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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비료로 北 못 움직여…금강산부터 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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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비료로 北 못 움직여…금강산부터 풀자"

[정세현의 정세토크] "8.25 합의 이후 보인 유연성이 중요"

남북이 8.25 합의 이후 3개월 만에 당국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남북은 오는 11일 개성에서 남북 현안을 포괄적으로 논의하는 차관급 회담을 갖기로 결정했다.

앞서 남북은 지난 8월 25일 고위급 접촉에서 공동보도문을 통해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당국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실제 회담은 서울-평양이 아닌 개성공단에서 열게 됐다.

이에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 회담이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 같다. 만약 8.25 합의대로 서울과 평양을 오갔다면 상호주의에 의해 한 번은 상대측의 지역을 방문해야 하기 때문에 연속성이 생길 수 있다"고 평가했다.

정 전 장관은 양측이 관심 있어 하는 의제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도 회담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남한은 이산가족 상봉을 최우선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북한은 금강산 관광 재개가 최우선 관심 사항"이라며 "남북이 각자 자기 주장을 너무 세게 하는 상황이라 의제에서 접점을 만들지 못한다면 실제 당국회담이 열려도 양측이 이전과 똑같은 이야기만 주고받을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회담의 성과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부가 수차례 강조한 이산가족 상봉의 정례화를 위해서라도 남한 정부가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한 전향적인 입장을 가지고 회담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전 장관은 "당장 이산가족 상봉 사업을 다른 데서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상봉을 정례화하고 자주 하려면 금강산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 핑계를 대고 관광을 재개하는 방법도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우리가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정하지 않고 이산가족 상봉만 관철하려고 하면 회담 성과를 내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가 얼마 남지 않은 설계기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성사시키고 싶다면, 이번에 금강산 관광 재개를 회담 의제로 가져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인터뷰는 지난 11월 30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남북이 지난 8.25 합의 1항에 명시했던 당국회담 개최에 합의했습니다. 일단 약속을 지켰다는 부분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정세현 : 8.25 합의 이후 석 달 만에 회담이 열리게 됐습니다. 이렇게 회담이 늦어진 것에 대해 남북 어느 쪽에 더 책임이 있는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만, 지난 2013년부터 계속돼 온 당국회담 수석대표의 '격'문제가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국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접촉을 제안하는 전통문에서 이러한 문제가 드러났는데요. 남한은 북한의 통일전선부 앞으로 전통문을 보내고, 북한은 이에 통전부가 아닌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으로 답했습니다.

남한은 통전부에 전통문을 보냈기 때문에 통전부에서 답이 오길 기다렸을 겁니다. 하지만 조평통에서 답이 왔고 결국 박근혜 정부는 이를 수용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뭔가를 해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회담 진행을 결정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회담을 낙관적으로만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기도 합니다.

일단 장소를 개성으로 했다는 것이 좀 꺼림칙합니다. 원래 당국회담 최초 합의는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개성과 판문점, 금강산 등을 요구해서 개성으로 못박았다는 건데, 이는 이 회담이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8.25 합의대로 서울-평양을 오갔다면 상호주의에 의해 한 번은 상대측의 지역을 방문해야 하기 때문에 연속성이 생길 수 있습니다.

회담을 불안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은 의제를 구체화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의제 없이 진행했던 회담도 많았습니다. 정상회담, 장관급 회담 등도 의제 없이 당시 상황에서 서로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제를 다 쏟아 놓고, 나중에 수석대표 접촉이나 추가 접촉을 통해 논의 범위를 좁혀 나가면서 접점을 찾았습니다. 또 외관상으로 보더라도 차관급 회담의 의제를 책정하지 않은 것이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다릅니다. 현재와 같은 남북관계 상황에서 남북이 이러한 방식으로 회담을 시작하면 평행선을 달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남한은 이산가족 상봉을 최우선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 재개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통일부에서도 밝혔듯이 지난 11월 26일 당국회담을 위한 예비 실무접촉에서 가장 쟁점이 됐던 부분이 의제 설정이었습니다. 포괄적으로 협의하는 것이 과거 사례에 비춰서 특별히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자기 주장을 너무 세게 하는 상황이라 의제에서부터 접점을 만들지 못했다면, 실제 차관급 당국회담이 열려도 양측이 이전과 똑같은 이야기만 주고받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프레시안 : 지난 2013년 수석대표의 '격'문제로 남북이 갈등을 벌이다가 결국 당국회담이 중단됐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남한이 처음부터 당국회담의 수석대표를 차관급으로 제안하면서 이러한 갈등을 피하려 했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정세현 : 우리가 먼저 당국회담 수석대표를 차관급으로 제안한 것은 잘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유연성을 발휘한 겁니다. 지난 2013년 장관급은 격이 안 맞는다고 해서 회담 직전에 파토가 났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른바 '원칙'을 접은 셈입니다.

▲ 지난 11월 26일 남북은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당국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접촉을 진행했다. 남측 대표인 김기웅(맨 오른쪽) 남북회담본부장과 북측 대표인 황철(맨 왼쪽)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장 ⓒ통일부

당시 박근혜 정부는 남북 간 현안을 권한 있게 협의하기 위해 장관급이 나서야 하고, 통일부 장관의 상대는 통일전선부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면서 '격'이 맞지 않으면 회담을 할 의사가 없음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남북의 기구가 완전한 대칭을 이루고 있지 않을뿐더러, 통일부 장관과 통전부장이 하는 업무는 성격이 좀 다르기도 합니다. 통전부는 산하에 조평통,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등을 두고 있습니다. 또 남한으로 따지면 국정원에서 하고 있는 공작도 벌이는 곳입니다. 게다가 현재 통전부장인 김양건은 당 비서이기도 합니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대면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보기에 통일부 장관은 이 정도 급이 되는 인사와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하는 일이 다를뿐만 아니라 권력의 크기도 다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쪽은 최고 결정권자와 바로 만날 수 있는 김양건 비서와 한두 단계 거쳐야 하는 남한 통일부 장관이 마주 앉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은 조평통 서기국장이 통전부장의 지시를 받고 있으니 이 사람이랑 만나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우리 통일부 장관이 북한의 서기국장보다는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많습니다. 북한 서기국장은 수석대표로 나온다고 해도 김정은 제1위원장까지 보고가 돼야하기 때문에 재량권이 우리보다 적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통전부장은 뒤에서 전체를 총괄하고 조정해야 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을 대놓고 회담 대표로 나오라고 하면 북한 입장에서는 수락하기 힘든 겁니다.

어차피 남북회담 수석대표들은 겉으로는 본인 앞에 앉아있는 상대를 보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뒤에서 모니터링하고 있는 사람한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회담 대표의 격이 너무 떨어지지만 않으면 굳이 격 문제를 가지고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막말로 북한이 그럴듯한 모자를 씌워서 내보내면 어떻게 할겁니까? 그 사람보고 재직 증명서 내놓으라고 할겁니까?

우리가 먼저 수석대표를 차관급으로 제안한 것은 융통성을 발휘한 결과입니다. 차관급으로 하면 우리도 북쪽도 내보낼 만한 인사가 많기 때문에 선택의 폭도 넓어집니다. 그런데 정부는 접촉 결과를 설명하면서 여전히 원칙을 지켜서 협상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이건 솔직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유연성과 융통성은 아무나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북한은 이걸 못합니다. 유연성과 융통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강자입니다. 북한이 말은 고압적으로 하지만 실질적으로 남북관계에서는 약자입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는 것은 우리고, 여러 측면에서 북한보다 우리가 우위에 있습니다. 정부가 원칙을 깼다, 북한에 굴복했다 등등의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굳이 원칙을 강조한 것 같은데, 이건 굴복이 아니라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유연성을 발휘한 것이라고 평가해야 합니다.

정부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평가하는 것이 북쪽과 협상에서도 유리합니다. 2013년과는 입장이 바뀌었다는 것을 북쪽도 뻔히 알고 있는데, 여기서 원칙을 어겼다는 비난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 억지로 궤변을 늘어놓으면 북쪽에서는 '말싸움을 통해 남쪽을 얼마든지 가지고 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 겁니다.

또 유연성을 발휘하면 우리가 어떤 식으로 치고 나갈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상황을 주도할 수 있지만, 뻔한 것을 가지고 억지로 짜맞추기만 하면 북한이 오히려 이를 역이용할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가 당국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유연성을 발휘한 것이라면, 회담 의제에서도 기존보다 전향적인 태도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정세현 : 정부가 차관급 회담을 하자고 먼저 제의했으면, 기왕에 거기까지 간 김에 북쪽에서 필사적으로 해결하고 싶어하는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해서도 준비를 해서 회담에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 2008년 금강산 관광 중단 이후 문을 닫은 관광지구 내 편의점 ⓒ프레시안(이재호)

당장 이산가족 상봉 사업을 다른 데서 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처음에 이산가족 상봉은 서울과 평양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상봉 장소를 금강산으로 옮겼는데, 지금은 면회소까지 마련된 상황입니다. 상봉을 정례화하고 자주 하려면 금강산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 이 핑계 대고 관광을 재개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금강산 관광 재개와 이산가족 상봉은 별개라고 선을 긋고 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이 인도주의적인 사업이라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정하지 않고 이산가족 상봉만 관철하려고 하면 회담 성과를 내기 어렵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얼마 남지 않은 설 계기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성사시키고 싶다면, 이번에 금강산 관광 재개를 회담 의제로 가져가야 합니다. 이런 전략 없으면 회담 수석대표도 곤혹스럽습니다. 박 대통령이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은 별개 문제 잖아요. 왜 인도주의 사업에 금강산 관광 재개를 걸고 넘어지는 거죠?"라고 하면 회담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북한 입장에서는 이산가족 상봉이 절대 인도주의 사업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사안입니다. 이산가족 상봉장은 남북간 체제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입니다. 북쪽 당국 입장에서는 정말 속상한 현장일 수 있죠.

게다가 이산가족들을 찾아서 금강산까지 데려오려면 추가적인 행정 소요가 발생합니다. 당장 경비 문제가 있고 수송문제, 지원 인력 등의 부담이 있습니다. 또 우리처럼 행정망이 전산화되지 않아서 사람을 찾으려면 일일이 수작업을 해야 합니다. 북쪽이 이산가족 상봉을 준비하기까지 겪게되는 여러 가지 말 못할 애로사항이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북쪽이 이런 어려움을 대놓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여전히 남북 간 체제 경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경제적으로는 경쟁이 끝났지만 체제 만족도라든가 이런 측면에서는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체제 만족도가 높다는 식의 착각을 하고 있는 북한 입장에서는, 체제 경쟁 차원에서 사실대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습니다. 그럼 남한이 이걸 그냥 도와주고 넘어가야 하는데, 현재 박근혜 정부에는 그런 아량이 없습니다.

그럼 북한 입장에서는 이산가족 상봉을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금강산 관광 재개라는 손에 잡히는 반대급부를 받지도 못하면 뭐하러 상봉을 하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요즘 북쪽의 분위기가 좀 바뀌긴 했다고 합니다. 전에는 이산가족 상봉 사업과 쌀, 비료의 정기적 지원을 맞바꿨습니다. 그런데 최근 북한을 다녀온 종교 관계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북한에서 이제는 인도주의라는 말을 좀 쓰지 말라고 했답니다. 자기들 식량 문제 괜찮다고 말하면서요. 전에는 현실적으로 당장 필요하니까 인도주의적 명목으로 받았는데 이제는 그렇게 받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답니다. 일대일로, 상호주의로 가자는 거죠.

결국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인도주의 사업에 협조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대신 실질적으로 금강산 관광 재개를 통해 현금이 들어오는 구조가 짜진다면 자신들에게도 나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전략을 세울 것으로 보입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북한은 지난 9월 당국회담을 열자는 정부의 제안에 대북 전단 살포 문제를 거론하며 진정성이 의심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재까지 전단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북한은 실무접촉에 응했는데요. 이것도 북한의 입장이 바뀐 것이라고 봐야 할까요?

정세현 : 최근에 대북 전단 활동이 뜸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전단을 중지시키는 문제는 당국회담에서 하려는 전략을 세웠을 수도 있습니다. 남한이 이산가족 상봉을 그렇게 중시한다면 금강산 관광 재개와 함께 일종의 '플러스 알파'로 전단 문제를 확실히 하라고 압박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에 매달리는 것으로 비춰지면 북쪽은 더욱 이 문제를 조건화할 수 있습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한편으로 회담의 속도를 조절하는 카드로 쓸 수도 있습니다. 일단 상대를 링 안으로 불러 놓고 거기서 잽이든 훅이든 날릴 수 있는 카드를 가지고 있겠다는 심산일 겁니다. 북한이 이번 실무접촉에서 구체적이고 실속있는 회담을 원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내비쳤다는데, 이산가족 상봉을 레버리지로 삼아서 금강산 관광 재개와 전단 문제를 가져다 놓을 수 있습니다.

남북 당국회담, 수석대표는 통일부 차관?

프레시안 : 회담이 당장 11일로 다가왔습니다. 차관급 회담 대표로 누가 나서게 될지도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요.

정세현 : 일단 북측부터 보면 조평통 서기국장은 내보내지 않을 겁니다. 2013년에 남측 통일부 차관의 회담 상대로 북측 조평통 서기국장을 주장했는데 북한이 이 제안을 걷어찼기 때문입니다. 부국장을 내보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측에서 누가 나갈지도 관심인데 통일부 차관이 아니라 청와대 인사가 나간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참 통일부로서는 비극적인 일입니다. 남북 차관급 회담에서 통일부 차관이 수석대표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통일부 차관 외에 청와대 인사도 거론되고 있는 것이 현 정부에서의 통일부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이건 정책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통일부가 해야 할 일이 없어지니까 존재감도 낮아지고,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이 된 것 아닙니까.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에 통일부를 없애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지금 통일부를 보면 마치 거동이 불편하고 의식 불명으로 누워있는 환자가 돼버린 것 같습니다.

남북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려면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곳에서 회담 수석 대표도 나와야 합니다. 청와대는 실무하는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조정만 하는 곳입니다. 통일부가 이행 계획만 세우고 나머지는 청와대에서 하면 되는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실무를 담당하는 부처에서 회담을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김치를 담가야 할 사람한테 밭에 가서 무랑 배추만 뽑으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남북회담도 어차피 상대방이 있는 회담이니까 외교랑 별로 다를 것이 없다면서 외교관 출신들이 남북회담에 끼어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해서 성공한 사례가 많지 않습니다. 남북은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아닌 '특수관계'입니다. 그래서 남북 간 대화는 일반 외교의 대화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외교관이 이런 것을 이해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북한이 유엔에 가입했으니까, 남북대화도 국가 대 국가의 대화로 봐야 하고, 그렇다면 남북대화도 외교 관행대로 진행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북한이 예절도 안 지키고, 다음 회담 날짜도 안 잡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가 어디있냐며 펄펄 뛰는 외교관들이 있습니다. 남북관계를 일반적인 국가 대 국가 관계로 보면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물론 외교는 전문적인 영역입니다. 그 바닥에서 익힌 문화도 있구요. 국가 대 국가 관계에서는 사실 명분과 실리를 교환해도 되고, 서로 실리를 찾으면서 윈-윈할 수도 있습니다. 외교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따질 여지가 큰데, 남북관계는 실익이 적더라도 명분에서 밀리면 많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역입니다.

통일 문제는 국내 정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념 싸움으로 번질 소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명분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에 퍼주고 군사적 긴장 없어지면 남북관계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둔 셈인데, 남북 간에는 이런 실익을 챙기면서도 뺨을 맞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도록 서로 예의를 지키는 선이 있습니다. 외교관 출신들이 이런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외교부 출신이었던 홍순영 통일부 장관이 회담을 이끌었던 5,6차 남북 장관급 회담 중 6차 회담이 결렬되기도 했습니다.

외교가 그렇듯이 남북관계도 전문적인 영역입니다. 학자 출신으로 장관이 된 경우만 하더라도 남북관계를 오랜 시간 연구했기 때문에 북쪽의 '코드'를 읽을 줄 압니다. 한편으로는 회담 탁자 밑으로 무엇을 얼마나 주든 받든 생색을 내지 않고 넘어가야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국내 정치적인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국제무대에서 외교만 하던 사람들은 이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북쪽에서 이번 당국회담 남측 수석 대표로 통일부 인사가 아니라 청와대 인사가 나오라고 요구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는데, 이건 북한의 자가당착입니다. 남한이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통전부 인사가 회담의 수석대표로 나와야 한다고 했을 때 북한은 조평통을 고집했고 결국 회담은 파행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되려 이번에 상대의 회담 대표를 지정하고 있습니다. 북측의 요구가 사실이라면 스스로 자신들의 입장을 뒤집는 것 아닙니까?

프레시안 : 그런가 하면 일부에서는 차관이 회담에 나가서 뭘 할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인데요. 그래서 정말 남북이 대화 의지가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정세현 : 어차피 회담은 상부의 지침을 받아서 하는 겁니다. 남북 장관급 회담이 열린 이후에 남북 간에 경제협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경추위(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이 회의가 차관급이었고 여기서 많은 합의가 나왔습니다.

국방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 국방장관 회담 이후에 열린 후속 회담은 남북 장성급회담 이었습니다. 차관급이라고 해서 사업을 합의하거나 추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8.25 합의 1항에 명시됐던 당국회담이 변형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상대방으로부터 받아내려는 의지만큼은 강해 보입니다.

앞으로 장관급 회담을 어렵게 만든 2013년의 '격' 문제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차관급 회담을 장관급 회담과는 현격히 격이 떨어지는 실무회담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차관도 정무직 아닙니까? 고위직이기 때문에 의미없는 회담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회담 대표의 '격'을 따지는 것이 자충수가 된 셈인데, 그렇다고 차관급 회담이 의미 없는 회담이 될 것이고, 그래서 남북이 대화 의지가 없다고 평가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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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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