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게으름과 소위 '귀차니즘'으로 블로그나 홈 페이지 운영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지만, 더 이상 SNS와 무관하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페이스 북을 몇 년 전부터 시작했다. 페이스북의 기능에 대해 전혀 몰랐던 처음에는 일상생활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들 즉, 음식이나 여행 사진, 혹은 가족들이나 지인들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나 올리려고 생각했다. 특히 학생들과의 소통을 위해서도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해 자주 로그인하곤 했었다. 그런데 점차 기능을 알아가다 보니 좋은 기사들을 공유하거나 저명한(?) 인사들과 친구를 맺어 그들의 글들을 공유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람들의 훌륭한 글들은 담아 오곤 했지만, '귀차니즘'으로 인해 막상 내 생각이 담긴 글들은 좀처럼 쓰기 어려웠다.
문제는 이런 과정 속에서 한국 사회의 퇴행과 세계 정세의 불안정으로 인해 점점 내용이 과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온 라인 공간에서나마 평화롭고 여유로운 삶을 누리고 싶었건만, 끝도 없이 퇴보하는 우리 사회의 끔찍한 현실 속에서 온 라인 공간에서라도 한가로운 삶을 즐기는 것이 불가능해져 갔다. 부끄럽게도 여러 이유로 좀처럼 행동으로 옮기지 못 하는 상황 속에서 기사나 타인의 의견 공유, 코멘트 다는 일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심각해져만 가는 기득권 세력들의 횡포와 폭거,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 전반적인 퇴행 현상을 보면서 코멘트들은 점점 과격해져만 갔다.
그런데 필자는 사실 과격한 주장을 한 적이 없다. 그저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권력과 불로소득으로 막대한 부를 부당하게 챙기고 있는 소수의 집단들로부터 그것을 되찾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행사하고 나눠 가져야 한다는 것 정도를 주장한다. 기껏해야 서유럽이나 북유럽 수준의 복지 국가로 나아가야 하고, 이들 국가에서도 문제가 있을 경우 그 보다 더 나은 대안을 주장하는 세력들의 주장을 살펴보자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런 논의를 한가하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총체적 퇴행, 그리고 그것을 기회로 삼거나 조장함으로써 자신들의 탐욕과 특권을 노골적으로 강화하고 복지국가로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는 기득권 세력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격에 제대로 맞서지 못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아직 우리 시민사회운동이나 진보정당 운동 세력들이 정치적 선명성만 여전히 강조하면서 서로 '~주의자'로 낙인찍어가며 적대시하고 있는 낡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사고에 기반해 '모 아니면 도' 식의 낡은 분석의 틀을 버리지 못 해 현실 분석은 물론 대안적 사고를 만들어 낼 수 없을 정도로 입체적이고 종합적 사고를 하지 못 하는 데에서도 기인한다.
가장 저변에 있는 걸림돌은 바로 여전한 사회주의에 대한 강박관념이다. 옛 현실사회주의체제가 모종의 자본주의 체제였다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고 별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논외로 치더라도, 여전히 옛 현실사회주의체제에 대해서 진지한 반성적 평가 없이 사회주의를 계속 주장하는 것은 역사와 민중 앞에 무책임한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부류가 아닌 사람들조차 과거의 틀 속에 매이다 보니 중간적 대안들에 대해서는 시장체제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이룰 수 없는지의 여부로 비판을 하는 관행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데에 있다. 스스로 유물론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전형적인 관념론자에 불과하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스스로 이러한 근본적 체제변혁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있다고 자임는 이들조차 여전히 국가, 민족, 제국주의, 젠더, 노동 등에 대한 어설픈 이해 혹은 종합적 분석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운 주장을 하고 있으며, 서로 의미 없는 대립과 갈등에 휩싸여 있는 경우가 잦다. 가령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반)주변부들에서 일어나는 저항들에는 진보적인 측면과 반동적인 측면이 뒤섞여 있다는 것에 대해 무지한 이들은 어느 한쪽 면만을 보고 한 쪽으로 경도된 주장을 한다. 발전의 정도에 따라 저항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심지어는 종교적 근본주의나 특정 권력 집단, 외세에 대한 의존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어느 한 면만을 보고 판단한다.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의 저항 운동에서 민족주의적 요소와 보편 인권적 요소, 심지어는 봉건적 가부장제 등을 뚜렷하게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종종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면서 쉽사리 규정짓고 비판한다.
한국 사회에서 범죄의 영역이거나 여성, 그 중에서도 매우 특수한 여성만의 문제인 양 여겨져 철저하게 사회적 논의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는 문제인 성매매와 성산업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편협한 분석의 전형을 보여준다. 성매매 산업을 찬양하는 남성성욕중심주의적 주장은 차치하더라도 여성주의자들 중에도 소위 '성노동자론자'들은 '다양한 경험'을 가진 다양한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중요하다며 따라서 성매매 여성들을 '성매매 피해자'로 정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중간 알선 및 착취 매개 집단에 대한 무지에 따른 관념적 주장으로서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불평등하고 착취적인 성매매와 성산업 구조의 전체적인 본질이 은폐되고 만다. 그러한 주장은 여성을 착취하는 범죄집단과 노동 협약을 맺을 수 있다는 가상 현실로 이어진다.
국가, 민족, 제국주의, 젠더에 대한 어설픈 이해에서 비롯된 문제의 절정은 최근 제국의 위안부 논쟁에서도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비판을 할 수 있지만, 위의 문제의식에서만으로 국한해서 보자면, '피해자론'에 반대하는 '다양한 경험'론에 대한 과도한 의존, 현실에서는 분리하기 불가능한 식민지 민족주의에 대한 과도한 일면화에 의거한 비판,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차이를 넘는 남성이나 계급에 대한 과도한 강조 등으로 인해 충분히 가치 있는 문제제기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본말이 뒤바뀌는 심각한 오류를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제국의 병사들의 대부분이 노동자, 농민 등 하층 계급, 피지배 계급 출신이기 때문에 '제복 입은 노동자'임은 틀림없지만,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들이 제국주의 침략군대의 일원이라는 본질이 가려져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저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민족주의나 한국 남성에 대한 비판에는 매우 날카로운 반면 여성들을 감금하고 만행을 저지른 일본 제국주의 '남성' '군인'에 대해서는 다양성이나 계급성을 들먹이며 매우 관대하다.
'노동'이나 '(하층)계급'이라는 단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과감한 비판이나 대안적 논의 자체가 정체되는 상황 역시 종합적인 사고와 건설적인 논의를 가로막는 한 원인이기도 하다. 이에 관해서는 매우 진지한 토론이 필요하지만, 오해를 무릅쓰고 간략하게나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이나 계급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야 논쟁에서 무조건적으로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고 다른 편에서는 좀처럼 근본적인 문제제기나 이견을 내기가 어렵다. 결국 극소수의 같은 진영 내에서는 승리할지 몰라도 대다수의 노동대중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 한 채 언제나 국가와 자본에 의해 파상공격을 당하곤 한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나 '노동정치의 실종', '노동정당과 노동조합에 기반한 복지 국가' 등등 그 자체로서는 너무나 정당한 문제제기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이라는 단어 앞에 모든 생산적인 비판적 논의의 칼날들은 무뎌지고, 중간적인 대안들은 부정적인 것이 되고 만다. 예전에 한 진보적 교수가 경상도 지역 공장에서의 대규모 파업 출정식에서 박근혜 정권을 비판하자 일부 노동자들이 분노하며 항의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한 글을 기고한 적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빈민에게 권력을 주는 실험으로 이상화된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범죄가 창궐하는 위험한 지역이 바로 빈민가라는 역설에서 보이듯, 상황은 이상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국가나 자본의 문제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종합적인 사고의 부족으로 우리는 정당정치라는 게임에 매몰되어 정당 정치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특권 집단, 기득권 카르텔의 은밀하지만 매우 강고한 지배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국가와 자본의 지배에 대한 논의들은 많았지만, 또 다른 지배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지금도 너무나 무관심하다. 즉 관료 지배는 물론, 정계나 관계에 직위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종교, 언론, 사학 등등 한국 사회의 모든 단위에서 또아리를 틀고 정권 교체와는 상관없이 실질적인 지배를 이어오는 다양한 특권 지배 구조가 우리를 옥죄고 있지만, 우리는 오직 수구 정당의 문제로만 해석하려 한다. 코빈과 샌더스의 실험의 성공 가능성은 집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기득권 세력을 제어하는 데에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서구에서 유행하는 틀에 따른 사회 계급과 계층, 집단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큰 편이지만,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또 다른 집단들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관심한데 그 근본 원인 역시 종합적으로 보지 못 하는 데에 있다. 가령,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높지만, 노동 인구의 30% 정도를 차지하는 자영업자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다.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높지만 더 오래된 심각한 착취의 현장인 성매매 여성 문제에 대해서도 극소수 여성들의 문제로 치부하고 만다. 조폭 등 범죄 집단에 대해서는 단순히 격멸해야 할 범죄학의 영역으로만 생각할 뿐, 한 사회 내에서 추락하고 주변화되는 집단들의 문제로 보지 못한다.
물론 현재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정치 논쟁이 아니라, 노동, 언론, 환경, 여성, 인권, 복지, 이주 등등 수많은 영역에서 전문화된 운동들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구 정당을 앞세운 사회 기득권 세력들의 파상적인 공격 앞에서 그 때 그 때 터지는 이슈 하나하나에 반대하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에 놓여있지만, 사회와 정치의 모든 현상들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기반으로 매우 구체적인 종합적 사회 변혁의 대안들을 공동으로 마련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겠지만, 그 이 전에 우리 머리 속 어딘가에 깊이 박혀져 있는 '모 아니면 도' 식의 낡은 사고의 틀, 그리고 그 틀의 기반인 어설픈 옛 학습 내용들을 과감하게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많은 지인들은 그래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고 학생들도 보고 있으니 과격한 내용들이나 표현들을 자제하고 품위를 지키라는 조언들을 해 주기도 했다. 고매한 인격을 갖추지도 못 했는데 그런 품격 있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자기검열을 해야 하는 회의도 들긴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공간들은 사적인 공간이면서도 공적인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처신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앞으로도 소위 '품위에 맞지 않는 표현들'은 자제할 수 있겠지만, 품위에 맞지 않는 내용들은 자제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자살, 빈곤, 불평등, 차별, 고용, 임금, 노동시간, 재해, 범죄, 부채, 인권, 복지 등등 거의 모든 지표들이 최악으로 후퇴하고 있는 현재,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권리 등이 기득권 집단들에 의해 노골적으로 공공연하게 파괴되는 현실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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