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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마 회담 vs. 1945년 장마오 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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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마 회담 vs. 1945년 장마오 담판

[한인희의 중국 역사의 뒤뜰] 시마 회담과 1945년 충칭 담판

지난 7일 역사적 장면 하나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과 대만(타이완)의 마잉주 총통이 화교들이 세운 도시 국가 싱가포르에서 손을 맞잡았다. 둘의 만남은 1949년 양안 분단 후 첫 정상 회담으로, 66년간 명목상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던 터라 만남 자체로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들의 회담은 1945년 여름 한 달여 동안 국민당과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로 협상을 벌였던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의 '충칭 담판(重慶談判)'과 비견되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몇 가지 '역사적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1945년 8월 15일 종전과 더불어 중국에서는 해결해야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특히 누가 중국을 통치할 것이냐의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대일 항쟁을 진두지휘한 국민당의 장제스는 미국의 중재 하에 전쟁에 협력했던 공산당의 영수(領袖) 마오쩌둥을 초청하여 '국사'를 논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장제스는 이미 끝난 게임이라고 생각하며, 향후 자신이 중국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장과 마오의 담판은 사실 장이 명분을 만들기 위해 형식적으로 취한 제스처에 불과했다. 마오를 불렀지만 마오가 국민당의 근거지인 충칭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게 명분을 쌓고 '건국'에 공산당을 배제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마오쩌둥은 1945년 8월 28일 중국공산당 대표단을 이끌고 충칭으로 날아온다. 이렇게 성사된 것이 이른바 '충칭 담판'이다. 이 글에서는 그렇게 역사가 된 1945년의 충칭 담판과 2015년 시마 회담을 비교해 보려 한다.

43일간 진행된 충칭 담판과 155분의 시마 회담

이른바 '시마회(習馬會)'는 2015년 11월 7일 오후 5시 정각에 80초간의 악수로 시작됐다.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였다. 공개 회담은 10분간 진행됐고 50분간의 비공개 회담이 있었다. 그리고 95분간의 만찬으로 막을 내렸다. 술은 대만의 금문도 고량주(金門高粱)가 올려졌고 식사는 쓰촨 성의 단단면(担担麵)이 준비되었다.

'충칭 담판'은 1945년 8월 29일부터 10월 10일까지 43일간 진행됐고, '시마회'에 걸린 총시간은 155분이었다. 물론 정치적 이벤트로서의 성격이 강한 '시마회'와 권력 분할을 두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던 '충칭 담판'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갑과 을의 입장이 역전되어버린 두 회담

'시마회'에서는 6개월밖에 임기가 남지 않은 마잉주에 비해 시진핑이 확실한 갑의 위치에 서 있었다. 이에 반해 '충칭 담판'은 국민당의 장제스가 갑이었고, 공산당의 마오쩌둥이 을이었다. 1945년 종전과 함께 당시 국민당은 400만 이상의 병력을 보유해 100만 남짓한 공산당 군대에 비해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충칭 담판'을 위해 장제스는 마오쩌둥과 세 차례의 전문을 주고받았는데, 첫 전문은 일본이 항복하기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에 발송했고 호칭은 마오쩌둥 '선생'으로 했다. 이에 대해 마오쩌둥은 이틀 후인 16일에 답전을 보낸다.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장 위원장'이라고 불렀다. 오고간 전문의 내용은 일본이 패망했으니 전후 건국에 관한 틀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마지막 전문에서 마오쩌둥은 자신을 낮추어 '동생(弟)'이라고 했다.

목숨을 건 충칭회담과 너무나 '안전'했던 시마 회담

'시마회'는 목숨을 걸 정도의 위험성은 전혀 없었다. 시종 화기애애하고 서로 피를 나눈 '중국인'과 염황의 자손임을 강조했다. 이에 비해 '충칭 담판'은 시작부터 목숨이 걸려 있었다. 그래서 장제스는 마오쩌둥이 자신의 초청에 불응할 것이라 예상했다.

당시 충칭은 국민당의 임시 수도였다. 호랑이굴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냉혹하기로 악명을 날리던 국민당의 정보 책임자 따이리(戴笠)의 음흉한 계략을 예측할 수 없었다. 내륙의 황토고원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마오쩌둥의 충칭행은 안전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판을 무사히 마쳤다고 하더라도 안전하게 다시 옌안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공산당 내부에서 심각한 토론이 있을 정도였다.

마오쩌둥은 떠나기 전, 류샤오치(劉少奇)에게 자신의 직책을 맡도록 하고, 천윈(陳雲)과 펑쩐(彭眞)을 후보서기로 추대했다. 마오쩌둥 자신과 저우언라이(朱恩來)가 담판에 참가하는 만큼 만약의 경우 문제가 생기더라도 류샤오치를 중심으로 공산당을 이끌도록 부탁했다. 비장감이 흐른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국민당 원로 리유야즈(柳亞子)조차 "호랑이가 분명하게 있는 줄 알면서 산속으로 들어가는 대단한 용기(彌天大勇)"라고 추켜세웠다. 초청했던 장제스가 마오쩌둥이 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던 정황은 나중에 드러난다. 담판에 참석한 마오쩌둥의 말이다.

"장제스는 나에게 세 번의 전문을 보냈는데, 가보니 그들은 협상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모든 제안은 내가 했다."

국제 정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두 회담

'시마회'가 이뤄진 배경에는 간접적이긴 하지만 미국이 있다. 미국이 아시아 회귀 전략을 추진한 이래, 중국은 봉쇄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내년(2016년) 대만의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이 당선되면 친미 노선의 길을 걸을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이기도 했다.

'충칭 담판'에도 미국과 소련의 간섭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이 되었을 때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은 표면적으로는 '독립'된 중국정부가 건설되기를 희망한다고 했으나 이면에는 소련을 '억제'하려는 의도가 밑바탕이었다. 미국은 항일 전쟁 시기에는 '중국을 도와 일본을 막는다'는 정책 기조를 유지했으나 이후에는 장제스를 도와 반공 정책을 펼쳤다.

장제스의 국민당과 소련은 1945년 8월 14일 '중소 우호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친공산당이었던 소련이 국민당과 조약을 체결한 목적은 자신들의 이익이 존재하는 중국 동북 지방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저지하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이후 '충칭 담판'에는 외국인 대표로 미국 측에서 패트릭 J. 헐리, 장제스의 고문이었던 레이놀즈, 그리고 주중국 소련 대사 피터로프가 참석했다.

회담 참석자들의 면면

'시마회'에 참석한 양측 대표단은 양안 정상을 포함하여 쌍방이 각각 7명씩 비공개 만찬에 참석했다.

대만 측에서는 대만 총통부 비서장 정용취안(曾永權), 국가안보회의 비서장 가오화주(高華柱), 총통부 부비서장 샤오쉬천(蕭旭岑), 대륙위원회 주임 위원 샤리옌(夏立言), 국가안보회의 자문위원 츄쿤쉬안(邱坤玄), 대륙위원회 부주임위원 우메이홍(吳美紅) 등 6명이 참석했고, 중국 측에서는 중앙판공청 주임 리잔수(栗戰書),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왕후닝(王滬寧), 중공중앙판공실 부주임겸 총서기 판공실 주임 딩쉐샹(丁薛祥), 외교담당 국무위원 양제츠(楊潔篪), 국무원 타이완 판공실 주임 장즈쥔(張志軍), 국무원 타이완 판공실 부주임 천위안펑(陳元豐) 등이 참석했다.

'충칭 담판'은 장제스 측에서 국민당 중앙감찰위원이던 왕스졔(王世杰), 사천성 주석이었던 장쥔(張群), 국민당군사위원회 정치부 부장이었던 장쯔중(張治中), 국민당선전부장이었던 사오리즈(邵力子)가 참석했다. 마오쩌둥 측에서는 공산당의 2인자이자 외교를 총괄하고 있던 저우언라이와 중공중앙 비서장이었던 왕뤄페이(王若飛)였다. 단, 세 사람만 참석했다. 담판의 대표 자체가 비대칭이었다.

43일간의 회담을 마치고 10월 10일에 '쌍십협정'을 맺었는데, 협정의 골자는 "장기간의 합작을 통해 내전을 피하고 부강한 신중국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이후의 정세는 잘 알려진 대로, 중국공산당이 1946년 1월 10일 정전 선언을 했으나 장제스가 협정을 파기하고 6월 1일 내전을 선언하고 3년간의 국공 내전을 벌였다.

'시마회'와 '충칭 담판'을 통해 역사의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된다. 각자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담판의 자리에 앉은 그들은 자신의 바람대로 구조(structure)와 질서(order)를 만들어 내려 애를 쓴다. 그러나 복잡한 요인들이 얽혀있는 역사는 아무리 막강한 권력자라도 그 개인의 바람대로 흐르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영원한 갑은 없도록 흐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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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희

건국대학교 국제학부에서 가르치며, 한중사회과학학회 회장과 KU 중국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대만 중국문화대에서 중국 근대 정치사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 중국의 영웅들>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와 <중국 외교사> 시리즈 및 <대만 현대 정치사> 등 20여 권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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