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노의 좌장인 이해찬, 그리고 당의 '대포'로 알려진 정청래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에서 공천 탈락했다. 합법적 정변이라고 할 만하다. 새누리당의 진보파 유승민 의원도 역시 탈락 위기에 놓여있다. 이 사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권력투쟁 등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최근 나타나고 있는 보수화 경향이라는 잣대로 판단해 보려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미움받을 용기'로
이명박 정권 시기는 진보의 시대였다. 권력은 보수였지만 이에 반발해서 민심은 진보로 향했다. 당시 보수집권당이 서울시장과 구청장선거 등에서 연패했던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그때보다 더한 보수정권인데 민심은 이를 따라가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들이 2012년과 2015년 사이에 더 보수화되었다. (...) 우리나라 유권자들이 박근혜정부 3년간 중도진보에서 중도로, 중도보수에서 극단적 보수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표심의 역습>, 234쪽.
최근의 보수화 경향을 우리사회가 충분히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위의 조사결과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여기서는 이 사실을 사회과학적 논증이 아니라 두 권의 베스트셀러를 통해서 확인해 보려 한다. 베스트셀러는 동시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어떤 것을 선호하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것도 밀리언 셀러나 장기 베스트셀러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아진다. 2010년에 나온 <정의란 무엇인가>는 읽기 쉽지 않은 책이었지만 100만부 이상 팔렸다. 정의가 없는 시대에 정의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책의 제목만 보고 선뜻 책값을 지불했다.
그뒤 5년이 지나 <미움받을 용기>가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지난해부터 올해 2월까지 51주 연속 판매고 1위로 역대 최장기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이 책도 제목 효과를 본 것 같다. 자신의 감정을 중시하는 이기적인 처세법을 가르쳐준다. 두권의 책 사이에 민심의 어떤 변화가 숨어있는 것일까.
<미움받을 용기>에 따르면 인간의 고민은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워야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김정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남의 이목에 신경 쓰느라 현재 자신의 행복을 놓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아무리 잘 보이려고 애써도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니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 누구도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나만큼 오래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 이목 때문에 내 삶을 희생하는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느냐..."
이 책은 타인과의 연대를 포기하고 자기의 존재 안에 달팽이처럼 움츠러든 현실도피적인 사람들을 정당화해준다. 이같은 이기주의 경향이 지금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다.
왜 진보에서 보수로 전환됐나
불과 몇해 사이에 시대정신이 냄비처럼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일까? 큰 흐름은 따로 있고 이것은 작은 흐름인 걸까. 이런 변화의 원인이 무엇일까.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이 이명박 정부에서 정의가 사라졌다는 믿음 때문이라면 <미움받을 용기>는 박근혜 정부에서 나타난 '헬조선'의 산물이다. 지난 연말 이 책을 다룬 <프레시안> 기사는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헬조선' 절망이 미움받을 용기 열풍 낳았다”. 기사에는 이런 언급이 보인다. "변혁을 기대하는 심리가 붕괴했다. 이제 스스로를 추스리는 데 사람들은 집중한다. 더는 사회에 바랄 게 없다는 정서는 '헬조선'이라는 용어로 대표된다.”
헬조선은 이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먼저 부숴뜨린다. 방어력이 없는 어린아이들이 먹잇감이 되고 있다. 연초부터 끊이지 않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사건이 이어지고 있다. 어린이들의 죽음은 공동체 유지의 기초단위인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선진국 중에서 최하위권이라는 삶의 질이 계속 하락하고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헬조선'이 레토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실제로 연옥에 접어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놀라운 것은 헬조선에 대한 우리사회 구성원들의 반응이다. 그것에 저항하지 않고 회피 외면할 뿐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굴절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실업으로 꿈과 희망을 잃은 '엔포세대' 청년들의 절규는 변혁의 에너지가 아니라 보수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2013년 출간된 오찬호의 책 제목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이다. 이 책에는 요즘 대학생들이 KTX여승무원들의 정규직 전환에 반대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헬조선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세월호 참사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전국민의 뇌리에 트라우마가 생겼다. 국가가 나와 내 가족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그러므로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재산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미친 전세값'으로 대변되는 민생의 악화도 사람들을 보수적으로 만든다. 경제는 장기 침체에 접어들고 있어 소득이 감소하는데도 주거비는 급증한다. 민생의 악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존을 우선하게 만든다. 생존이 위협받으면서 자신과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보수성향이 발동하고 있다.
민심의 보수화가 정치권을 격변 속으로 몰아넣어
4월 총선을 앞둔 공천 정국에서 더민주당 이해찬과 정청래의 목이 잘렸고 새누리당 유승민의 탈락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보수화 현상이 주요 원인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도미노처럼 여러 단계를 거쳐 정치인들을 쓰러뜨렸다.
갑자기 나타난 보수화 현상은 변혁과 진보의 든든한 기지였던 호남의 절반을 무너뜨렸다. 호남 노년층에서 주로 나타난 보수화는 야당을 격변 속으로 몰아넣었다. 안철수 탈당과 국민의당 분당은 호남 보수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호남의 전방위 공격에 기진맥진해진 문재인이 물러나면서 대응카드로 김종인을 불러들여 '비상대권'을 쥐어주었다. 새누리당 출신 보수인사를 초빙한 것은 보수의 공격에 진보가 손을 들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김종인은 정무적 판단이라며 이해찬 정청래를 공천 배제했다. 보수 흐름에서 시작된 일련의 변화가 더민주당내 좌파인 친노를 친 것이다.
이것을 김종인의 자의적인 결정이라고 보는 것은 시대 흐름을 눈여겨 보지 않은 결과이다. 더구나 김종인이 근 30년 전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해찬에게 당한 패배에 대해 복수를 한 것이라는 주장은 흥밋거리 가십에 불과하다. 문재인이 대권가도에 잠재적 경쟁자인 이해찬을 김종인의 손을 빌어 날렸다는 '차도살인'은 종합편성 채널의 출연자들이 만들어낸 소설일 뿐이다.
김종인에게 "짜르"와 같은 명칭이 붙을 정도로 막강한 힘이 생긴 이유는 그의 보수성향과 보수 흐름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때를 잘 타고 등장한 것이다.
보수 흐름은 새누리당도 비껴가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이었던 유승민파도 공천 전쟁에서 줄줄이 탈락했다. 이것을 당내 권력 싸움으로 해석하면 간단하다. 틀린 분석도 아니다. 그러나 조금 더 주의깊게 들여다보면 더민주당과 공통점이 보인다. 새누리당내에서 왼쪽에 편재해 있는 그룹과 더민주당내에서 왼쪽에 서있는 그룹이 공천을 받지 못했다. 이것이 과연 우연한 독립적인 사건일까. 정치는 시대의 흐름을 가장 예민하게 반영하는 시스템 아닌가.
최근 5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의 주요한 특징은 급격하고 동시에 은밀하다는 점이다. 전문가들도 예상못했을 정도로 진보의 시대가 갑자기 다가왔고 그것이 채 물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슬그머니 보수 흐름이 다가왔다. 정치는 출렁이는 바다위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요동친다. 이런 변화를 어느 정파가 잘 타고 넘어가는가에 따라 이번 선거와 내년 선거의 승패가 결정될 것이다.
지난 대선 때는 새누리당이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진보시대가 왔음을 간파하고 곧바로 당색깔도 바꾸고 당강령에서 보수조항도 삭제하며 '진보 코스프레'해서 집권에 승리했다. "선거 기계"라는 말을 들을 만큼 그들의 선거 능력은 더민주당보다 한 수위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어떨까. 더민주당은 이해찬 정청래의 목숨값을 받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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