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남북 관계와 한반도 주변 정세가 몇 달 만에 다시 긴장국면으로 접어들면서 한미 양국의 대북 압박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지난 6일 북한의 핵실험 직후, 우리 군의 확성기 방송 재개를 시작으로 미국은 핵능력을 갖춘 B-52 전략폭격기를 한국 상공에 전개하였으며 한미연례군사훈련의 실시는 물론, 북한을 왕따 시킨 '5자 회담'이라는 창의적(?) 제안까지 나왔다. 정부의 북핵 대응의 키워드는 한마디로 '압박'이다.
북한의 핵실험에 대하여 국내외의 비난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반복돼 온 패턴이다. 우리 정부와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이 이러한 북한의 핵 프레임에 계속 말려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감정적 비난에 앞서 북한의 이러한 패턴과 알고리즘을 면밀히 분석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왜 김정은은 국제적 비난과 제재를 감수하면서 핵실험을 강행했을까?
첫째는 체제 공고화이다. 핵은 김정은이 아버지인 김정일로부터 상속받은 매우 강력한 유산이다. 핵을 통해 대내적으로 권력 기반을 강화할 수 있으며, 대외적으로 한미 양국의 압박을 견뎌낼 수 있고, 중국과의 협상에도 중요한 기반이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북한은 체제 붕괴에 대한 공포가 크다. 만일 핵이 없었다면 강냉이죽으로 연명했던 시절 미국과 교섭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둘째는 재래식 군사력 격차이다. 2013년 통계로 우리는 339억 달러를 국방비로 지출하여 북한의 5~10배 수준이며, 2014년 한 해에만 78억 달러가 넘는 무기를 수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이러한 군사력의 양적 격차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북한이 핵무기라는 비대칭 전력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북한이 이미 국제 사회의 제재에 적응이 돼 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그간 미국과 유엔 안보리에서 다양한 형태의 경제 제재를 시도했었기 때문에 북한은 어느 정도 제재는 예측하고 견디는 훈련이 돼 있다. 군사적 제재는 미국이 클링턴 정부 때 고려해본 적도 있으나 주변 여건 상 불가능하다.
결국 향후의 대북 비핵화 전략은 북한의 핵실험에 B-52 폭격기 출격으로 맞서는 강공책과는 다른 차원에서 진행돼야 한다. 북한의 비핵화는 한반도 평화 정착의 중요한 기반이자 시발점이다. 북한은 그간 '자신에 대한 미국의 핵공격 위협이 사라져야 핵개발을 포기할 것'이라고 천명해왔다. 이러한 북한의 핵무기 개발 명분을 원천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련 당사국 간 상호 신뢰를 제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 전환, 북미 관계 정상화와 함께 주변국과 외교적 공조의 방법과 목표를 수정해야 한다. 그간의 6자 회담은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면 경제적 보상을 해주겠다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핵이 주는 유혹이 경제적 보상보다 더 큰 북한에게는 이런 인센티브가 작동을 하지 않는다. 이젠 중국을 통한 압박도 듣지 않고 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한반도 및 주변 지역의 '비핵지대(동북아비핵지대)화' 창설이라는 공동의 지향점을 제시해야한다. 비핵지대(비핵무기지대: NWFZ)화란, 특정 지역 내에서 핵무기의 개발, 실험, 제조, 생산, 취득, 소유, 저장, 수송, 배치, 반입 등을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지구상에 4개의 비핵지대가 존재하는데 이들 모두 해당 지역 당사국들이 조약을 체결하고 상호간 이행 검증을 통해 비교적 성공적으로 핵무기 없는 세상을 실현하고 있다. '동북아비핵지대'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극동러시아와 중국 동북3성을 포함하는 지역에 핵무기를 완전하고 영구적으로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유엔과 지역 기구를 통해 지속적으로 검증하는 야심찬 계획이다.
오늘날 핵확산금지조약(NPT)이나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같은 국제조약들이 핵보유국들의 이중 잣대로 인하여 북핵 억제기능을 다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동북아비핵화 지대' 창설은 핵무기에 관련된 미국, 중국, 러시아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완충하고 북한으로 하여금 핵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압박할 수 있다.
미/중/러도 동북아비핵 지대 창설에 반대할 명분이 없으며, 북한도 비핵지대화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작동하고 있는 4개 비핵지대의 전례에서 보듯, 이는 단지 이상을 넘어 가장 현실적인 북한 비핵화의 실천 방안일 수 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이미 이 지역의 비핵지대 창설을 제시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단기적으로, 한미연례군사훈련의 규모나 성격에 대한 조정이 불가피하다. 한미군사훈련이 개시되면 북한도 비슷한 규모의 군사훈련으로 대응하게 된다. 이러한 재래식 군비 소요의 증가는 북한으로 하여금 가성비가 높은 핵개발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도록 한다.
북한의 핵실험은 한반도와 주변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절체절명의 문제이다. 지금 시급한 문제는 위와 같은 협상안을 통해 일단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현재 가사 상태이긴 하지만 기존의 6자 회담의 틀을 살려야한다. 원래 6자 회담 자체가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위한 '5+1'의 장이었고, 북한이 이 프로세스에 나선 것은 다른 4개국이 아닌 미국과의 1대1 직접 협상을 위함이었다.
본격적인 비핵화 협상이 '제네바 기본합의'부터 시작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북한을 제외한 5자가 만나 비핵화 문제를 논의하면, 마치 당사자가 빠진 이혼 조정처럼 회담이 공전될 뿐이다. 외교전략은 가치 판단의 문제를 넘어설 때가 많다. 박근혜 정부가 좀 더 거시적이고 고차원적 비핵화 전략을 제시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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