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에 널린 네루다의 흔적
새벽에도 도시로 향하려는 사람들은 많았고, 개들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유영하듯 터미널 안을 어슬렁거렸다. 아르헨티나도 그렇지만, 이곳 칠레의 거리에서 개는 거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리를 짓지 않고 각개전투에 임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느긋한 삶을 살아내는 것들이 개다. 칠레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 중앙 광장에 나가 가장 그늘이 잘 드는 벤치를 찾아보라. 이미 개들이 다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산띠아고에서의 첫 인상은 좋지 않았다. 새벽 6시에 도착해서 잠이 덜 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택시 기사 한 분이 우리에게 접근해서 일본말을 몇 마디 주억거렸다.
산띠아고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호스텔의 이름을 줄줄 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행객을 실어나르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같아 흔쾌히 짐을 맡겼다.
'과도한 친절은 언제나 경계하라'는 우리의 이론대로 역시나, 이 친구가 부른 요금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종로에서 동대문 가는데, 만 이천 원을 불렀다고 상상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정색을 하며 반 값만 쥐어 주고 돌려 보냈다. 아저씨는 투덜대며 금세 눈 앞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들어간 호스텔은 만 원. 전 세계 각지에서 모이는 배낭여행객들의 집합소라 그런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난 지 벌써 2주일 여. 간만에 들른 대도시라 그런지, 지금까지 비교적 쉬웠던 숙소 잡기가 우리의 뒤통수를 무겁게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몇 군데를 돌며 잡은 숙소는 싸고 안락한 곳이었는데, 무엇보다 일하는 아주머니의 정치적 성향(?)이 마음에 든 곳이기도 했다.
네루다가 묵었던 곳이라며 자랑스레 말하는 아주머니의 흐뭇한 표정에 우린 '역사적 장소'라 입을 쩍 벌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안 사실. 산띠아고나, 특히 발파라이소 같은 곳에서는 지천에 파블로 네루다가 널려 있다는 것. 파블로 네루다는 모든 호텔, 호스탈, 호스피다헤의 광고 사진으로 쓰이고 있었다. 물론 이들은 대개 자기가 운영하는 숙소에 네루다가 묵었다고 광고한다.
그래도 역시 이 곳은 마음에 들었다. 싼 가격도 가격이지만, 4인용짜리 방을 2인분의 방 값으로 묵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우리는 꾸밍스(Cummings, 산띠아고의 지하철 역 이름)역 근처의 이 숙소에 적을 두고, 인터넷과 전화방을 겸하는 구멍가게와 단골을 텃다.
하필 이 가게였냐고?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2 개월 후 뉴질랜드(New Zealand)로 이민을 갈 계획이어서 한 달 여 영어 학원에 다니고 있던 중, '영어를 사용할 줄 아는' 우리와 친해지고 싶어서였던 게 크긴 했다. 물론 우리도 이 부부의 친절한 품성에 반했기도 했다.
군사기지였던 산타 루치아 언덕
사실 산띠아고에서 에르네스또의 기록이 많지 않다. 이들은 다만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들러, 추키카마타 광산 견학 일정과 이스터 섬 배편을 알아봤을 뿐이다.
그리고 산타 루치아(Santa Rucia) 언덕에 올라 속된 말로 '죽치고 앉아서'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우리 역시 같은 목적으로 산띠아고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추키카마타 취재를 위한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으나, 안타깝게도 그 날은 토요일이었고, 우리는 휴일에 겨운 한 직원의 황금 시간을 살짝 방해해야만 했다. 물론 부정적인 답변을 들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추키카마타 취재 일정은 후에 대사관 측의 친절한 도움으로 무사히 소화해 낼 수 있었다. 이 해프닝은 물론 나중에 자세히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실망한 기분을 안고 산따 루치아 언덕으로 향했다. 지하철 역 산따 루치아에서 내려서 도보로 약 1분 거리에 있는 이 곳은 평화롭기 그지 없는 곳이다.
식민지 시대에 중요한 군사기지이기도 했던 이곳엔 아직까지 대포가 전시되어 있었고, 초소가 보존되어 있었다.
산따 루치아 언덕에 쓰임새와 역사에 관심을 갖고 둘러보던 도중 우리처럼 커다란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작가'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게바라를 욕하는 그들의 현실적 계산
우리 역시 동질감을 가지고 이 사진작가의 작업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몇 번 눈이 마주쳐서 인사를 하기도 했다. 이 아저씨는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등에 지고 길다란 렌즈를 탑재한 캐논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무섭게 눌러 제치고 있었는데,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있는 나를 발견하더니 가까이 다가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몇 마디인가를 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는 것은 살인자(Murderer)라는 단어. '체 게바라는 살인자야,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구.'
살짝 황당해 하는 우리의 표정 사이로 역시 바쁘게 셔터을 눌러대며, 이 배불뚝이 아저씨는 사라졌다. 별로 대꾸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분통이 터지는 경험이긴 했다.
체 게바라가 대항해야 했던 권력자들이 죽인 수많은 목숨은 무엇이며,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단순한 이분법으로 살인하는 자와 살인당하는 자의 구분만이 중요하다면, 살인을 둘러싼 걸레 같은 구름들 모양의 악취나는 욕망 다툼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예를 들면 이렇다. 부시는 평화주의자다. 그는 살인을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살인은 체 게바라같은 자들의 살인을 저지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체 게바라를 살인자라 말하는 저의에 깔린 고매한 '평화주의자'의 탈, 그 뒤에 가려진 철저한 현실주의자의 계산들. 욕망과 관련된 많은 얼굴들, 손가락들.
심호흡을 한 번 하자. 휴. 너무 흥분했다. 당시에 든 생각이 이러했다는 말이다. 한 낮의 태양 볕을 쪼이며 물을 머리에 뒤집어 쓰고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다니면 가끔 이런 정신병에 가까운 상상도 드는 법이다.
총 없는 혁명의 가능성…오랜 고민 거리
물론 그 아저씨는 부시도, 체 게바라도, 간디도 아니다. 멋대로 상상한 대꾸들이었지만, 말 그대로 상상일 뿐, 그 아저씨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대화의 기회를 일방적으로 박탈당한 '비폭력주의자'의 멋진 배려에 우리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긴 했었다.
스치듯 들은 이 말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 게 사실이다. 맞는 말이다. 체 게바라는 살인자다.
에르네스또가 여행 중에 알베르또에게 강변했던 '총 없는 혁명은 불가능해'라는 말 속에는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숨어있기도 하다.
폭력은, 말하자면 자명한 것이지만 '살인'을 수반한다. 애초에 우리의 여정은 체 게바라를 변호하려 시작한 게 아니었다. 우리가 다음 여정인 발빠라이소(Valparaiso)의 한 식당에서 생선을 뜯으며,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칠레 청년과 나눈 대화는 우리의 생각을 구체화시켜주었다.
이 친구 역시 체 게바라의 티셔츠를 입고 있는 내게 웃으며 물었다.(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니는 것의 이점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왜 체 게바라의 티셔츠를 입고 있는가?
우린 여행의 취지를 설명해주었고, 이 친구의 표정은 순간 진지해졌다. 자신 역시 체 게바라의 이상에 공감하며, 그가 훌륭했던 사람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확한 언급을 피하며 세상엔 같은 일을 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고, 체 게바라든 누구든 그 같은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평화적인 방법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질문을 던졌고 체 게바라를 두고 '살인자'라고 말했던 사람을 산띠아고에서 만났던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 친구는 누구에게는 체 게바라가 살인자일 수도 있다고 말하며, 다른 방식을 고민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했다. 우리의 짧은 대화는 이쯤에서 끝났다.
"우리는 같은 이상을 다루는 다른 방식의 설명서를 원한다"
지난한 폭력의 시대를 끝내는 방식이 또 다른 폭력의 세기로 향한 입장권이라면 거부해야 하는 것은 맞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구악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체 게바라가 혁명가로써 전 세계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남은 이유는 혁명 이후의 쿠바에 대한 생각이 부족해서였을 수도 있다.
체 게바라같은 혁명가가 87년도에 한국에 등장해서 군정을 끝장냈다고 해서 우리가 더 좋은 세상에 살수 있었을까? 바보같은 질문이라는 것, 잘 알지만 우리는 항상 목표 달성 이후의 삶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여행의 끝을 향해 채받이를 후려갈기는 여행자들에게도 여행 후의 삶이 더 중요한 것이리라.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떤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따위의 지루한 이야기들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더러는 전설적인 무용담을 가장한 따분해빠진 변절이야기도 부록처럼 끼어들어온다.
이 지루한 사람들의 과거 추억을 뒤치다꺼리 하는 게 젊은 사람들의 일은 아닐 것이다. 미래를 생각하는 자 과거를 변호하지 말지어다.
그러므로 체 게바라에 대한 우리의 변호도 패스.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아냈고, 다른 이들에게 눈물과 웃음을 안겨주었으며, 때로는 죽음과 삶을 쥐어주었다. 우리는 같은 이상을 다루는 다른 방식의 설명서를 원한다.
산띠아고의 호스탈에서 이틀 동안의 휴식을 꼼꼼히 챙겨주셨던 할머니는 내 티셔츠를 보더니 '엘 체!'라고 소심하게 탄성을 지으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산띠아고에 내리는 비'…아옌데 박물관은 공사중
그녀는 소녀 시절 살바도르 아옌데 전 칠레 대통령(Salvador Allende, 역사상 최초로 선거로 집권한 사회주의자 대통령)과 파블로 네루다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늙은 소녀였다.
우리는 가지고간 피엠피 플레이어로 '산띠아고에 내리는 비(당시 쿠데타군의 작전명이었다고 함. 이를테면 '화려한 휴가'와도 같은)'를 보여주었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영화였지만, 중간에 스페인어 가사로 나오는 빅또르 하라(Victor Jara)의 벤세레모스(Venceremos, 우리 승리하리라)를 따라 부르는 할머니의 표정에서 소녀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살바도르 아옌데 박물관을 찾기로 한 날은 무척 더웠다. 우리는 산따루치아 언덕에서 연인들의 애정 행각을 질리도록 보고 내려온 후 대통령네 집인 '모네다 궁'엘 들러 껑충한 헌병들의 삼엄한 경비 속을 뚫고 셔터를 눌러댔다.
다음 목적지는 살바도르 아옌데 박물관(Museo de Salvador Allende). 박물관은 시 외곽, 한참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웬걸 공사중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
그 옆의 가브리엘라 미스뜨랄 박물관이라도 가보려 했지만, 뜨거운 태양에 방아쇠라도 당기고 싶은 기분이 들어 패스.
칠레인들은 다양한 생각을 하는 법을 안다. 우리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칠레의 정치 문화가 수준급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산띠아고에서 만난 호스탈의 할머니 역시 그러했고, 체 게바라의 삶에 대한 맹목적 경의를 거두게 해 주었던 사람들도 그러했다.
유럽 이민자들이 건설한 항구 도시, 발빠라이소…겉도는 원주민들
'남미의 섬'이라 불리는 칠레는 우리가 외신을 통해 접한 라틴아메리카의 두루뭉수리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자유롭고, 미국문화는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거리에 물건들이 넘쳐난다. 젊은이들은 풍족한 물질적 혜택을 누리지만 반항적인 외양을 고수하고, 사람들은 한국차나 일본차, 미국차를 타고 일을 하러 간다. 우리는 다음 여정지인 발빠라이소로 향했다.
발빠라이소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칠레 대부분의 항구도시가 그렇듯, 이 곳 역시 독일, 이탈리아 등지의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에 의해 건설되고 발전한 곳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민자에게 토지의 권리를 과도하게 부여했던 칠레 당국의 조치에 쫓겨난 많은 원주민들도 있을 것이다.
원주민들은 칠레에서 겉도는 존재들인 것 같았다. 우리는 늦은 밤 발빠라이소의 선술집에서 봤던 원주민 부부의 고된 표정 앞에 놓여 있는 일 리터짜리 맥주 한 병을 생각할 수 있었다. 역시 칠레는 이상한 나라다.
한국과 비슷한 수산시장 풍경
또한 항구도시답게 곳곳에 수산시장이 모여 있어 우리에겐 정겨운 냄새를 풍기는 곳이기도 했다. 이 풍부한 해산물을 가지고 어떻게 그런 형편없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으나, 비싼 해산물 요리를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패스.
다만, 우리가 체 게바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청년과 만난 식당인 뽀르또 비에호(Porto Viejo, 우리가 묵은 숙소의 주인장께서 소개해준 집이었다.)에서 맛본, 이 지역 특산이라는 레이네따(Reineta)라는 생선은 꽤 맛이 있었다.
삼치와 비슷했는데, 삼치보다는 덜 팍팍하고 부드러웠다. 주인은 외국인이 올 때마다 이 생선 요리를 추천하는데, 맛을 본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만족한다고 자랑했다.
수산시장은 한국의 그것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상인들 옷에 밴 짠내, 그리고 생선 찌꺼기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개와 고양이, 어디에나 있는 구걸하는 자들. 그리고 생선 요리점을 기웃거리는 넥타이 족들. 바닷가 위, 언덕위로 수많은 불빛들이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걸려있는 모습을 보며 도시의 해변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살인적인 물가 상승률…국민 3분의 2는 저임금 서비스업 종사자
2007년 기준으로 1인당 국민 소득이 14400달러에 달하고, 7%의 실업율로 남미 국가들 사이에선 비교적 경제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6.5%에 달하는 물가 상승률은 살인적이다.(CIA 팩트 북 참조) 물가는 한국, 특히 서울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북부 지역으로 올라가면 만성적인 물자부족으로 물가는 더 높다. 광산 노동자들의 비교적 높은 임금이라면 살아낼 수 있겠지만 국민의 3분의 2가 종사하고 있는 서비스 업종의 저임금은 소득격차를 늘리는 주 요인으로 꼽힐 것이다.
이는 한국의 저임금 서비스 산업을 봐도 알 수 있다. 여러모로 한국과 비슷한 나라다. 물론 구걸하는 자들과 도둑은 한국보단 많다.
급속도로 미국화되어가고 있는 칠레의 정치 경제적인 독립을 유지시켜주는 자존심이라면 단연 세계 제 1의 구리 생산국이라는 타이틀이다. 이른바 '칠레의 월급봉투'.
ⓒ손문상 |
선술집에서 만난 공산주의자 "좌파의 탈을 쓴 대통령이 신자유주의를 밀어 붙인다"
하지만 칠레 역시 미국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우리는 다음 날 발빠라이소 시내를 걷던 도중 '볼리바리아노(Bolivariano, 볼리바르는 남미 해방의 영웅)'라는 거창한 이름의 선술집을 발견했다.
이 곳 주인인 까를로스 사모라(Carlos Zamora)씨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소개하며 구 소련의 상징이 새겨진 화려한 담배 케이스를 자랑스레 내 보였다.
그리고 현 대통령인 '미첼 바첼릿(Michel Bachelet)'을 두고 '미국의 꼭두각시'라 비난했다. 겉으로는 좌파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실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열악한 공공의료, 명목만의 무상교육…"칠레가 미국화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재 칠레 정부는 좌파라는 타이틀을 떼야 한다고 했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화려한 경제 성장에 가려진 미국 경제와의 유착이라는 것이었다.
칠레는 급속히 미국화 되어가고 있다. 공공의료 서비스는 더욱 형편없어지고, 무상교육이라는 것도 사실상 사립학교의 고급교육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칠레 빈부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준다고 말했다. 우리는 간간히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 쓰는 이 공산주의자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사실 칠레의 거리와 젊은이들의 풍속에서는 확실히 미국 냄새가 많이 난다. 일본의 요란한 패션과 어울린 '컬러훌'한 머리색과 화장색, 혹은 '코스프레'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어른들은 늘 아이들이 못마땅하다
소년과 소녀들은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연애를 하고, 청년들은 새침때기 같은 표정을 지으며 거리를 발랄하게 활보하고, 그 틈바구니로 불만 가득한 표정의 젊은이들이 체 게바라와 밥 말리(Bob Marley, 이들 발음으로는 '봅 말레이') 티셔츠를 입거나, 펑크록커를 흉내 내며 거리를 헤맨다.
공산주의자든, 평화주의자든, 어른들은 이런 아이들이 못마땅하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칠레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다.
낮에 들렀던 파블로 네루다의 옛집 '라 세바스띠아나(La Sebastiana)'에서 본 발파라이소의 시성 가득한 풍경과, 이제는 상징이 되어버린 '아센소르', 그리고 공산주의자 아저씨의 말을 버무리면서 다음 여정을 준비했다.
이제는 칠레 북부다. 구리와 미네랄, 그리고 사막의 황량한 풍경의 북부. 안구를 물들인 초록물을 빼버려야 할 때다.
소방대원들에게 존경과 경의를!
뱀발 하나. 우리가 발빠라이소에 도착했을 때, 마침 시내에 큰 불이 났다. 우리는 로스 앙켈레스(Los Angeles)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칠레 소방대원들의 실제 활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곳에 모인 기자들, 그리고 공무원들은 단순 가스 폭발 사고라는 말로 공식적인 답변을 마쳤지만 그 희생자에게는 비극이었고, 칠레 소방대원들에게는 전쟁터였다.
다시 한 번 칠레 소방대원들인 '봄베로스(Bomberos)들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물론 남대문 소실과 여타 크고 작은 사고들에 묵묵히 대처하고 있는 한국의 멋진 소방대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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