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문다. 유라시아 견문 10개월 차다. 벵골만 지나 콜카타에 있다. 아랍어 공부를 시작했다. 인도양 세계와 이슬람 세계로 갈 준비를 한다. 새해는 남아시아와 서아시아에 주력할 참이다. 허나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온라인이 말썽이다. 시시각각 나라 소식이 들려온다. 國運(국운)이 기울고 있다는 방정맞은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애가 탄다.
안과 밖의 낙차가 심하다. 북방의 울란바토르에서 남방의 자카르타까지 쏘다녔다. 신장의 카슈가르에서 운남의 샹그리라까지 서역도 살폈다. 동북아와 동남아를 막론하고 한국의 위상을 확인한다. 공항서부터 한국 대기업의 광고판이 휘황하고, 숙소서는 현지어로 더빙된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다.
쿤밍에서는 카페베네에서 커피를 마시고, 반둥에서는 교촌치킨에서 맥주를 마셨다. 하노이의 주부들은 '강남 스타일'에 맞추어 춤을 추고, 프놈펜의 어린이들은 하얀 도복을 입고 태권도를 배운다. 매달 신곡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컴백한 빅뱅의 음악은 동유라시아 도처에서 흘러나왔고, 따리(大里)와 리장(麗江)의 고성(古城)까지 한글로 된 표지판이 친절하다. 마닐라의 택시 기사부터 만달레이의 식당 주인까지 'Anyonghaseyo!'라고 인사한다. 패션부터 음식까지 한류는 세계인의 일상 문화가 되었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환영받고 환대를 누린다. 대한민국은 필시 세계화의 물결을 가장 잘 탄 나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작 들어가면 갑갑하다.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여름에는 학술 회의에서 논문을 발표했고, 가을에는 부산 국제 영화제에 패널로 참석했다. 둘 다 때가 공교로웠다. 전자는 메르스 사태의 말기 국면이었고, 후자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파동의 초입이었다. '세월호' 이후의 세월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어지럽고, 어리석다. 國體(국체)는 망가지고, 國魂(국혼)은 흔들린다. 光復(광복) 70주년, 공든 탑이 무너진다.
업이 업이니만큼 국정화 논란에 무심할 수가 없다. 열불이 나다가도 착잡해진다. 사학계 전체를 좌파로 몰아가는 행태가 황당하면서도, 기존의 교과서에 담겨 있는 역사 인식에는 나 또한 수긍하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른'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주장에는 일백 번 찬성한다. 다만 좌편향은 괴담이다. 실상은 근대 편향이다. 좌/우 공히 근대로 기울어졌다.
내 학창 시절 국정 교과서의 기조가 내재적 발전론이었다. 조선 후기에서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는 억지를 부렸다. 경영형 부농을 부르주아와 연결시키고, 실학을 계몽주의와 잇는 식이다. 그래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되치기를 당한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은 명백하게 일제에 있다. 개항으로 말미암아 조선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되었고, 식민지가 됨으로써 전면화되었다. 부끄러워할 일이 전혀 아니다. 조선이, 동방이, 내발적으로 자본주의로 이행할 까닭이 전혀 없었다. 필연보다는 우연이었다. 교통사고 같은 것이었다. 역사도 울퉁불퉁, 돌발의 연속이다. 매끈한 진보사관은 과학이 아니다. 근대의 주술이다.
'자학 사관'도 피장파장이다. 좌/우 모두 전통 문명을 천시한다. 조선은 '중세'로 가두고, 동양은 '봉건'으로 박제한다. 전통과 근대에 만리장성을 쌓는다. 근대를 華(화)로 섬기고, 전통을 夷(이)로 배척한다. 古今(고금) 간 분단 체제이다. 그래서 내재적 발전론도 식민지 근대화론도 '시각의 차이'가 아니라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조선 후기냐, 일제 시대냐. 오십 보, 백 보이다.
고로 진보도 보수도 올바르지 못하다. 올드레프트도 뉴라이트도 서구 근대를 전범으로 삼는 도깨비 놀이를 반복한다. 교통사고를 낸 쪽을 따지기보다는 도리어 따르려고 한다. 이 도착과 당착의 기원에 개화파가 있다. 동방 문명에 무지한 새파란 선무당들이었다. 개발파와 개혁파도 개화파의 맹점을 답습했다. 산업화에 성공하고 민주화를 성취했다며 각자 뻐겨댄다.
겉으로는 앙숙이지만, 실제로는 짝꿍이다. 산업화+민주화=근대화의 대서사를 공유한다. 그래서 근대 문명의 파국이 임박한 작금의 시대정신과는 도무지 어긋나는 역사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 개발파의 시대착오만큼이나, 개혁파도 구태의연하다. '근대 문학의 종언'(=독립적 개인의 성장사)에 이어 근대 사학(=독립적 국민국가의 발전사)도 종언을 고한다.
새 체제
역사 논쟁의 빈곤은 체제 논쟁의 부실로 이어진다. 한때 87년 체제냐 97년 체제냐 논쟁이 일었다. 내발론과 외인론의 사회과학적 판본이었다. 87년 체제론은 내부의 주체적 역량을 과도하게 추킨다. 민주화 세력의 자긍과 자부가 자충수를 연발한다. 반면 97년 체제론은 외부의 충격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만사가 신자유주의 탓, 세계화의 덫이란다.
조금만 시야를 넓혀도 87년도 97년도 한국만의 현상이 아님이 자명하다. 필리핀, 태국(타이), 대만(타이완) 등이 동시적으로 '민주화'에 진입했다. 즉, 87년 체제는 예외적인 성취가 아니다. 일반적이고, 전형적이다. 그리고 딱 10년 후에 금융 위기가 이 지역을 휩쓸고 지나간다. 냉전기 개발 독재 국가들이 축적한 국부를 글로벌 자본주의가 회수해 간 것이다.
87년 체제와 97년 체제는 차라리 연속적이다. 민주화가 세계화로 가는 디딤돌이었다. 동아시아에 동유럽까지 보태어 유라시아를 망라하면, 냉전형 좌/우 독재를 허무는 '민주화'(=체제 이행)가 자본이 천하를 통일하는 '평평한 세계'의 전조이자 전제였음이 더욱 확연해진다.
새 천년의 역설은, 그럼에도 세계사의 축이 점점 더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 이후에는 아시아가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심장으로 약동한다. 중국(Made in China)이 앞에서 끌고, 인도(Make in India)가 뒤에서 민다. 친디아(Chindia)에 덩달아 '이슬람 자본주의'도 약진한다. 중국과 인도와 이슬람이 만나는 동남아는 이미 한 몸(ASEAN)이다. 19세기의 유럽, 20세기의 아메리카처럼, 21세기에는 아시아가 세계의 성장판이다. 87년 체제와 97년 체제와는 상이한 흐름이 저류에서 크게 일었던 것이다.
그 변곡점에 1992년 한-중 수교가 있다. 1987과 1997년 사이에 대륙과의 재회가 있었다. 시뻘건 '중공'이 아니라 개혁 개방 이후의 중국이었다. 그래서 세계화는 곧 미국화라는 등식도 성립하지 않았다. 한국의 세계화는 중국을 경유하는 세계화였다. 대륙을 발판삼아 세계로 나아갔다. 삼성(三星)이 글로벌 브랜드(SAMSUNG)가 된 것도, 한류가 세계인의 대중문화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래서 냉전기의 미-일 편중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여야의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남북 관계의 냉온탕과 무관하게 일관된 추세였다. 국지적인 정세의 변동이 아니라 역사의 대국, 대세였다. 그래서 불과 20년 만에 지난 100년의 흐름을 역전시킨 것이다. 목하 한국의 사회 구성체는 북조선 못지않게 대륙과 긴박하게 연동되어 있다. 서울부터 제주도까지 풍경마저 바꾸어 갈 정도이다. 하여 중국론이 결여된 한국론은 더 이상 성립할 수가 없다. 87년 체제도 97년 체제도 실격이고 실기했다.
실은 분단 체제 또한 한중 수교로 크게 흔들렸다. 본디 신중국의 개입으로 성립된 체제였다. 분단 체제는 1945년(미-소 담합)이 아니라 1953년(미-중 대결)에 확립된 것이다. 53년 체제였다. 미-소의 유럽형 냉전이 아니라 미-중의 아시아형 냉전의 소산이다. 마오쩌둥이 중국의 남-북 분단을 거부하고 장강을 돌파한 것처럼, 김일성은 한강을 건넜고, 호치민은 메콩강으로 향했다.
중일 전쟁의 제국주의 대 반제국주의 길항이 국공 내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을 연거푸 추동했다. '항일'이 '항미'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남북 전쟁이었다. 한반도에서는 북-중과 한-미가 길항했다. 그중 한-중이 적대 관계를 청산했으니, 분단 체제 또한 결정적으로 기울어졌던 것이다. 곧바로 불거진 것이 북핵 사태이다. 문민화 대 선군 정치, 비대칭적 분단 체제의 시발이었다.
돌아보면 한중 수교는 '장기 21세기'의 출발이었다. 1894년 청일 전쟁 이후 한국은 탈중국화의 일백년을 경험했다. 식민지가 되고 분단국이 되었다. 식민지 근대화 30년, 분단국 산업화 30년, 속국 민주화 30년이 대륙과 동떨어져 진행되었다. 하여 1992년은 반도의 남쪽이 다시 대륙과 연결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00년 만에 재회한 중국은 동아시아에 자족하는 왕년의 중화제국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국제주의와 중간지대론과 삼개세계론을 경유한 유라시아 제국이었다. 한국 또한 대륙과 접맥함으로써 부지불식 유라시아와 접속한 것이다. 동아시아(론)는 그 일부였을 따름이다. 중국화와 세계화의 상호 진화로 운동하는 중국의 서북 너머까지 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담론의 넓이와 깊이 자체가 분단의 소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냉전기 북조선 지식인들의 경험 세계는 퍽이나 달랐을 것이다. 과연 분단 체제의 길항은 갈수록 유라시아와 태평양으로 갈라지고 있다. 좌우 이념 대결에서 지리-문명(Geo-Civilization)의 길항으로 성격이 달라졌다.
새 문명
2008년 이래 세계 체제의 운명을 중국이 좌우한다. 이른바 '신상태(New Normal)'로 진입했다. 미국 발 금융 위기 이후 세계 경제 성장의 3분의 1이 중국에 의한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양적 완화보다도 중국 정부의 과잉 투자가 대공황 이래 최악의 위기에 처했던 자본주의를 구해냈다.
양적 완화는 금융 시스템의 연명에는 효과가 있을지언정, 실물 경제를 직접적으로 개선시키지는 못한다. 실제 경제를 지탱해온 것은 중국의 투자였다. 자국의 인프라 정비와 주택 건설 등에 재정을 쏟아 붓고, 원자재와 에너지도 왕성하게 수입했다. 그래서 중국이 부진하면 세계 경제가 불황에 빠지는 글로벌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단기 처방이다. 오래갈 수 없는 임기응변이었다. 작년(2014년)부터 폐해가 도드라졌다. 거품이 푹 꺼지고 있다. 올 여름에는 주식 시장이 폭락했다. 주시할 대목은 당국이 인위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상 방치했다. 올해부터 투자 증가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대신 '신상태'라는 언설을 널리 유포했다. 중국도, 세계도, 고도성장의 시대는 지나갔다. 향후 저성장 시대가 오래 지속될 것이다. 하여 체질을 개선하고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신문에서 방송에서 연일, 연중, 떠들어댄다. 선전이고, 선동이다.
물론 반동파도 있기 마련이다. 인위적 경기 부양으로 거품을 재차 일으키고자 하는 관성적 세력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반(反)부패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개혁 개방에 도취되고 성장(의 떡고물)에 중독되어 있던 공산당 상층부 유력자들을 제거해간다. 이들은 언제라도 외세(의 담론적 지원)를 등에 업고 다당제와 시민 사회로 작동하는 '민주화'를 요구할 수 있다. 시민 혁명으로 인민 혁명을 뒤엎어 권력을 시장으로 넘겨 사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동아시아와 동유럽의 '독재 정권'을 타도함으로써 각국의 주권을 약화시키고 자본의 영토를 대폭 확장시켰던 민주화=세계화의 전략을 변주할 수 있는 것이다. 마오쩌둥에 버금간다는 '시황제'의 '독재 권력 강화'에는 이런 측면도 있다 하겠다. 세계 체제의 전체 판세를 살피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민주주의' 타령만 해서는 심히 곤란하다.
내부 단속과 척결의 반면으로, 외부로는 새 틀을 짜고 있다. 국내의 과잉 투자를 여타 신흥국으로 돌리는 중이다. '일대일로'의 발진이다. 유라시아 전체의 고정 자산(인프라) 투자를 중국이 주도해 간다. 일대일로가 각별한 점 가운데 하나는 화폐의 전환이다. 종래에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달러와 유로를 조달하여 국내에 투자했다. 이제는 중국의 자금으로 세계에 투자한다. 올해 인민폐는 SDR에 편입됨으로써 국제통화기금(IMF)가 승인하는 기축통화의 하나가 되었다. 중국의 인민폐가 세계의 인민폐가 되어간다.
1945년 이후 미국은 '식민지 없는 제국'으로 군림했다. 군사 기지 연결망과 달러를 통한 금융망으로 전 세계를 지배했다. 모든 상품과 자산과 무역 거래의 최종적 가치가 달러로 표시되었다. 탈영토적 지배 방식이고, 비가시적 제국주의였다. 그로부터 70년, 그 그물망에서 벗어나는 대안적 제도들이 속속 등장했다. 브릭스 개발 은행이 IMF와 세계은행을 대체하고, AIIB는 ADB를 대체한다. 19세기 은화에서 파운드로, 20세기 파운드에서 달러로의 이행에 견줄만한 커다란 변화가 진행 중이다.
즉 중국이 경기의 규칙을 새로 쓴다. 미국의 '재균형'에 맞불을 놓고, 맞짱을 뜨기보다는 새 길을 낸다. 미국식 체스 게임에 응대하기보다는 게임의 종목 자체를 바꾼다. 판세를 뒤엎기보다는 판 자체를 갈아버린다. 분단되고 분열된 독립국들을 '거대한 체스판'의 졸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와 각 문명을 잇고, 엮고, 묶어내는 과업에 역량을 집중한다.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는 분할 지배(Devide and Rule)와는 정반대의 접근이다. 나와 남을 가르지 않고, 내 안에 너를 품고, 네 안에 나를 심는다. 초국가적(Trans-National)이고 간주체적(Inter-Subjective)이다. 이로써 유럽과 아시아를 공간적으로 분할하고, 근대와 전근대를 시간적으로 분리했던 19세기 이래의 대분기를 반전시키는 것이다. 대통합과 대융합, 유라시아의 대일통을 이룸으로써 자본주의 이후의 새 문명을 예비하는 것이다. 더 나은 100년을 장담할 수는 없다. 다만 다른 100년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United Eurasia
2015년, 미래가 언뜻 지나갔다. 9월 3일 전승절, 역사적인 사진이 연출되었다. 중국, 러시아, 한국, 카자흐스탄의 정상이 나란히 섰다. 그리고 항일 전쟁 승리 70주년을 기념했다. 22세기의 역사가들이 21세기를 회고하며 즐겨 언급할 사진임에 분명하다. 중원과 북방과 반도와 서역이 (다시) 합류했다. 'United Eurasia'의 부상, 세기적인 사건이다.
지난 세기, '抗日(항일)'이 무엇이었나. '脫亞入歐(탈아입구)', 일본이 추종했던 유럽형 근대화에 대한 아시아의 집합적 저항이었다. '진보(Progress)'에 맞선 '道德(도덕)'의 항쟁이었다. 패도에 맞선 왕도의 도전이었다. 20세기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양대 축이었다. 21세기에는 유라시아의 대륙주의와 고전적 문명주의가 양대 축이다. 역사의 되돌림, 문명의 되살림. 재생과 중흥이 21세기의 혁명이다.
북경(베이징)은 어느새 다시, 天下(천하)의 중심이다. 모든 고속철과 고속도로가 베이징으로 통한다. '거대한 체스판'을 촘촘한 바둑판으로 바꾸어간다. 그러나 21세기의 중국이 19세기의 영국이나 20세기의 미국처럼 과잉 성장하고 과대 팽창할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중국의 왕도에 막연한 희망을 거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 자체가 허약해졌기 때문이다. 영/미처럼 전일적이고 전횡적인 패권국의 부상을 예상하기 힘들다. 오히려 사물을 제 자리로 돌려놓고, 제 자리로 돌아가는 작업을 주도하는 데 중국의 역할이 있지 싶다. 유럽은 유라시아의 서쪽 동네가 되어갈 것이다. 미국 역시 태평양 건너, 대서양 너머 아메리카로 돌아갈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 진정한 '재균형'이다.
동방의 등불
인도양의 포근한 성탄절, 첫눈처럼 청량한 소식이 들렸다. 인도의 모디 총리가 파키스탄의 이슬라바마드를 깜짝 방문했다. 모스크바에서 카불을 거쳐 뉴델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샤리프 총리의 생일 잔치에 맞춤한 선물이다. 알자지라는 하루 종일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1947년 대영제국에서 독립하면서 힌두교와 이슬람교로 갈라섰던 두 나라이다. 그 후 두 차례나 혈전을 벌였고, 지금도 핵무기로 서로를 겨누고 있다. 실향민과 이산가족만 1억에 육박한다. 이 남아시아의 분단 국가들이 대화합의 여정에 들어선 것이다. 박수갈채를 받아 마땅하다. 한 해의 끝이 훈훈하다.
이들을 아우르고 있는 남아시아 지역협력연합(SAARC) 또한 국가 간 연대에 그치지 않는다. 힌두 대국 인도와 이슬람 대국 파키스탄은 물론이요 부탄과 네팔, 스리랑카와 같은 불교 소국들도 포함하는 문명 간 연합체이다. 19세기가 연합 왕국(United Kingdoms), 20세기가 연합 중국(United States)의 전성기였다면, 21세기는 문명 연방(United Civilizations)의 전성기가 될 법하다.
도래하는 유라시아의 세기에 한반도가 부응하는 길은 20세기형 분단을 종식하는 것이다. 유라시아의 문명 연방(United Eurasia)에 남북의 국가 연합(United Korea)을 조응시키는 것이다. 북조선은 핵 보유와 세습 권력 안정으로 반등의 계기를 확보했다. 비대칭적 분단 체제를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에 적극적이다. 중원과 북방과 서역과의 협력을 통하여 나라를 재건하고 更張(경장)해 갈 것이다. 한국도 합류하여 장단을 맞추어야 하겠다. 그래서 70년이 지나도록 못다 이룬 해방과 광복도 완수해야 하겠다. 통일은 대박이고 축복일 것이다. 표류하는 한국호의 (아마도 유일한) 出路(출로)일 것이다.
이곳 콜카타에는 20세기의 시성(詩聖), 타고르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의 생가에서 <동방의 등불>을 음미해 보는 것은 각별한 체험이었다. 1894년 좌초한 東學(동학) 혁명에 감화되어 조선의 '가지 못한 길'을 아끼는 마음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노래했다. 한 자, 한 귀 소중하게 되새기며, 새해 '동방의 밝은 빛'을 다짐한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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