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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기 낀 중국의 자화상, "벽에 매달린 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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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기 낀 중국의 자화상, "벽에 매달린 뚱보"

[김영미의 중국 미술 깊게 읽기] 머우보옌의 뚱뚱이 조각

2013년 독일의 카셀에서 전시된 머우보옌(Mou Boyan, 牟柏岩)의 작품은 뚱뚱하고 거대한 몸집으로 사다리를 오르는 한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이었다. 크기 면에서도 가히 놀랄 만하지만, 벌거벗은 몸뚱아리에 붙어 있는 비계 덩어리들이 주는 감이 미끈하면서도 숨차다.

멍청한 표정으로 건물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 조각상은 일단 외형부터가 매우 '포스트 사회주의 중국'스럽다. '포스트(post)'가 뜻하는 '이후(after)'라는 의미 외에, '국면(dimension)'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잘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blog.photographiedepot.de

사회주의 조각 작품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사회주의 이후의 또 다른 사회주의 모습들의 구현이었다. 첫째, 이 작품이 조각 형태로 구성된 점에 주의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마오(毛澤東)의 사회주의 시기에는 예술이 정치를 위해 그 내용을 이뤄야 했는데, 이때 이러한 내용을 담도록 허용된 양식은 그림 회화와 공공 건물에 세워진 동상, 즉 조각 형태였다.

말하자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응축한 거대한 마오 개인의 우상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된 미술 형식이 바로 조각이었다.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이 이루어진 직후, 왕커핑 (Wang Keping, 王克平)은 <우상(偶像)>(1979)이라는 조각 작품으로 가장 사회주의적인 미술양식을 이용하여 과거 사회주의 미술 양식을 비난했다. 미술 방면에서 중국의 새로운 사회주의를 표현하는 방식은 이렇게 이뤄졌다. 원래의 사회주의 형식을 이용하거나 혹은 그것을 적극적인 공격의 무기로 사용한다. 인민들에게 익숙한 양식은 다시 종합적으로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조각이 주는 부드러운 곡선을 느껴볼 필요가 있다. 이 뚱뚱이는 훌륭한 곡선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 조각들은 주로 프로파간다 형식이었고, 내용은 철저하게 마오 개인의 영웅화와 인민들의 긍정적인 모습들이었다. 여기에는 힘참을 의미하는 직선적 미와 공동의 '사회'를 위한 이념과 산업적 쟁취, 그리고 희망찬 미래를 의미하는 건강한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뚱뚱해도 너무 뚱뚱한 이 조각은 무엇이 되었든 유용한 몸이라고 생각되어지지는 않는다. 부드러움이 저 조각의 거대함을 휘감고 있기 때문에 나체가 주는 선정적 표현이 감퇴되긴 한다. 하지만 이 조각에서 뭔가 역겨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가 될 것이다.

1976년생인 머우보옌은 사실 마오의 사회주의를 겪지 않았다. 그는 개혁 개방 이후인 포스트 사회주의 중국에서 자라났고 교육받았다. 그래서 그의 조각 양식은 지금 중국 현대 미술계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는 설치 예술(installation art)과 유사한 감각을 이룬다. 하지만 그는 어려운 개념적 사건에 가까운 설치 예술보다 자신의 작품을 쉽게 관객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조각을 선택했다.

그는 2006년부터 아예(Aye) 미술관에서 뚱뚱한 사람 <팻 맨(Fat man)> 시리즈를 시작했다. 사실 그는 '뚱뚱이'라는 아주 캐릭터성이 짙은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쉽게 주목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주제는 언제나 옳지 않은 것과 연계되어 왔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인쿤(Yin Kun, 尹坤)도 사회주의 지도자들을 그렇게 묘사했고, <붉은 기억(Red Memory)>으로 유명한 천원링(Chen Wenling, 陈文令)도 자본주의와 인간의 욕심을 '뚱뚱이는 돼지'라는 코드에 엮어 작업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품으로 [Weightlessness](2008년), [Valiant Struggle](2006년), [Happy Life](2008년)가 있다) 즉, 기존 작가들에게 '뚱뚱이'는 악으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머우보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는 뚱뚱이에게 측은지심을 싣는다. 그래서 숨찰 정도의 뚱뚱한 몸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그의 조각상을 보면 나도 힘들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비난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 자신을 바라보게 만든다.

▲ 2012년 상하이 비엔날레에서 전시된 <팻 맨(Fat man)> 시리즈. ⓒmeishujia.cn

<알고 있어요, 하지만(I know, However)>(2008년)이라는 머우보옌의 작품을 보면, 등짝에 부황을 뜨고 힘겹게 바닥을 향해 있는 작은 손을 합장하고 있는 몸이 있다. 또, <하늘(天空) No series No.1>(2011년)과 같은 작품에서 뚱뚱한 몸은 바닥을 거의 기어가다시피 버둥거리고 있다.

보기 힘들죠, 저도 힘들어요

다른 작품들에서도 이 뚱뚱이들은 힘겹게 벽에 매달려 있거나 혹은 간이 벽에 자신의 몸을 걸어놓고 있다. 특히 상하이 비엔날레에서 보여준 뚱뚱이들은 두 명이 한 쌍을 이루고 있는데, 밑에서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에 출현했던 그 뚱뚱이가 바닥을 첨벙거리고 있고, 위에서는 아래의 뚱뚱이가 첨벙거린 그 여파로 액체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다른 뚱뚱이가 있다. 이 서있는 뚱뚱이는 이 재난을 피해야 옳겠지만 그의 자세를 보건대, 피하기는커녕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인다. 이 뚱뚱이들은 사실 (피하고 싶을 테지만)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뚱뚱이들은 왜 이렇게 힘들게 첨벙거리고 기어오르면서 관객들에게 불편함을 자아낼까. 이러한 불편한 감각을 자아내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주의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던 감각이다. 그래서 우스꽝스러움과 안쓰러움 그리고 역겨움 등이 이 작품을 휘감게 된다.

아마도 작품 속 뚱뚱이들은 더 미묘한 감정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그리고 자신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겪어야 할 모든 수모를 다 감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벌거벗은 채로 말이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은 그들이 비난했던 공자의 부활을 꿈꾸며 유가(儒家)의 나라임을 천명하고 있다. 하지만 머우보옌의 뚱뚱이 캐릭터들은 그런 국가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실제 중국인민들의 염원과 현주소를 반영한다. <大道之行(큰 도에 이르는 길)>(2013년 카셀 전시회의 타이틀)으로 나아가기 위해 중국 인민들이 안간힘을 쓰는 모습 속에는 공자가 추구했던 예의나 염치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벌거벗은 채로 사다리를 오르는 적극성이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저 몸으로는 힘들지 않겠는가. 쓸데없는 살들은 내려놓아야 한다. 저 살들은 사회주의 이후 '또 다른' 사회주의를 형성해 가고 있는 중국에 낀 기름기들이다. 그것은 제거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사다리를 오르고 있는 거니. 머우보옌은 유쾌하게 지적한다. 그 웃음이 유발하는 동정심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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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매체에 중국 현대 미술과 현대 미술 작가들에 관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초기 경극 형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희곡예술연구원에 방문학자로 있으면서 한국 전통극 배비장전을 경극으로 기획하고 연출했다. 2003년 코넬 대학교 동아시아 프로그램 방문 연구를 계기로 중국 영화 비평을 시작하여, 전주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패널로 활동했다. 저서로 <현대 중국의 새로운 이미지 언어 : 미술과 영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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