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에잇, 전두환보다도 못한…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에잇, 전두환보다도 못한…

[주간 프레시안 뷰] 박근혜의 거대한 착각과 치명적 유혹

'도발'이란 말의 뜻은 '남을 집적거려 일이 일어나게 함'입니다. 남한에 대한 북한의 최대 도발은 6.25전쟁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큰 도발은 아마도 아웅산 테러가 아닐까 합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해 자행한 폭탄 테러 사건입니다. 당시 서남아·대양주 6개국 공식 순방의 첫 방문국인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의 폭탄 테러로 대통령은 무사했지만,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했습니다. 사망자 중에는 김재익 경제수석, 함병춘 비서실장,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등 장관급 관료가 6명이나 포함됐습니다. 이념과 노선을 떠나 뛰어난 국가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던 분들입니다.

전두환은 왜 아웅산 테러에 보복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처럼 엄청난 북의 도발에 대해 전두환 대통령은 강력한 보복이나 가혹한 응징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984년 9월 북한의 수해물자 지원 물품을 받아들였고, 1985년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 및 예술공연단 교환' 행사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1968년 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김신조 등 북한 특공대 31명이 청와대 인근까지 진출했던 이른바 '1.21사태'에 대한 보복으로 남한 특수병력을 북한에 침투시켜 파괴공작을 벌였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인 대응이었습니다.

정권 장악을 위해 두 차례 쿠데타(1979년 12월 12일, 1980년 5월 17일)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광주 시민 수백 명을 잔인하게 살해해 '살인마'라는 악명까지 들었던 전두환의 이처럼 '통 큰' 대응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였습니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전의 두 올림픽이 반쪽으로 치러진 이후(1979년 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여파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소련 등 동구권 국가들만 참가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는 미국 등 서방권만 참가) 첫 올림픽이라는 점에서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는 한반도 정세 관리가 매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한반도 평화가 유지돼야 많은 국가들이 참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권력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1981년 총력을 기울여 올림픽 유치를 따냈고, 이후 '서울 올림픽 성공'에 정권의 사활을 걸 정도였습니다. 이 때문에 전두환은 자신의 목숨을 노린 북한의 테러에도 '통 큰' 대응을 했던 것입니다.

▲ 테러 사건 당시 버마 아웅산 국립묘지 헌화 행사에 도열한 수행원들. 색이 바랜 이 한 장의 사진은 당시 연합통신 최금영 기자(중상으로 입원)가 폭발 참사 수초 전에 찍은 것이다. ⓒ연합뉴스


특히 1984년 북한의 수해물자 지원을 받아들인 전두환의 결정은 남한의 아량을 과시하는 동시에 북한 경제에 치명적 타격을 입힌 '신의 한 수'였습니다. 1984년 여름 하루 300mm 이상의 폭우가 내리는 등 남북한 모두가 커다란 홍수 피해를 입었습니다. 당시 남북한 정부는 경쟁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수해물자 지원을 제안했습니다. 8월 20일 남의 지원 제의를 북이 거절했고, 9월 8일에는 오히려 북이 남에 대한 지원을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은 김정일의 주도로 이루어졌는데, 자신들이 거부한 만큼 남도 거부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저 제스처로 해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9월 14일 남이 이 제안을 덜컥 받아버렸습니다.

지원 물품은 자그마치 쌀 5만 석, 시멘트 10만 톤, 직물 50만 미터였습니다. 남의 예상치 못한 수락에 북은 당황했습니다. 이미 경제가 기울어가는 마당에 이처럼 방대한 지원 물자를 마련하고 수송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안기부 요원으로 지원 물자 수령에 참여했던 김은성 전 국가정보원 차장에 따르면 "당황한 김정일은 전 행정기관과 지방 관서에 '수재물자 인도, 인수는 북한 보위부와 남조선 안기부와의 전쟁이다. 이유 여하를 불문코 최단시간 내에 물품을 징발하라'고 전통을 내리고 공문을 보내는 등 난리를 쳤다"고 합니다. 한 북한 전문가는 이때 수해 물자 지원을 위해 북한은 그야말로 '죽을 똥을 쌌고' 이후 경제는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고 합니다. 북 수해 물자 수령으로 남은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은' 셈입니다.

(☞바로 가기 : 1984년 北의 '水災(수재)물자 지원' 秘話)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르지만, 또한 1980년대 당시에는 올림픽 개최의 저의에 대한 국내 비판도 적지 않았지만 88 서울 올림픽 개최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1994년 제가 미국에 6주 간 머물렀을 때, '한국은 고유의 문자를 갖고 있느냐'라고 물은 사람도 있었고 '코리아'를 모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서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바로 올림픽 때문이었습니다.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라는 전략 목표를 위해 대북 보복을 포기한 전두환의 대승적 결단이 가져온 성과입니다.

박근혜의 전략 목표는 무엇인가?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직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대외 정책의 3대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햇볕정책 0.8' 정도는 된다고 긍정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만 3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 정세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남의 대통령은 '북한 붕괴'를 공개적으로 천명했고, 이에 대해 북은 '선전포고'라고 맞받아쳤으며, 중국의 전문가는 사드 남한 배치는 '3차 대전'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지경입니다. '남과 북은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로 공존함'을 선언했던 1991년 남북기본합의 이전, 아니 1972년 7.4공동성명 이전 시대로 돌아갔다는 개탄이 나오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현재의 안보 위기가 북한의 도발 때문이라고 강변하지만 이에 동의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습니다. 남이 불러온 것입니다. 현재의 안보 위기를 도발한 것은 북이 아니라 남, 그리고 미국입니다. 1차적으로는 지난 1,2월 북한의 4차 핵실험 및 장거리 로켓 발사에 대한 개성공단 폐쇄, 그리고 사드 배치 협의가 그것입니다. 미국도 한몫을 했습니다. 1994년 체결 이후 8년간 북의 핵개발을 동결시켰던 제네바합의를 파기한 것은 미국입니다. 미국은 2002년 9월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으로 북일 화해가 가시화되자 그해 10월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를 평양에 파견, 북한의 '우라늄 농축 의혹'을 빌미로 제네바 합의를 파탄 냈습니다. 이로써 8년간의 북핵 동결은 끝장났고 결국 북한은 핵 및 미사일 능력 증강에 일로 매진했습니다. 이 때문에 2006년 10월 북한이 1차 핵실험을 단행했을 때, 전문가들은 북의 핵폭탄을 '부시의 핵폭탄'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부시의 대북 강경정책의 산물이란 뜻입니다.

2005년 9월 19일 북핵 폐기 및 북미 평화협정을 규정한 9.19합의가 성사되자 바로 다음 날 북한의 위조 달러 의혹을 근거로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에 대한 금융제재에 착수함으로써 이 또한 휴지조각으로 만들었습니다. 2006년 북의 1차 핵실험 이후 부시 행정부는 부랴사랴 북한과 핵합의를 이뤘지만 이 또한 핵 폐기 검증 문제 때문에 무산됐습니다. 그리고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비핵 개방 3000'이라는 선비핵화 정책을 고집하면서 북핵 해결의 길은 막혀 왔습니다. 2002년 제네바합의 파탄 이후 북핵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을 별개의 문제로 접근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뒤집은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북한 역시 북핵 문제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책임의 대부분은 남과 미국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는 현재의 안보 위기가 오로지 북한의 도발 때문이라며 북한에 대한 '끝장 제재'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최대 교역국 중국과의 대결 자세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23일로 예정됐던 주한미군 사드 배치 공동실무단 규약 체결이 돌연 연기되는 등 한국은 이제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같은 날 워싱턴에서 열린 미중 외무장관 회담에서 대북 제재와 동시에 비핵화 및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대화를 시작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입니다. 회담 후 케리 국무 장관은 "(대북) 제재의 목적은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입장이 바뀐 것이죠. '끝장 제재'로 북한 체제를 변화시키겠다는 박근혜 정부와의 목표와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중국과 일본 간에 경제공동체 건설을 위한 물밑 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박근혜 정부가 오로지 북한 붕괴에 일로매진 하는 동안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정세 관리를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경제 국익을 위한 물밑 협상을 벌이고 있습니다. 남한 주도의 남북 대치가 극단화되는 가운데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 강대국들은 우리의 머리 위에서, 등 뒤에서 냉철하게 국익 계산을 하며 고도의 전략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한반도 정세와 관련한 박근혜 정부의 전략 목표는 무엇일까요? 남북의 화해와 협력, 대화와 교류에 의한 공존과 평화 통일인가, 아니면 북한 붕괴에 의한 흡수 통일인가.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습니다. 전자가 목표라면 도저히 현재와 같은 행태가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13년 말, '2015년에는 한반도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될 것'이라는 당시 남재준 국정원장의 발언, 2014년 벽두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 등은 모두 후자를 가리킵니다.

'한국과 미국은 일체'라는 환상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거대한 착각과 치명적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미국의 힘을 빌려 중국을 대북 끝장 제재에 동참시킬 수 있다는 거대한 착각, 북한 붕괴에 의한 한반도 통일이 가능하다는 치명적 유혹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주 '프레시안 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이 언제나 남한 편일 수는 없습니다. 6.25전쟁 후 20여년만의 대중 전격 화해가 대표적 사례입니다. 1972년 박정희가 김일성과 7.4공동성명에 전격 합의한 것은 미중 화해에 대한 위기대응책이었습니다. 미국은 최근 북한과 진행한 평화협정 논의도 한국과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북한 붕괴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통일 대박은커녕 '전쟁 쪽박', 또는 대규모 난민 유입에 따른 '난민 대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현 정부의 외교안보 관료 중 현재의 안보 위기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거나 실제 상황을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외교안보 관료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개성공단 수입금이 북한 핵무기 개발에 전용됐다고 주장했다가 국회에서 그 증거가 없다고 실토했습니다. 그의 실토는 다음 날(16일) 대통령에 의해 묵살됐음에도 그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상황이 그 지경까지 갔다면 장관직을 사퇴해야 마땅합니다. 현 정부 임기 초 노인연금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사표를 던진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처럼 말입니다. 현 정부에는 대통령 말씀을 받아 적기에만 바쁘고(적자 생존), 어떤 말씀이든 지당하시다는 예스맨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니 엄중한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당시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경제 문제를 전적으로 일임했습니다. 꼭 김재익 수석 덕분은 아니었겠지만(저환율, 저금리, 저유가에 의한 3저 호황이었죠) 어쨌든 5공 시절, 경제만은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 후반기부터 국민들 사이에 '살기는 전두환 때가 좋았다'는 말이 널리 퍼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 남북관계, 외교 등을 만기친람하면서 나라를 전례 없는 위기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관료들의 자율성은 일체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무조건 복종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위기의식은커녕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집권 3주년을 맞아 청와대가 내놓은 성명은 자화자찬 일색입니다.

1970년대 이후 40년 가까이 일등 방송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왔던 문화방송(MBC)은 2010년 3월 김재철 사장 부임 이후 딱 3년만에서 꼴찌 방송으로 완전히 전락했습니다. 비판적이고 양심적인 기자, PD들 대부분이 쫓겨났고, 시청율은 케이블방송보다도 못하다고 합니다.

25일로 집권 3주년을 박근혜의 대한민국호가 꼭 그 꼴입니다. 경제도, 남북관계도, 대외관계도 절망적 상황입니다. 침몰 직전입니다. 그런데도 현재의 위기 상황을 직시하거나 직언하는 관료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에잇, 전두환보다도 못한, 미친 정권'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