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의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 전략) 회군을 두고 설왕설래 하고 있다. 더민주는 "총선에서 경제 실정을 부각시켜야 하는데, 테러 방지법과 같은 안보 이슈는 선거에 불리하다"는 설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나오는 "테러 방지법 저지의 성과도 없이 물러선다는 것은 필리버스터로 띄운 열기에 찬물을 뿌리는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더민주를 둘러싼 객관적 상황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3.1절 회군'을 결정한 배경에는 과연 어떤 상황들이 있었을까.
첫째, 더민주에 우호적이지 않은 여론조사 결과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지난달 22일부터 26일까지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252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1.9%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새누리당 지지율은 전주 지지율 대비 1.8% 포인트 오른 43.5%를 찍었다. 2주 연속 상승한 것이고, 지난해 9월 2주차(45.6%) 이후 가장 높은 지지율이었다. 박근혜 대통령도 2주 연속 올라 46.1%를 기록했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은 26.7%로 변화가 없었다.
야당의 테러방지법 관련 필리버스터는 지난달 23일 시작해, 현재까지 약 180시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오히려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오르고 야당의 지지율은 답보상태에 그치고 있는 셈이다. 야당 지도부 입장에서 경각심이 들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기세를 몰아 '야당 심판론'을 제기했다. 지난 2004년 탄핵 정국에서 보수 정당의 대표에 오른 이후 박 대통령은 12년간 '심판론'으로 일관,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집권 후에도 여전히 '심판론'을 활용하고 있다. 이 전략은 선거 때마다 꽤 효과를 봤다. 실정의 모든 책임을 야당에 돌리고 있는 상황인데, 문제는 이 논리가 새누리당 지지층은 물론, 중도에까지 먹히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상황이 이러니 새누리당은 요지부동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테러 방지법에 결코 양보가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교시'를 받은 친박계가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균열이 생긴 계기는 김무성 대표가 만들었다. 김 대표는 김종인 대표와 담판을 통해 선거법 처리에 전격 합의했고, 청와대와 친박계의 '선 대통령 관심 법안 처리'에 반기를 들었다. 야당은 곧바로 필리버스터를 시작했다.
당 내에서 상향식 공천제를 두고 궁지에 몰려 있던 김 대표가, 친박계의 전략 공천 요구를 차단하고자 선거법 논의의 물꼬를 틀었던 것으로 해석됐다. 김 대표에게 법안 협상의 재량권이 생긴 상황에서 야당은 테러방지법 수정 시도를 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살생부 파동'에 휘말렸고, 결국 친박계의 공세에 무릎을 꿇었다. 원유철, 조원진 등 원내 대표단에 강성 친박이 포진하고 있는 상황도 김 대표가 재량권을 발휘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다. 김 대표의 반란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새누리당은 느긋해졌다. 3월 10일 이후에 테러방지법을 처리해도 된다는 태도로 야당의 두차례 협상 요구를 묵살했다. 심지어 같은 당 출신 정의화 국회의장의 중재안마저도 걷어찼다.
이에 따라 필리버스터로 여당을 압박, 테러 방지법의 수정을 이끌어 낸다는 전략이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졌다. 물론 그 뒷배에는 청와대와 강성 친박들이 있었다. 열흘 후에 수정 없는 테러 방지법 처리를 방치하느냐, 전략적 판단을 통해 미리 회군을 감행하느냐 하는 두 가지 판단만 남았던 셈이다. 더민주는 후자를 선택했다.
셋째, 김종인 영입의 근본 목적에서 어긋나는 상황이 계속해 발생하고 있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더민주가 김종인 비대위를 띄운 이유는 경제 실정에 대한 심판론을 총선에서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테러방지법 정국이 길어질 수록 새누리당은 '테러를 방치하는 야당'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는 쪽으로 전략을 짜게 된다. 북한 핵실험 정국을 틈타 안보 이슈를 극대화시켜 정치적 이익을 보려는 새누리당의 의도에 말려들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언론 환경은 야당에 극도로 불리하다. 종편은 연일 필리버스터를 깎아내리고, 북한발(發) 위기론을 띄우고 있다. 대통령의 '야당 심판론'을 확대 재생산하고, 경제 위기의 원인을 '발목 잡는 국회'로 돌리고 있다.
역대 최악의 환경에서 야당은 총선을 치러야 한다. 더민주는 "선거에서 승리해 테러 방지법을 다시 개정하겠다"고 사실상 공약을 내놓았다. 더민주의 전략적 판단에 대한 평가는 유권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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