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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주는 왜 노무현·문재인을 겨냥했나?

[시사통] 10월 7일 이슈독털

망언을 서슴지 않는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두고 <한겨레>는 '사설'에서 "인격파탄자로 의심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엄청 센 비판입니다만 고개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성은 차치하고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망언을 내뱉고 있으니 이리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겠죠.

하지만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합니다. 고영주 이사장의 망언이 인격파탄 요인 말고 고도의 장삿속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의심할만한 정황이 뚜렷합니다.

고영주 이사장의 망언엔 패턴이 있습니다. 특칭과 전칭을 교묘히 오가며 막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에 대해서는 실명을 특칭 하며 '변형된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한 반면 '김일성 장학생'이 침투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는 검찰, 공무원, 새누리당 등으로 전칭 화법을 썼습니다. 왜일까요?

고영주 이사장에게 노무현과 문재인은 사생결단을 내야 하는 대상일 겁니다. 부림사건 때문인데요. 자신이 공안검사로 있을 때 주물렀던 부림사건이 법원의 재심을 거쳐 용공조작사건으로 최종 판정 났습니다. 고영주 이사장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법조인생이 송두리째 탄핵당할 수도 있는 결정이 내려진 겁니다. 이뿐입니까? 부림사건은 영화 <변호인>으로 극화돼 대중에게 각인되기도 했습니다. 고영주 이사장으로선 '업계'를 넘어 '저잣거리'에서도 손가락질 받는 신세가 돼 버린 것입니다.

이런 치욕적인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선 '맞짱' 떠야 합니다. '용공조작' 판정에 '용공확실' 주장을 맞세움으로써 '용공'에 치떠는 우파세력으로부터 복권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절반의 명예회복이라도 강구해야 합니다. 어차피 고영주 이사장이 헤엄칠 물은 그 바닥일 테니까 어쩌면 그건 절반의 명예회복이 아니라 완전한 명예회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비타협적 반공전사라는 영예까지 얻게 된다면 정치 사회적 초과이익도 향유할 수 있을 것이고요.

고영주 이사장에게 노무현·문재인 두 사람은 복권을 위한 디딤돌입니다. 설령 두 사람을 공격하다가 법정에 서는 한이 있더라도 본전치기입니다. 법정에선 밀려도 진영이 감싸 안을 테니까 남는 장사입니다.

'김일성 장학생'에 대해 전칭화법을 쓰는 이유 또한 장삿속입니다. 바로 강용석의 경우에서 확인된 바로 그 비결인데요. 아나운서 모욕 혐의에 대해 법원이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내린 이유는 강용석 씨의 발언이 "여성 아나운서 일반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써 개별 구성원들에 이르러서는 비난의 정도가 희석돼 피해자 개개인의 사회적 평가에 영향을 미칠 정도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일반화해 얘기하면 모욕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요. 고영주 이사장의 '김일성 장학생' 발언 또한 꿰어 맞추자면 이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목소리 톤을 높여도 모욕죄에 걸리지 않는다는 법률적 확신에 기초해 마구잡이로 망언을 질러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영주 이사장의 장삿속이 이렇다 해서 그를 징치하기가 쉬운 건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문창극의 경우를 떠올릴 사람들이 있겠지만 엄밀히 볼 때 고영주의 경우와 문창극의 경우는 다릅니다. 고영주는 이념을 건드린 반면 문창극은 민족을 건드렸습니다. 이런 차이가 우파의 태도 차이를 불러옵니다. 문창극의 경우엔 우파의 진영논리가 제어된 반면에 고영주의 경우엔 우파의 진영논리를 자극합니다.

그런 점에서 고영주 이사장에 대한 대응이 여의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무시 전략으로 갈 수도 없습니다. 어차피 우파의 이념공세 중 상당수는 정치적 교전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 진영 결속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무시 전략은 우파의 독판을 열어줍니다. 좋든 싫든 대응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고영주가 노무현·문재인에게 그러하듯 사생결단으로 대처해 문창극의 낙마에 준하는 결과를 끌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이성적 대응입니다.

고영주의 사생결단은 자기 복권을 탐하는 것이지만 이성의 사생결단은 합리성의 복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기사는 <시사통> '이슈독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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