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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박근혜, '정치가' 아니라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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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진실의 박근혜, '정치가' 아니라 '종교인'?

[민교협의 정치시평] 우주의 기운, 박근혜 분석하기

반가웠다. 기껏해야 투표용지에 동그라미 하나 얌전히 찍는 걸로 공화국민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대통령께서는 정확한 판단 기준을 제시해 주셨다. 말끝마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하면서 이 세상 모든 일을 다 섭렵한 전임 대통령도 있었다. '너 그 일 해봤어? 난 해봤거든. 안 해 봤으면 말도 마.'라는 경험제일주의는 듣는 사람의 기를 꺾고 무력감을 주었다. 이에 비해 현 대통령의 발언은 격조와 깊이를 갖췄고 아름다움마저 풍긴다. 드디어 한국정치는 국민의 심리까지 파고들어 잠언과도 같은 절대지침을 제시해 줄 정도로 고도화되었다. 더구나 그 발언은 우리에게 정신상태의 근본적 개조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인류사적 의의마저 확보했다.

먼저 기억해 두자. 국무회의 자리에서 "국민을 위해서 진실한 사람들만이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한 대통령의 발언을 갖고 그저 자신과 배짱 맞는 사람들을 뽑아달라고 한다는 식으로 비난하면 안 된다. 그런 욕을 먹을 정도로 우리 대통령은 협량하지 않다. 자신과의 친소관계나 충성심을 기준으로 우리의 투표행위에 영향을 미치려고 할 정도로 편파적이지 않다. 그럴 마음이었다면, '무슨 장관을 한 아무개, 무슨 비서관을 지낸 아무개, 어디 구청장을 역임한 아무개를 찍으라'고 정확히 말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진실'이라는, 말인 듯 말 아닌 듯한 화두를 던진 것은 '생각하는 국민'을 만들기 위한 대통령의 국민교육적 발언이다.

그 말에 용기를 얻었나 보다. 벌써부터 도처에 나부끼는 '진실한 사람 000' 식의 현수막은 대통령의 깊은 뜻을 오독한 사람들의 경박하고 사특한 짓일 뿐이다. 보수권력의 발원지인 어느 도시의 발전과 권력의 성공을 위해 나선 진실한 사람들이 식당에 모여 인증샷을 찍었음에도 지지도가 바닥을 헤매는 것을 봐도, 우리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가 일국의 계몽주의적 대통령인 한, 우리는 그가 보여주려고 하는 지평의 언저리에라도 가닿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여 새벽 찬바람, 고요 속에서 우주의 기운을 느끼며 '진실'의 정치를 말하는 대통령은 어떤 분인지를 가늠해 본다.

진실의 정치를 하는 대통령은 어떤 사람인가.

▲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


첫째, 대통령은 정치가라기보다는 종교인이다. 정치가 논리를 뛰어넘는 '믿음/관념'의 영역이라는 것을 동물적 감각으로 간파한 분이다. 진실하다는 말이 진실함의 유일한 증거가 되는 외통수 순환논법이다. 대통령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진실'이라는 심성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육화(肉化)시켜 우리 눈앞에 만질 수 있게 해주었다. 육화된 진실이 다시 정치로 세속화되었다.

둘째, 대통령은 정치가라기보다는 언어전략가다. '진실한 사람을 뽑으라'는 말은 반대항을 쉽게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늘 참이다. 누가 감히 허위와 거짓을 일삼는 사람을 뽑자고 하겠나. 반대항에 자신이 놓이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게 좀 더 정확하다. 그럼에도 자칭 '진실한 사람들'이 진실의 반대말로 '거짓'이나 '허위'가 아닌 '배신'을 거론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진실과 거짓의 대립이 사건 자체의 진위에 주목하는 반면, 진실과 배신의 대립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사람이 배신을 하지 사건이 배신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또한 그는 사실(fact)와 가치(value)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언어학적 통찰을 잘 이해하고 있다. 예컨대, 내가 누군가에게 머리를 한 대 맞았다면 사실과 가치가 곧바로 연결된다.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든 잘못을 저지른 것이며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가 나를 때렸다'라는 말은 '그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는 말로 쉽게 넘어간다. '때리는 것은 나쁜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진실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그런 사람만을 뽑아야 한다는 가치를 양립시켰다.

셋째, 대통령은 정치가라기보다는 예술가다. 뭔가를 창조하는 일은 사물을 보는 시선의 독특함에서 온다. 모종의 인식상의 도약, 모든 것을 간파하게 된 독특한 관점의 발견이야말로 예술가의 덕목이다. 한평생 사과만 그렸다는 어느 미술가처럼 그도 뭔가 하나에 집중하고 있다. 미천한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뭔가 하나에 집중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자기 손에 망치밖에 없다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예술가로서의 성장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현실에 완전히 구현하는 것이다. '진실한 사람'이라는 말은 예술가로서 대통령이 이 세계에 대한 자기만의 예술가적 해석이다. 이런 독특성이나 집착은 진실한 2인자인 국무총리가 국가공무원의 공직 가치에 민주성, 다양성, 공익성을 지우고, '애국심'을 밀어넣는 것으로도 에둘러 표현된다. 대통령은 예술가 중에서도 시인에 가깝다. 대통령은 표어의 정치에 능하다. 그의 말은 일본의 '하이쿠'처럼 절제와 함축미가 넘친다.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과 같은….

넷째, 대통령은 정치가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선동가다. 파시즘을 분석한 연구자들은 파시스트들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 모호성과 불안정함을 속이기 위해 시각적 선동(프로파간다)을 창안했다고 한다. 공간의 재배치, 군중 동원, 반복적인 구호, 독특한 경례와 걸음걸이, 끝없는 선전물 등은 지배권력의 의지를 시각화함으로써 대중의 동의를 끌어낸다. '민생살리기 입법'을 위해 친히 거리에 나선 대통령의 서명 행위는 진실을 향한 자신의 간절함과 절박함을 시각화함으로써 그의 구체적 행위와 정신을 연결시킨다. 대통령은 시시때때로 자신의 간절함을 대중에게 진실되게 선동함으로써 시각적으로 특권화되어 우리의 판단에 깊이 관여한다.

거칠게 말해 진실도 공적 진실과 사적 진실이 있다. 사적 진실은 내면의 진실이자 개인의 진실이다. 개인의 진실은 겸손을 동반한다.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진실하게 살아왔다.'고 칭찬하거나 '진실되게 살아라'고 권면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자신에게 '나는 진실하게 살아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실하지 않다. 그저 '진실하게 살려고 애썼다.' 정도면 된다. 선한 행동을 하면서 내심으로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면 스스로 진실/정직함을 어긴 것이다. 사적 진실은 행동과 의도가 일치될 때 가능하다.

반면에 공적 진실은 겉과 속을 구분할 수 없다. 정부가 행하는 권력행사와 구분되는 국가적 의도란 게 있을까? 있다고 해도 그걸 가정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인양하라고 했을 때, 그건 공적 진실에 대한 요구다. 정부가 그때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이지 그때 선의를 가졌는지 악의를 가졌는지를 문제삼지 않는다. 공적 진실을 다툴 때는 국가나 자본의 의도는 관심사가 아닐뿐더러 접근할 수도, 알 수도 없다. 슬프게도 대통령은 사적 진실을 공적 진실의 영역에 끌어들였다.

여전히 '진실'은 보여줄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진실'은 종교, 형이상학, 윤리학의 영역이라 말할 수 없는 영역이다. 참/거짓을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이를 말해버렸다. 아쉽게도 그는 우리와 공감하지 못하는 거 같다. 권력 스스로 사람들에게 안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살이 없는(fleshless) 존재이기 때문이다(테리 이글턴). 살 없는 존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대통령의 진실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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