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즈(刘治)는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말하자면, 그의 그림은 왠지 기시감이 들면서도 살짝 새로운 느낌이 난다. 왜냐하면 그가 그림에서 자세하게 묘사한 사물들은 우리의 눈에 익숙한 것들의 새로운 조합이기 때문이다. 리우즈 그림은 그래서 할 포스터(Hal Foster)가 말하는 '언캐니(uncanny)'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된다.
리우즈의 그림 안에 표현된 시간은 과거와 미래, 두 가지다.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리고 있는 혹은 보고 있는, 그림 밖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 된다. 이로써 과거와 미래를 막 지나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미술은 공간 예술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문학이나 음악과 같이 시간의 추이에 따라 어떤 스토리를 형성해 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여러 시간이 겹쳐있는 리우즈의 그림들은 공간 예술을 시간 예술로 이끈다. 그러한 시간성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리우즈가 처한 지금의 시간이자 그림을 보는 우리들의 시간이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상' 현실
그러나 리우즈의 그림은 그러한 초현실주의와는 살짝 거리를 둔다. 물론 그의 그림들에 있는 것들은 현실에 있는 소재를 가지고 현실에 있지 않는 것들을 묘사했기 때문에 현실에 고정되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즉 현재의 시간성을 읽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가 정말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바라보면, 그가 나타내고 싶은 '지금 이 순간'의 시간성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Rich Dress](2011년)나 [White Dress](2011년)와 같은 작품들에는 완벽히 구상적 미술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실제의 측량감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특징은 첫째는 인물의 뒷 배경에 벽지와 같은 텍스타일 디자인을 사용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자연물이나 혹은 그것이 연상되는 무늬들을 전면에 배치한다는 것이다.
나비, 원숭이, 꽃 등과 같은 것들이 전면에 배치되고 일정한 패턴이 반복되는 배경이 가장 후면으로 밀려나서 인간이 기괴한 모습으로 이 둘 사이에 끼어 있는 형상이다. 중세의 옷에 끼어 있거나 혹은 기괴한 해골바가지 모자 속([Born 1975](2012년)에 끼어 있다. 그리고 여기 이 무한 반복되는 패턴과 자연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은 여성이다.
2016년 현재 중국이라는 내셔널리티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 그림들은 사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이 곧 중국의 현실이 된다. 리우즈는 이러한 그림을 통해 여러 시간들을 통과시키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의 중국인은 그렇게 지난 사회주의와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 모르는 하지만 아름다울 것이라고 상상되어지는 미래 사이에 끼어 있다.
여기서는 서구와 동양이라는 공간 개념 또한 사라진다. 그림 속 주인공들은 지금을 살고 있는 중국인을 묘사한 것이다. 어쩌면 중국인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현재 마주하는 중국인들은 규정되지 않는 이들이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이미지가 전혀 없다. 또한 중국적인 것도 없다. 그것이 지금 중국이 처한 현실이다.
따라서 리우즈의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과거나 혹은 미래의 어떤 지점이 아니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여러 시간들의 경험이 통과되어 콜라주를 이루며 조각들로 접하여진 현실이다.
현실은 시간의 겹침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 [Dreamland](2013년)에 보이는 물고기 뱃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식사는 만들어진 가상현실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이다. 인간 형상의 나비가 물고기 콧등에 앉아 있고, 윈도우 안의 두 인간들의 식탁에는 알 수 없는 기괴한 것들이 피를 흘리고 있다. 그리고 물고기의 아가미에는 작가의 이름 '리우즈(LIU ZHI)'가 새겨져 있다.
인공 물고기 속에는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물고기는 자연의 물고기가 아닌 셈이다. 그래서 인간의 식용 대상인 물고기는 건물로 상징되어 진다. 그래서 인간과 물고기가 위치 전도된 이 그림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이 착위(錯位)된 중국의 현실이다. 모든 것은 섞여 있고 고정된 위치는 없어졌다.
'중국적인 것(Chinese-ness)'을 그림에서 충분히 내뿜던 시기는 지나갔다. 중국의 현대 미술 작가들은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작가 자신 개인의 문제로 소재를 돌렸다. 장샤오깡(张晓刚), 위에민쥔(岳敏君), 팡리쥔(方力鈞), 정판즈(曾梵志)로 대표되는 현재 중국 작가들의 냉소적 리얼리즘들에는 고발의 메시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고발에는 군체주의적인 사회주의 시기로부터 떨어져 나온 벌거숭이 개인, 혹은 아픈 기억 속의 '나'를 재발견하는 고뇌들이 있었다.
하지만 2010년대를 접어든 현재 포스트 사회주의 중국은 가장 개인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후기 자본주의 아래서 그 위치를 헤매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살아 있지만 죽음에 다가가는 숨 막히는 현실에 대한 이미지화일 것이다. 히스테릭한 이미지의 짜맞춤과 거짓말 같은 사실들이 현재 펼쳐지고 있는 중국의 현실과 '발작적 아름다움(convulsive beauty)'(Andre Breton)을 내뿜고 있는 리우즈의 그림은 그래서 한 쌍이 된다.
사실 리우즈에 대한 기록이나 평가는 현재 중국 내부에서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다. 그의 그림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세계적 의류 기업 이탈리아의 베네통(Benetton) 일가가 수집을 하면서부터였다. 그의 그림들은 중국적이지 않은 그림들이기 때문에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그림들은 대부분 중국 사람들이 지금 현재 살고 있는 그들의 현실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술적이고 거짓과 같은 이 그림들이 보여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중국의 '지금 현실'이다. 그렇게 '중국의 현실'이라는 기의(記意)는 그의 그림 표면에서 계속 미끄러져 간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