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12년 11월 1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새로 선출된 18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들의 내외신 기자 회견이 열렸다. 3000여 내외신 기자들의 눈은 새로 선출된 시진핑 당 총서기의 입에 모아졌다.
시진핑은 "모든 역량을 집중해서 부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이 막을 올린 것이다. 이틀 뒤 18기 중앙정치국 제1차 집체 학습 시간에는 "일체의 당 기율과 국법 위반 행위에 대해 반드시 엄정하게 처벌할 것"을 선포했다.
곧이어 중국공산당 쓰촨 성 당위원회 부서기인 리춘청(李春城)에 대한 처벌을 시작으로 부패한 관리들에 대한 처벌이 대폭 강화되고 확대되었다. 현재까지 98명의 국가 부급(部级, 한국의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리와 군 인사들이 낙마했다. 대표적으로 2014년 6월 수롱(蘇榮) 전국정협부주석, 쉬차이허우(徐才厚) 중앙군위 부주석, 저우용캉(周永康) 전 당중앙정치국 상무위원, 12월 링지화(令計劃) 중공중앙통전부 부장, 올해 7월의 궈보슝(郭伯雄) 중앙군위 부주석 등 최고위급 정치인들까지 부패 문제로 낙마했다.
사실, 1949년 이후 마오쩌둥도 군중 운동을 통해 관료 부패 문제를 해결하려 한 적이 있다. 그러나 1978년 개혁 개방 이후 관료들의 부패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관료의 부패 문제는 특정한 권력자나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제도로서 관료 제도를 개혁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강력한 처벌로 관료 부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중국 역사에서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다. 역사가들은 그를 폭군 랭킹 상위권에 올려놓고 있다. 무고한 사람 5만 명 이상을 죽이고, 황제 신분으로 신하를 직접 매질하기도 한 지도자였다. 또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신분이 미천한 출신이었다. 주원장의 부친은 소작농 주세진(朱世珍)이고, 모친은 진(陳) 씨라고만 알려져 있다. 가난한 농민 가정의 8번째 아들이라서 이름이 중팔(重八)이라고 불렀다. 그는 너무도 가난해 지주 황 씨 집에서 소몰이로 배를 채우며 성장했다.
늘 허기가 졌던 주원장은 어린 시절 황각사(皇覺寺)에 가서 땡중 노릇을 하며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72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명태조 주원장의 어진은 두 개의 판본으로 나뉜다. 근엄하고 반듯한 모습의 초상화와 삐뚤어지고 얼굴에 점이 가득한 추한 모습의 초상화이다.
이렇게 미천한 출신의 주원장이 어떻게 황제가 되었을까? 몽고족이 지배하던 원나라 말기는 부패와 혼란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이 시기 각지에서는 봉기가 일어났고, 주원장도 곽자흥(郭子興)의 봉기군에 가담하여 무공을 세우고 지위가 계속해서 올라갔다. 주원장이라는 이름도 봉기군의 두목 곽자흥이 지어주었다.
주원장은 봉기군 내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우두머리가 되었다. 마침내 1368년, 이민족의 정권인 원나라를 중원에서 몰아내고 한족 정권인 명나라를 남경에 건설하고 황제로 등극하였다. 이때 주원장의 나이는 40세였다. 이후 주원장은 재위연호를 홍무제(洪武帝)라 칭하고 30년간 중국을 통치했다.
최근 중국 해남성의 <삼아일보(三亞日報)>에 '주원장의 반부패 정치가 전해주는 계시'라는 글이 실렸다. 조칠근(趙柒斤)이라는 한 언론인이 쓴 글인데, 이 글에서 그는 주원장이 창건한 새로운 왕조가 직면한 핵심 과제로 '관료 부패' 문제를 들었다.
역사는 언제나 위기가 기회를 제공한다.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비가 오기 전 창문을 고치고자' 먼저 정보 정치 기구를 만들었다. 원나라 통치 기간 심각한 관료의 부패와 사회혼란이 오히려 주원장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 기구의 책임자는 바로 자신의 측근을 두는 것은 불문가지다. 바로 악명 높은 금의위(錦衣衛)였다. 이 조직은 훈공(勳功)과 혈연관계가 있는 도독(都督)을 장관으로 두고, 남북의 두 진무사(鎭撫司)와 14소(所)를 통할하였다. 황제의 거동 때 경호, 궁정 경비, 수도 안팎 순찰, 죄인 체포와 신문 등을 담당하였다.
무소불위의 금의위는 별도의 조옥(詔獄)을 두어 형부(刑部)의 법률 절차를 밟지 않고 투옥하였다. 이들은 시장, 술집, 찻집, 기생집, 개인 주택 등 모든 지역이 사찰의 대상이었다. 사진기가 없던 시기에 현장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서 매일 황제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이 정보를 보고 주원장은 대신들에게 "어제 술 드셨소? 옆에 누가 있었지!"라고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정치 요인들과 감독관원의 권한 남용과 관료 부패 문제 등을 다루었다. 전권을 부여한 특수 조직이었다.
부패 문제에 특별한 경계심을 가졌던 주원장은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大明律)>에 '수장(受贓)' 편을 자신이 직접 작성했다. '수장'이란 죄명에 관한 리스트를 의미한다. 또한 주원장은 '명대고(明大誥)' 편을 직접 작성했다. '명대고'란 특별형사법규였다. '대고일편(大誥一編)' 74조, '대고속편(大誥續編)' 87조, '대고삼편(大誥三編)' 32조 도합 236조를 제정하였다. 매우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대고일편(大誥一編)'에는 백성들이 부패 관리들을 어떻게 묶어서 수도로 압송하는 지의 예를 제시해 놓기도 했다. <어제대고서(御製大誥序)>의 서문에서 주원장은 "이후부터 백성을 해하는 일을 처리하는데 필요한 천하의 모든 부서에 지시하노라. 업무를 추진함에 불편부당이 없기를 바란다. 부패를 범하는 자와 백성들을 학대하는 자들은 죄를 묻겠다. 이 원칙을 세세도록 반드시 지켜나가기 바란다"라고 했다.
'대명고'가 발행된 이후 중국 역사상 관료들의 부패 행위에 대해 초강력의 법률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전통사회에서 오히려 '법률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극단적 조치들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주원장 통치 30년 동안 6차례 대규모 '부패 관료'들에 대한 대대적인 엄단 조치가 취해졌다.
1품 관직인 삼공(三公)에서부터 7품 현관(縣官)에 이르는 관리들이 부패로 죽임을 당한 자들만 4만여 명에 달하였다. 형벌은 극악무도했다. "능지처참, 성기 자르기, 박피, 진초(塡草 : 형벌의 한 종류로 죄인의 오장육부를 들어내고 그곳에 풀을 채워 인형으로 만드는 것)" 등의 처참한 형벌을 가함으로써 관료들의 극도의 두려움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주원장이 이처럼 '명대고'라는 특수한 법전을 만든 것은 관료 사회를 정돈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주목적이 있었다. 주원장은 관료 부패에 대한 법전을 발행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부패 관리 척결에 관한 학습 운동도 함께 추진했다. 일종의 '군중 운동'이었다. 집집마다 '대명고' 한 권씩을 반드시 비치하도록 했다.
관료들의 범죄 종류에 대해서 1만 가지 이상을 자세하게 수록하였다. 관리들의 범죄 과정과 처벌 형식 등을 책자로 만들어 반포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일반 백성들은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마치면 현재의 TV연속극 보듯이, 혹은 탐정소설을 읽듯이, 때로는 관료부패 관련 뉴스를 보듯이 법전을 숙독했다. 이를 통해 관료들이 부패를 근본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했다.
주원장은 당시 가장 청렴했던 관료 라복인(羅復仁, 1306~1371년)을 총애하였다. 라복인은 강서(江西) 출신이었다. 무서운 황제 주원장에게 언제나 바른 소리를 했다. 그는 최고직이 4품에 불과했지만 은퇴 때는 1품 이상이라야 받을 수 있는 황제의 하사품 옥대(玉帶)를 받았던 명대 유일한 인물이었다. 청렴한 관리들도 지역성이 있었던가? 중국 역대로 많은 청렴한 관리들을 배출했던 강서 지역 출신이라는 점도 눈에 띤다. 그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송대의 왕안석(王安石, 1021~1086년), 주희(朱熹, 1130~1200년), 양만리(楊萬里, 1127~1206년), 양장유(楊長孺, 1157~1236년), 명대의 하문연(何文淵, 1385~1457년), 오도남(吳道南, 1547~1620년), 용우기(龍遇奇), 청대의 진붕년(陳鵬年, 1663~1723년) 등이 모두 강서 출신이었다. 지금도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청관(淸官)들이다.
관료의 부패 문제는 역사 이래 계속되어 오고 있다. 근절이 어렵다. 오죽하면 '청백리'라고 청렴한 관리들을 뽑아 그 뜻을 기렸겠는가? 그만큼 청백리가 드물다는 이야기다.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에 대한 성공 여부는 중국의 역사 속에서도 지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주원장을 폭군으로 평가하고 있다. 지금의 중국 부패 관리들은 시진핑을 폭군이라 평가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부패의 악습을 뿌리 뽑으려고 했던 투박한 주원장의 모습에서 오늘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중국 관료 정치와 관련한 명저인 왕야난(王亞南)의 <관료의 나라 중국>(한인희 옮김, 지영사 펴냄, 2002년)에서는 중국 사회에 부패가 만연한 이유로 사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회 경제적인 조건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 뿌리는 문벌, 유가 사상, 과거제, 양세제 등 전통적 요인과 닿아 있다. 나아가 봉건적 왕조 체제가 끝났음에도 장제스로 이어진 국민당 통치의 '신관료' 정치가 관료의 부패를 더욱 부추겼다는 점도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료 부패는 '9개의 머리가 달린 괴물'처럼 계속 우리 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결국 역사의 난제, 관료의 부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강력한 처벌로 가능할까? 아니다. 결국 국민의 날카로운 감시만이 해결할 수 있다. 언론 감시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약 국민이 무관심하거나 언론의 비판의 칼이 무디면 해결은 난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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