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예상했지만 누구나 '설마'라는 단서를 달곤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뒤끝' 보다 총선을 앞둔 새누리당의 '승리욕'이 더 강할 거라고 내다봤다. 권위주의 시절은 지났고 그만큼 새누리당의 지지층에도 어느 정도의 변화가 생겨왔다. 제아무리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해도, 단지 그와 맞섰다는 이유로 당의 중진 의원을 보란 듯이 '제거'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180석을 총선 목표라고 한 이상 그런 결정은 쉽지 않을 거라고들 예상했다. 그러나 모두가 틀렸다.
'틀린 예상'이 한때 계파를 불문하고 쏟아져나왔던 이유는, '그래도 지금이 몇 년도인데…'와 같은 순진한 사고가 팽배해서만은 아니다. 박 대통령이 제 입으로 외쳐 온 '박근혜식 개혁' 의지를 높이 봤기 때문이다. 최악의 여론과 당내 반발을 뚫고도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였던 청와대다. 임기 말이 되어서도 그런 추진력을 가지려면 지금보다 거대 여당이 필요하다. 잠시 주춤해진 노동 4법 등의 안정적 추진을 위해서는 수도권 의석을 반드시 다량 접수해야 한다. 눈엣가시 같은 비박계 의원 몇 명과 함께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달 중순 들어 '비박계 공천' 학살이 본격화하자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기 시작했다. "설마 했는데 진짜 학살이다"란 말들이 새누리당 주변에 나돌았다. 14일엔 비박계 권은희·주호영 의원이, 15일엔 이재오·진영·김희국·류성걸·이종훈·조해진 의원의 목이 줄줄이 잘려나갔다. 탈당 바람이 불고 수도권 민심이 돌아선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처형은 멈추지 않았다. 유승민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사실상 공천 배제를 당했다. '유승민은 남기고 수족만 자를 것이다'란 예상마저 보란 듯이 빗나갔다.
예상은 두 가지 지점에서 틀렸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청와대의 개혁 (그것이 실제론 개혁이 아닐지언정) 의지는 여전히 높다. 그러나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친박과 비박이 뒤엉킨 180석의 거대 여당이 애초에 아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사이즈'가 작을지언정 박근혜 대통령의 '앞으로' 외침에 맞춰 군말 없이 일사불란하게 따라올 '친박당'이면 충분하다는 판단이었을 거란 얘기다. 한 비박계 수도권 지역 후보는 "청와대와 친박 입장에선 당내 갈등에 소모해 온 에너지를 아끼고 차라리 정예 부대를 편성하려 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180석 새누리당 대신150석 친박당이 필요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 국회 선진화법은 여전히 걸림돌이다. 국회의장의 본회의 직권상정 요건을 천재지변과 전시·사변, 교섭단체 대표 간 합의 등으로만 제한해놓은 까닭에 새누리당은 청와대 관심 법안 추진에 원하는 만큼의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국회를 통한 길로만 선진화법 '해체'에 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박한철 헌법재판소 소장은 지난 18일 "19대 임기 내에 선진화법 위헌 여부를 결론 내리겠다"고 밝혔다. 박한철 소장의 헌재는 앞서 사상 초유의 '정당 해산' 결정을 내린 이력이 있다. 선진화법 위헌 결정이 내려지면 180석은 필요 없다.
더욱이 야권이 분열된 상황이다. 안철수 의원의 국민의당은 현재로선 더불어민주당과 한몸이 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더민주 탈당 의원들을 '이삭줍기' 하듯 움직인 결과 얼마 전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데도 성공했다. 더민주보다 '오른쪽'에 있는 국민의당이 주요 국면이 되면 청와대를 위한 '슈퍼맨'이 되어줄 가능성은 작지 않다. 앞서 여야 간 쟁점이 됐던 원샷법(기업활력제고법), 관광 진흥법 등에서 국민의당 소속 의원들 중 상당수가 새누리당과 입장을 같이했다. 그들은 '원군'이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청와대와 친박계 입장에선 '선거 패배가 나쁠 것만도 없다'는 점이다. 청와대의 오래된 태도를 돌이켜보자. 세계 경제가 매우 안 좋다. 그럼에도 정부는 계속해서 노력 중이다. 이런 속도 모르고 야당과 여당 내 '자기 정치' 세력은 정부 행보에 딴죽을 걸어왔다. 특히나 집권 여당 소속임에도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말까지 한 유 전 원내대표는 무책임의 극치다. 이러니 대통령이 나서 책상을 두들기며 성을 내고 직접 서명운동까지 벌인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책상 치기'의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이런 상황이 '남 탓'을 하기 좋은 환경임도 부인할 수는 없다. 청와대가 의도적으로 만들었건, 실제 현실이 그러하건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많은 유권자가 이런 '남 탓' 프레임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작금의 경제 불황은 정책 수단 몇 개로 1~2년 사이에 반전을 만들기는 어려운 수준이라고 본다. 현실이 그러하다면, 정치적으로는 야당 탓을 할 환경을 유지하는 게 더 편리할 수도 있다. 새누리당 압승이 꼭 청와대에 좋은 것만은 아니란 얘기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김무성 견제'다. 당내 친박계로선 선거 패배가 나쁠 것만은 없다는 생각을 할 법하다. 어쨌거나 선거 승패에 대한 무한 책임은 당 대표에게 있으니까. 김무성 대표는 비박계 좌장이자 밀어내고 싶은 대권 후보다. 그런 김 대표의 의지로 새누리당은 상향식 공천을 기본 노선으로 채택했다. 그 결과 새누리당의 공천을 통한 현역 교체율은 33.3%다. 선거 후 기대만큼의 의석을 얻지 못한다면 이는 친박계의 좋은 공격 포인트가 된다.
새누리당 전당대회가 곧 다가온다. 김 대표의 임기는 올해 7월 전당대회와 함께 끝난다.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압승하면 김 대표의 체급은 한 단계 더 올라간다. 반대로 기대에 못 미친다면 친박계가 '총선 패배, (친박으로의) 세력 교체'를 들고 전당대회에 나서기 편리해진다. 당내 권력지도가 친박계를 중심으로 완고하게 짜이면 청와대도 안정적인 임기 후반 국정 운용을 기대할 수 있다. 여의도에선 벌써부터 최경환 의원이 차기 대표로 이름이 오르내린다.
물론 당장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정치권에서 이런 예측 또한 보기 좋게 빗나갈 수 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새누리당이 수도권에서 의석을 예상보다 훨씬 더 빼앗기는 경우가 벌어지면 그렇다. 이 경우엔 친박 비박 모두의 패배다. 서울 서대문을에서 출마한 정두언 의원은 "새누리당 과반 의석이 이미 무너진 것 같다"고 했다.
180석도 아닌 150석이 무너져 과반 정당이 되지 못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무소속으로 당선된 비박계 의원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제 손으로 내친 유승민이 다시 필요해지는 상황 말이다. 이 경우 유 의원의 존재감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커질 수 있다. 죽은 유승민이 산 친박계를 칠 수도 있다.
이런 끔찍한 상황을 막기 위해 새누리당과 청와대는 유승민 의원의 '무소속 생환'을 막아야 한다. 유승민의 생환을 막을 수 있는 '비책'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들도 나온다. 집권 세력의 현재까지 정치 공작 행태를 보면 우스갯소리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박근혜 사천' 논란을 무릅쓴 친박의 도박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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