.com

대륙 전체가 백인의 무자비한 군홧발에 신음한 저 땅에서 칠레의 현대사도 비틀거리며 출발했다. 칠레는 긴 끈처럼 생긴 나라다. 그 현대사 역시 국경처럼 위태로웠다. 독립 후 구리 광산을 중심으로 급격한 공업화가 이어지며 칠레에도 신흥 자본가 계급이 생겨났다. 이들은 돈으로 의회를 매수해 나라를 주물렀다. 그 배후에는 미국 자본이 있었다. 당시 칠레는 미국을 위한 구리, 바나나 생산 기지였다. 칠레 민중은 압도적으로 가난했고, 교육받지 못했고, 위험한 삶을 연명했다.

비참함의 바다에서 노동자를 중심으로 혁명의 꿈, 좌파 정권 수립의 꿈이 솟아올랐다. 아옌데는 파블로 네루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빅토르 하라처럼 노동자의 피눈물로 채워진 바다가 낳은 사람이었다. 비록, 명망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옌데는 공업 노동자의 도시 발파라이소의 자식이었다.

대학생 시절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아옌데는 몬테로 사회주의 정부와 공산주의자 간 다툼, 그로 인해 허무하게 무너진 사회주의 정부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그는 이에 대한 반성으로 의회를 통해 인민을 계몽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현실 사회주의자의 꿈을 꾸게 됐다. 아옌데는 사회당을 중심으로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걸친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수립해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제국주의 독재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21세기 들어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대두하는 사회주의 동맹의 씨앗이 이 때 뿌려졌다.

1930년대 당시 볼셰비즘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자국 악질 기업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은 브라질, 베네수엘라, 페루, 아르헨티나,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도미니카 공화국 등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창궐한 군부 독재 정권을 후원했다. 독재가 대륙 전역을 휩쓸었다. 아옌데는 이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1937년, 사회당 소속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변화가 일어났다. 사회당과 공산당의 동거는 끝났다. 세계는 냉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칠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옌데는 좌파 내 공산당-사회당 세력들과 반목을 이어가다 칠레사회당 소속으로 1951년, 공산당과 칠레사회당의 새로운 연대조직 '프렌테 델 부에블로(Frente del Pueblo(인민 전선)'의 대선 후보로 나왔다. 그의 첫 대선 출마다. 그는 고작 5.6%의 표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전국구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을 거치며 아옌데는 거대한 적과 맞서게 된다. 이유는 구리 산업이었고, 상대는 미국이었다. 아옌데는 1954년 상원 부의장에 선출되면서 본격적으로 미국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는 메카시즘이 횡행했다. 카리브해 이남 모든 나라에서 미국은 다국적 기업을 통해 민주주의자를 탄압했고, 독재자를 지원했다.

아옌데는 칠레사회당과 좌파 야당 연합인 '인민행동전선'을 대표하며 미국으로 상징되는 부패 권력과 맞서는 거물 정치인이 됐다. 그리고 1958년 대선에 야당 대표자로 나섰다. 단 2000명이 전국 자본의 87%를 소유할 정도로 극심했던 빈부 격차에 신음하던 민중은 "사회주의로 가는 다리 노릇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과 달리 아옌데를 메시아로 받아들였다. 보수 언론은 아옌데가 요트를 가진 거부라고 비난했다. 아옌데는 직접 방송에 나서 자신을 향한 모략 공세에 맞섰다. 아옌데는 결국 3%포인트 차이로 패배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1959년 1월 1일, 미국의 코 앞 쿠바에서 세상이 뒤집어졌다. 사회주의 혁명 국가 쿠바가 탄생했다. 전 라틴아메리카가 전율에 휩싸였다. 쿠바 혁명에 맞서 미국의 압박도 거세졌다. 케네디 정부는 공산주의자와 싸우는 방법을 훈련하고, 그 대가로 미국이 직접 경제 원조를 감행하는 이른바 '진보를 위한 동맹' 정책을 내놨다.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군대를 지역 내 좌파 솎아내기의 도구로 삼고, 미국 다국적기업의 지배 체제를 확고히 한다는 계획이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은 더 노골적인 테러 국가가 됐다. 1964년 브라질의 조아오 굴라트트 정부가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다. 미국이 뒤를 봐줬다는 주장이 나왔다. 1965년에는 미군이 도미니카 공화국 수도 산토도밍고를 침공했다. 그리고 미국은 베트남에 폭탄을 쏟아 부었다.

칠레 군부는 반공 사상에 급격히 물들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칠레의 보수 언론은 아옌데를 악마로 묘사했다. 이에 맞서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공산주의자들이 무장 혁명을 요구하는 급진적 성향을 보이게 됐다. "모든 혁명가의 의무는 혁명을 쟁취하는 것"이라는 카스트로의 목소리와 "공산주의자를 뿌리 뽑겠다"는 미국의 목소리에 아옌데의 "선거를 통한 혁명" 구호는 묻혀버렸다. 1964년 대선에서, 아옌데는 CIA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우파 후보에게 또 패했다.

이미 한물 간 인물이라는 회의와 좌파 악마라는 색깔론을 이기고 아옌데는 1969년 10월 9일, 인민행동전선 소속 정당, 독립진보연합, 급진당, (여당이었던) 기독민주당 탈당파가 모인 '인민연합'을 대표하는 야당의 대선 후보로 올랐다. 그리고 네 번째 도전인 1970년 대선에서 36.6%의 득표율로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 100만 달러에 달하는 CIA의 공작금도 아옌데의 승리를 막지 못했다. 드디어 30년에 걸친 선거를 통한 혁명이 성공했다.

그러나 진정한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CIA에 칠레 군부 쿠데타 준비를 지시했다. 헨리 키신저는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첩보 행동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이 프로그램은 5개 항으로 이뤄졌다. 아옌데 정부 정치 세력 분열 조장, 칠레 군부와 접촉 확대, 비 마르크스주의 정당 지원, 반 아옌데 언론사 지원, 쿠바와 소련이 아옌데 정부에 간섭한다는 선동 조장.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부는 내·외부의 적에 맞서 개혁을 실행해 나갔다. 1970년, 칠레 민중이 염원하던 구리 산업 국유화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 법으로 현대 칠레가 만들어졌다. 토지 개혁도 실시했다. 경제가 활황세를 탔고, 1971년 지방선거에서 인민연합은 압승을 거뒀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칠레 우파는 아옌데가 칠레를 또 다른 쿠바로 만들 것이라고 호도했다. 파시스트 준군사 조직 '조국과 해방' 청년들이 폭력 시위를 이어갔다. 미국계 기업 ITT가 인민연합 정부 와해 공작에 가담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도 공개됐다. 외국에서 자금을 지원받은 보수 언론이 쿠데타를 촉구하고 나섰다. 아옌데는 이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는 좌파 정부가 폭력에 기대지 않는 민주적 정부라는 평판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마치 한 손이 묶인 채 싸움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결정적인 암운이 드리웠다. 1972년 10월, CIA의 자금을 받은 전국운송총연맹은 국영 운송회사 설립 반대 총파업에 나섰다. 그해 11월, 인민연합 정부는 군 수뇌부에게 내무부, 공공사업부, 광업부 운영 권리를 떼어줬다. 군은 이제 급격히 정치화했다. 국제 사회에서 고립된 칠레 내부에서 군의 힘은 갈수록 커졌다. 야권은 집요하게 쿠데타를 요구하며 군 수뇌부와 접촉했다. 이미 발파라이소의 해군 장교들은 쿠데타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과의 동거를 거부했다. 1973년 8월, 아옌데와 군을 연결하던 프라츠 장군이 전역했다. 프라츠의 후임으로 2인자였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떠올랐다. 이제, 쿠데타는 시간문제였다.

1973년 9월 11일. 거사일이었다. 이날 새벽, 해군이 발파라이소를 접수했다. 육군은 산티아고로 밀고 들어왔다. 공군은 국영 라디오 방송국과 모네다 대통령궁에 폭격을 가했다. 아옌데는 모네다 대통령궁에서 최후를 맞이하기로 결심했다. 오전 7시 20분, 아옌데는 1971년 칠레 방문 당시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AKM 소총을 손에 들고 집무실로 향했다. 오전 9시 15분, 아옌데는 공산당이 운영하는 <라디오 마가야네스>를 통해 최후의 연설을 했다.

"역사적인 순간을 맞은 지금, 저는 인민의 충정을 제 목숨으로 보답하려 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칠레 인민의 존엄한 의식 위에 뿌린 씨앗은 결코 파괴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제 희생이 헛되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 희생을 통해 범죄자와 비겁한 자, 반역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궁에 포탄이 쏟아졌다. 아옌데는 남은 인원에게 투항 명령을 내리고 독립관의 문을 닫아 걸었다. 한 발 총성이 울렸다. 아옌데는 65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했다. 세계 최초로 선거로 세워진 사회주의 정부의 최후였다.

▲ <살바도르 아옌데 : 혁명적 민주주의자>(빅터 피게로아 클라크 지음, 정인환 옮김,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쿠데타 후 학살이 시작됐다. 좌파 지식인은 물론, 반 군부의 구심점이 되리라 여겨진 숱한 이가 암살됐다. 아옌데와 한때 척졌던 전직 대통령들도 암살됐다. 수를 셀 수 없는 이들이 실종됐다. 피노체트는 물러가도 독재의 상흔은 고스란히 남았다. 기독민주당과 이른바 '혁신' 사회당의 '콘세르타시온' 연합 정부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민중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칠레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2000년이 되어서야 아옌데의 인민연합 집권기인 1970년 수준을 회복했다. 칠레인들은 다시금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아옌데의 유령을 다시 소환하고 있다.

아옌데 삶의 질곡은 우리의 현대사 일부 장면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한국도 군부의 쿠데타로 민주 정권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정권 교체에 성공한 대통령은 끊임없이 보수 언론의 선동에 휩쓸려야 했다. 한줌이 되지 않는 부를 거느린 이들이 세상을 쥐락펴락했다. 이 모든 일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어버이연합과 칠레의 '조국과 해방'이 다를 게 뭔가.

인민연합 정부는 분명 성공하지 못했다. 미국의 개입과 칠레 사회 지도층의 비토, 그리고 공산당 등 좌파 세력과의 갈등은 인민연합 정부가 올곧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그리고 끝내 민주 정부가 파시스트들의 쿠데타에 무너지는 몰락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아옌데는 무너지지 않는 신념으로 '선거를 통한 혁명'은 가능함을 전 세계에 알렸다. 폭력 혁명 말고도 세상을 바꿀 방법이 있다는 꿈을 꾸게 했다. 우리의 민주주의 역시 아옌데에게 빚진 이유다. 반제국주의, 민중 참여주의, 타협을 통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 실패한 혁명에서 아옌데의 꿈을 지금도 세계 수많은 이가 찾는 이유는 여전히 그의 메시지가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올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평전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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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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